언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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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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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리

송대리는한일합방(1910) 이전까지는송북(松北)이라고불렀는데 고려 충신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위열공(威烈公)김취려(金就礪)의본향으로언양(헌산)김씨의본고장이다.

조선 초 예종(睿宗 : 1469)때는 송도리(松道里)라하였다가 성종 때에송동(松洞), 조선 후기에와서 송북(松北)이 되었다. 또 순 우리말로[소디]라고 불렀으며 옛언양현 상북면(上北面)에속했다. 예종 때에는추성못(秋成堤)이 있는현 직동(신흥리)새마을부근까지도 이마을에 속했었다. 한일합방 직후인1910년(언양군 시대) 그이름을송대동(松臺洞)이라고치고 1914년 3월 1일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북·중북면이 합쳐언양면이 되면서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될 때 송대리라 하여울산군 언양면에 속한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부리

서부리는 조선 후기숙종 때(1711)는 현재의동부리·남부리와 합하여읍내리(邑內里)라 하였다.정조 초(1777)에 읍내를동부(東部)와 남부(南部)로나눌 때 동부리에 속했고,얼마후(1789) 또 읍내를북부와 남부로 나눌 때북부(北部)에 속했다가,정조 19년(1795) 북부를동부(東部)로 환원할 때다시 동부리에 속했다.

고종 8년(1871) 다시북부로 개칭했다가 고종31년(1894) 또 동부로복칭되었다. 언양군시대(1899)는 읍내 전체를북부와 동부·남부로나뉠 때 다시북부리(北部里)라 하다가한일합방 직후(1910) 언양군서부동(西部洞)과노상동(路上洞)으로나뉘었다. 1914년 언양군이울산군에 합군(合郡)되어종래의 상북면과중북면이 언양면으로합면(合面)되어행정구역을 전면 개편,14개의 법정리로 정리될 때서부동과노상동(路上洞)을 합하여오늘날과 같은서부리(西部里)가되었다.

이 서부리는조선시대 언양현,구한말과 일제 초까지(1895-1914)20년간의 언양군시대를통틀어 읍내(邑內)에속했다.

한국전쟁시절인1952년 2월 서부리는서남부의남천변(南川邊)의 일부를떼어 방천리(防川里)라하여 서부리와 방천리의2개의 행정리로 나뉘어각각의 이장(里長)을두었다.

1989년 1월 1일 울산시조례 제254조에 의하여서부리는 다시 서부1리와서부2리로 방천리는방천1리와 방천2리로 각각분동(分洞)되어 4개의행정리가 되었다. 1992년서부지구택지개발사업으로 그간주택이 많이 들어서면서인구의 급증으로 1997년 1월10일 방천1리의 일부를 떼어방천3리가 신설되어 현재법정 서부리는 5개의행정리(서부1·2리,방천1·2·3리)에 5개의자연부락, 45개의 반(班)으로구성되어 있다. 최근(1997년)송대리의 일부를 떼어방천3리와 동부4리에 각각나뉘어 편입시켰다.

서부리 30번지(현서부2리)에는 옛언양군수의 관사가있었는데 1914년 3월 1일 구상북면과 중북면이 합쳐언양면이 될 때 처음이곳에 언양면사무소를두었다.

동부리

동부리는 조선시대언양현과구한말(대한제국)의언양군시대까지 옛상북면(上北面)의지역으로 그이동변천사는 이웃한서부리(西部里)와 역사를같이하고 있다.

 

조선후기 숙종때(1711)는 현재의서부리·남부리와 합하여읍내리(邑內里)라 하다가정조 원년(1777 : 18세기 후반)이전(영조 때부터)읍내리를 동부와 남부로나눌 때 처음으로 동부리(東部里)라했는데, 이때는 현서부리가 여기에포함되어 있었다.

 

얼마후인 정조13년(1789)에 읍내를 북부와남부로 나눌 때북부리(北部里)라 했다가정조 19년(1795) 다시 북부를동부로 복칭(復稱)했다.이러한 기록들은모두「호구총수(戶口總數)」(1789)와누대에 걸쳐발간된「경상도언양현호적대장」등에통수(統數)·호수·인구와함께 소상히 나타난다.

 

19세기 후반인 고종8년(1871)「영남읍지」의언양현조(彦陽縣條)에의하면 이때 다시북부(北部)로 개칭했다가고종 31년(1894)의 읍지에서는또 동부리로 복칭되는변천을 거쳤다.

 

언양군시대인 고종광무(光武)3년(1899)의「언양군읍지」에의하면 종래 동부리의일부(서반부)를 떼어북부리라 하였는데, 이지역이 후세의 서부리가된다. 즉 읍내 전체를 북부,동부, 남부로 삼분(三分)한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직후의 언양군 상북면의동부리는 다시동부동(東部洞)과노동동(路東洞)으로나뉘었다가 1914년 언양군이울산군에 합군(合郡)되어종래의 상북면과중북면(中北面)이 합쳐울산군 언양면(彦陽面)으로행정구역이 전면 개편될때 동부동과 노동동을합쳐 오늘날의 동부리로정착, 법정리가 된것이다.

 

1980년 2월 고속도로주변 정비사업으로새터마을에 10여호가철거되어 동부리 85-1번지답으로 택지를 조성 이전신축하여 새로운 마을이형성되었다.

 

1989년 1월 1일 울산시조례 제254조의 규정에 따라동부1리와 동부2리로 2개의행정리로 분동되고, 또1990년대 후반 동부2리가인구의 급증으로과대리(過大里)가 되자1998년 4월 15일 울산광역시울주군 이반(里班)설치조례 제3조 및 제4조의규정에 의거 < 리·반의 명칭 및관할구역의변경(조정) > (울주군 공고제98-82호)에 의하여북부지역(직동리쪽)을떼어 분동하여 동부3리를신설하였다.

 

이로써 언양읍은31개의 행정리가 되었고,이듬해(1999) 10월 19일, 그간동부1리가 팽창하면서경계선상인 송대리의남부지역(논)에주공아파트가신축·입주함으로써인구가 급증하여 위의 규정에의거하여(울주군 공고제1999-284호) 송대리의 일부를이속(移屬)시켜 동부1리의주공아파트지역(종래송대리 일부지역 포함)을떼어 동부4리를 신설하여오늘에 이른다. 언양읍의 행정중심지인언양읍사무소(동부리273번지)는 현재 동부3리에소재하고 있다.

남부리

남부리는 조선시대언양현(彦陽縣)상북면(上北面)에속하였다. 18세기 초인숙종 37년(1711)에발간된「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慶尙道彦陽縣辛卯式戶籍大帳)」에의하면, 당시 상북면일대를 송북(松北 : 현송대리)·읍내(邑內)·마흘(馬屹)·천소(泉所)의4개리로 나눌 때 현재의서부리·동부리와 함께읍내리(邑內里)라하였다.

18세기 후반인정조 1년(1777) 이후 읍내리를북부(北部 : 뒤에 동부, 또북부 등 여러번 명칭변경)와 남부(南部)로 나뉠때 남부리가 된 후 계속 그이름을 사용하였다. 언양군 시대(1895-1914)는남부동(南部洞)이라 했고,또 1914년 3월 1일 언양군이울산군에 합군되면서종래의 상북면(上北面 : 현언양읍의 남부지역)과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의 북부지역)을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될 때이동(里洞)을 전면개편하여 14개 법정리로나누면서남부리(南部里)라 한 후오늘에 이른다.

1989년 1월 1일울산시 조례 제254조에의하여(里班)의 명칭 및관할구역의조정(변경)으로 남부1리와남부2리로 나누어 2개의행정리가 되면서 각각의이장(里長)을 두었다.

어음리

어음리는조선시대(언양현)와구한말(대한제국)을 거쳐일정 초기까지(언양군) 옛상북면(上北面)에속하였다.

 

18세기 초반인조선 숙종37년(1711)「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의상북면은 현 언양읍의송대리 이남의남부지역으로 송북(松北 :현 송대리)·읍내(邑內 : 현 서부·동부·남부리전역)·마흘(馬屹)·천소(泉所: 현 반천리와 반연리)의 4개리로 구성되어 있었다.따라서 여기서의마흘리(馬屹里)는 현재의어음리와 반송리 지역을합친 이름이다. 바꿔말하면 현재의 어음리는당시 마흘리의일부(서부지역)인것이다

 

그후 60여년 후인18세기 후반의 정조 1년(1777)에나온「경상도언양현(정유식)호적대장」에는종래의 마흘리를마흘(馬屹)·어음(於音 :니리미)·반송(盤松)으로삼분(三分)되어 반송리가 독립되고 나머지가마흘과 어음리이니, 곧마흘은 현재의어음상리이고 < 어음 > 이어음하리에 해당하는것이다.
이 마흘과 어음두 마을은 정조 13년(1789)에발간된전국단위의「호구총수(戶口總數)」란책에서 오늘날과 같이어음(於音)으로통합된다.

 

이후 조선말기 고종 32년(1895) 언양현이언양군(彦陽郡)으로승격될 때도 변동없이 < 어음 > 이란 이름으로역시 상북면에 속했다가,한일합방(1910)을 거쳐 1911년어음동(於音洞)이라하였다. 다시 일정초기인 1914년 3월 1일행정구역의개편(동리구역변경)에따라 종래의 상북면과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의 북부지역)이합쳐 언양면(彦陽面)이 될때 중남면(中南面)평리(平里)의 일부를 합하여어음리(於音里)가 되어 14개법정리(法定里)의 하나가되었다. 이 날을 기해언양군이울산군(蔚山郡)에병합(倂合)되어 울산군언양면 어음리로시작, 오늘에 이른것이다.

 

그후어음리는 일정시대를거쳐 광복후인 1947년경 옛요도(蓼島)의 중심지역을경계로 상하로 나누어서북쪽(읍내쪽)을어음상리(於音上里 : 약칭於上 또는 於上里),동남쪽(고무재쪽)을 어음하리(於音下里 : 약칭於下 또는 於下里)로 한2개의 행정리(行政里)로나누어 각각 이장(里長)을두면서 오늘에 이르고있다. 또한 1980년도고속도로 주변 정비로경부고속도로 주변의 불량주택이헐리고 취락구조개선으로 어음리로이전하여 한 마을을이루었다.

 

어음리는풍수지리설에 의하면다음과 같은 내력이전해온다. 어음리는화장산(花藏山)을배경으로 하여 남쪽은남천내(南川)가, 북쪽은고헌산 아래에서발원(發源)한 감천 (坎川 : 감내거랑)이동리(洞里)를 둘러싸고흘러 최하단부에서양수(兩水)가 합류되는삼각주(三角洲 : 델타)를요도(蓼島)라 하는데, 흡사배가 떠가는형국(行舟形)이라 한다. 아직도 마을중앙에는 짐대(돛대)터가남아 있다. 그런데어음하리는 당시우물(공동)이 하나밖에없었으므로 부자들이살고, 어음상리는 마을에우물이 여러 군데 있어 배밑을 너무 많이뚫었기 때문에 물이 새어못산다고 하였다.

반송리

반송리는 조선시대중기 이전에는 사료가없어 연혁을 알 수 없다.이후(언양현)부터구한말(대한제국)을 거쳐일정초기까지(언양군) 옛상북면(上北面)에속하였다.

 

18세기 초반인조선 숙종37년(1711)「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의상북면은 현 언양읍의 송대리 이남의남부지역으로 송북(松北 :현 송대리),읍내(邑內 : 현서부·동부·남부리전역), 마흘(馬屹), 천소 (泉所 : 현 반천리와반연리 지역)의 4개리로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여기서의 마흘리는현재의 어음리와 반송리 전역을 합친이름이었다. 바꿔 말하면현재의 반송리는 당시마흘리의일부(동부지역)인것이다.

 

그후 60여년이지난 18세기 후반인 정조1년(1777)에나온「경상도언양현(정유식)호적대장」에는종래의 마흘리를 마흘 (馬屹), 어음(於音 :느리미). 반송(盤松)으로삼분(三分)되어, 반송리는종래의 마흘리에서 분리독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반송리는이름 그대로 마을뒷산(고무재)에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치가 옆으로퍼진 소나무)이 울창하여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한다. 정조 13년(1789)에발간된 전국단위의「호구총수(戶口總數)」란책에서 반어리(盤於里)라했는데, 이것은반송(나무 이름 및마을이름)이 늘어져 있어그렇게 부른 것으로해석된다.

 

이후 조선 말기고종 32년(1895) 언양현이언양군(彦陽郡)으로승격될 때도 변동없이 < 반송 > 이란 이름으로역시 상북면에 속했다가, 한일합방을거쳐 1910년 10월에반소동(盤所洞)이라 하고,다시 일제초기인 1914년 3월1일 행정구역의 개편 (동리관할구역 변경)에따라 종래의 상북면과중북면(中北面 : 직동리이북의 현 언양읍북부지역)을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될때 오늘날의반송리(盤松里)가 되어14개의 법정리(法定里)의하나가 되었다. 이 날을기해 언양군이 울산군에 병합(倂合)되어울산군 언양면 반송리가되었다.

 

그후 반송리는일제시대를 거쳐 1945년광복을 거쳐 한국전쟁이치열하던 1951년 7월자연부락인 장촌(張村)과 공촌(孔村)의 사이를경계로 상하로 나누어반송상리(盤松上里)와반송하리(盤松下里)로2개의 행정리(行政里)로 분동(分洞)하였다. 이때윗마을인 장촌을반송상리의 관할로,아랫마을인 공촌이남지역을 반송하리의관할지역으로 하여각각 이장(里長)을두었다.

 

1980년대 후반에들어오면서언양↔울산간의 도로변을중심으로 중소기업체,아파트 등이 들어서고축산 및 과수업 등이 성행하면서 인구가급증한 반송하리는 1995년3월 25일 울산시 조례에의하여 반송하리 중반송상리에 인접한북부지역 (공촌)을떼어반송중리(盤松中里)를신설하여 현재(법정)반송리는 3개의 행정리로나누어져 각각 이장을두고 있다.

구수리

18세기 초엽인조선 숙종 때(1711)는 언양현삼동면(三同面)에조일(早日)·송면(松面)·작동(鵲洞)의3개리로 분동 되어 있었다. 이때 구수리와둔기(芚基), 출강(出崗)은모두 작동리에 속했다.18세기 말엽인 정조 1년(1777)에발간된「경상도언양현(정유식)호적대장」 에의하면, 당시 삼동면은조일(早日)·왕방(旺方)·하잠(荷岑)·작동(鵲洞)·구수(九藪)의5개 동으로 분리되었는데,구수리는 이때작동리에서 분리되어 처음으로나타난다.

 

19세기 초인순조13년(1813)「언양현(계유식)호적대장(川南三面)」에는구수리(九秀里)로개칭되었다가, 19세기후반인 철종12년(1861)의 「(신유식)호적대장(全邑六面)」삼동면조(三同面條)에는조일(早日)·보은(寶隱)·송정(松亭)·금곡(金谷)·사촌(沙村)·하잠(荷岑)·작동(鵲洞)·구수 (九藪)의8개 리로 나뉘었다. 종래의구수(九秀)가 구수(九藪)로복칭(復稱)되었다.

 

고종1년(1864)에 나온 지리학자고산자(古山子)김정호(金正浩)의지리서「대동지지(大東地志)」방면조(坊面條)에는종래의 삼동면 일부를 떼어하남면(下南面)이신설되어 언양현내에 7개면이 나타난다. 즉천남(川南)에 남쪽으로처음은 5리 끝은20리(南初五終二十)라 하여중남(中南), 서남쪽으로 처음은10리 끝은30리(西南初十終三十)라하여 하남(下南), 남쪽으로처음은 10리 끝은30리(南初十終三十)라 하여삼동(三同), 이렇게 천남인 오늘날의삼남. 삼동면 지역에 < 中南 > · < 下南 > · < 三同 > 의3개 면으로 분리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구수리는 삼동면에속했다.

 

고종8년(1871)판「嶺南邑誌)」언양현방리조(坊里條)에"하남면은 8리가 속하는데,곧조일·대계·보은·왕방·하잠·신광·작동·구수이다 (下南面屬里八早日大溪寶隱旺方荷岑新光鵲洞九藪)"라하였다. 이때 종래의삼동면과 하남면이 합쳐(통합)하남면이 되면서8리로 나누었으니 구수리는 하남면에속하게 되었다.

 

고종 31년(1894)하남면 구수리는 < 九秀里 > 로 바뀌었다가언양군 시대인 고종광무(光武)3년(1899)「언양군읍지」에는다시 < 九藪里 > 로 바뀌고, 한일합방 직후인1910년 10월 행정구역의개편으로 언양군삼동면(하남면이 이때삼동면으로 복칭됨)구수동(九秀洞)으로 바뀌었다.

 

일제 초기인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의개편(동리관할구역변경)에 따라 작동(鵲洞)의일부를 흡수하여오늘날의 법정리인구수리가 되면서, 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어 울산군 삼동면구수리(九秀里)가 되었다.1931년 10월 31일 경상남도령제17호의 시행으로이듬해인 1933년 1월 1일인접한 중남면(中南面 : 현삼남면 전역)과삼동면(三同面)이합면하여(통합)삼남면(三南面)이되어 삼남면 구수리가되었다.

 

1973년 3월 12일대통령령 제6542호를 공포,동년 7월 1일 삼남면의구수리가 언양면으로이속(移屬)되어 15개법정리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법정)구수리는위(서쪽)로부터아래(동쪽)으로 구수(九秀 :본마을)·대암(大巖 )·무동(武洞)의3개 행정리로 나뉘어 각각이장을 두고 있다.

반천리

반천리(盤泉里)는원래 조선시대(언양현)와구한말∼일제초기(언양군)까지 모두이웃의 반연리(盤淵里)와같이 언양현(군)의 상북면(上北面 : 현언양읍의 송대리 이남지역)에 속한 동남부에위치한 마을이었다. 1914년3월 1일 행정구역의개편으로 상북면이 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의 직동리 이북지역)과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되고,동시에 언양군이울산군에 병합되자울산군 언양면 반천리와 반연리로각각 개편되었다.

 

반천리와반연리는 모두 조선 후기(19세기 후반)인 고종초까지는 모두 한 마을로천소(泉所)라 하였으니, 그이전의 두 마을내력은 거의 같다.

조선 중기이전의 내력은 문헌의부족으로 상세히 고찰할수 없다. 18세기 초반인 숙종37년(1711)에발간된「언양현(신묘식) 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상북면(上北面)은송북(松北 : 현송대리)·읍내(邑內 : 현동·서·남부리)·마흘 (馬屹: 현어음·반송리)·천소(泉所: 현 반천·반연리)의 4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9세기 초엽인 순조32년(1832) 「경상도읍지」에실린 < 언양현읍지 > 방면조(坊面條)의 6개면(上北·中北·下北·上南·中南·三同)가운데 상북면은 7개 리가 실려 있는데, 이때종래의 천소리는 그일부(동북부)를 떼어반호리(盤湖里 : 현 반연리지역)라 하여분동되었다.

 

약 30년 후인19세기 후반 철종12년(1861)「언양현(신유식)호적대장」에반호리는 다시 천소리에합동(合洞)되었다가, 10년후인 고종8년(1871) 「영남읍지」 < 언양현 > 조에다시 천소리 중 종래의반호리 지역을 떼어부제(釜堤 : 가막못)라개칭(改稱)한 후 오늘에이르기까지 반천리와반연리로 분리되어왔다.

 

현재의반천리 지역인 당시천소(泉所 : 샘소)는대한제국에서 한일합방에이르는 언양군 시대까지변동이 없다가 1910년 8월한일합병이 이루어지고 그해10월 1일 행정구역의개편으로 천소리는고무재를 경계로 그이북지역의 산간지역(현미연1리(고무재마을)과동남부의 살수를떼어 천상(泉上)이라 하여천상과 천소의 2개 동으로분리되었다.

 

일정 초기인1914년 3월 1일 면리동(面里洞)행정구역의조정(개편)으로 종래의상북면과 중북면을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되면서 언양군이울산군에 병합될 때 이 두마을에 반소(盤所 : 현반송리)·반호(盤湖 : 현반연리)의 각 일부를 합쳐반소·반호의 반(盤)과 천상·천소의천(泉)을 떼어 울산군언양면 반천리가 된 후오늘에 이르기까지언양읍의 법정리 중하나로 자리를 잡은것이다.

일제시대를거쳐 1945년 8월 광복이 되고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10월(법정)반천리는천소(泉所 : 샘소)와미연(米淵 : 쌀수)의 2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각각 이장(里長)을두었다.

 

미연리는동남부 지역, 즉언양↔울산간의 국도와고속도로 이남의일부지역(살수)을제외하고는 대부분산악지대(고무재 마을)로 면적은 반천리의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그 동남부 지역이개방되어 있다.

미연리의남단 남천변인 반천리1023-51번지 일대에현대산업개발(주)가시공한 반천현대아파트가1994년 12월 13일 준공되어998세대에 3,000여 명이입주하자 가구 및 인구의급증으로 1995년 3월 25일울산시 울주구(蔚州區)이반(里班)설치조례에의거, 이 지역을 분리하여 미연2리라 하고여타(餘他)의 종래미연리지역(고무재,살수)을 미연1리로 하여 2개동으로분동(分洞)되었다.

 

그러나아파트촌인 미연2리는세대와 가구수가엄청나게 많아 1인의이장(여성)으로써는이정(里政)업무가 벅차이듬해(1996) 4월 17일 울주구 조례에 의하여미연2리(반천현대아파트)를동서로 분동하여 2리와3리로 분리하였다.

 

아파트는 전6동(棟)인데 그중 절반을갈라 서쪽(구수리대동쪽)의 3개동(101·102·103동)을 미연2리,동쪽(입구 정문쪽) 3개 동(104.105. 106동)을 미연3리로분할하였다.

 

따라서현재(법정)반천리는천소리(泉所里 :반송하리와 살수 사이의국도변)·미연(米淵)1리(고속도로서쪽 산간지대인고무재와 동남 국도변의살수)·미연2·3리(모두반천현대아파트지역)의4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각각 이장을 두고 있다.이로써 언양읍은 29개행정리로 구성되게되었다.

반연리

반연리(盤淵里)는원래 조선시대언양현으로 19세기 후반인고종 초기(1871년 이전)까지이웃(남쪽)의반천리(盤泉里)와 같이 상북면(上北面 : 현언양읍의 송대리 이남지역)에 속한동남단(東南端)에 위치한마을로 천소(泉所)라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 두 마을의 내력은거의 같다.

 

조선 중기이전의 내력은 문헌이부족하여 고찰할 수 없다.18세기 초반인 숙종 37년(1711)에발간된「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 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상북면(上北面 : 현 언양읍송대리 이남 지역)은송북(松北 : 현송대리)·읍내(邑內 : 현동·서·남부리)· 마흘(馬屹: 현어음·반송리)·천소(泉所: 현 반천, 반연리)의 4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세기초엽인 순조32년(1832)「경상도읍지」에실린 < 언양현읍지 > 방면조(坊面條)의 6개면(上北·中北·下北·上南·中南·三同)가운데 상북면은7개 리가 실려 있는데, 이때종래의 천소리는 그일부(동북부)지역을 떼어반호리(盤湖里 : 현반연리의가막못안·톡골지역)라 하여 분동되었다.

 

약 30년 후인19세기 후반 철종12(1861)「언양현(신유식)호적대장」에반호리는 다시 천소리에합동(合洞)되었다가, 10년후인 고종8년(1871) 「영남읍지」 < 언양현 > 조에다시 천소리 중 종래반호리(가막못안·톡골)지역을떼어 부제(釜堤 :가막못안)라 개칭(改稱)한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천리와 반연리지역으로 분리된 것이다.

 

한편사연댐의 축조공사(1960년대중반)로 수몰된 지역(옛반연리지역 : 아래옹태와세연동 일대의 산간계곡지대)은 원래 옛언양현 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 직동리이북지역)에 속해, 조선초기 예종 때(1469)에편찬된「경상도속찬지리지」언양현의옹곡리(瓮谷里 : 후일의 옹태)에속했고, 또 숙종 때(18세기초엽)는 대곡리, 정조때(1777)는 옹태리(瓮台里),뒤에 고하리(庫下里 : 현반곡리)와 합쳐 다시 대곡리라하였다. 19세기 초인 순조때(1832)는 반곡리(盤谷里)로바뀌고, 19세기 말인 고종초(1871)에 대곡(大谷)과고하(庫下)로 나뉘었다가, 1910년 한일합방 직후행정구역의 개편으로다시 두 마을(대곡, 고하)을합쳐 반곡(盤谷)이라하였다.

이후 옛옹태리 지역은 상하로분리되어 윗옹태는태기리(台機里)에,아랫옹태(세연동 포함)는반연리에속했다(원반연마을).

 

한일합방 후일제초기인 1914년 3월 1일행정구역의개편(面里관할구역조정)으로 언양군상북면과 중북면이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될 때종래 상북면지역인 반호리(가막못안,톡골)와 동부리의 일부중북면 반곡리의 일부인원 반연지역(사연댐으로수몰된 지역)을 합쳐오늘날의반연리(盤淵里)로 법정리(法定里)가되었는데, 이때 언양군이울산군에 흡수 통합되어울산군 언양면 반연리가되었다.

 

반연리는일제시대를 거쳐 1945년 8월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이치열하던 1951년(신묘)년 12월반연(盤淵)과 반호(盤湖)의2개의 행정리(行政里)로분리되어 각각이장(里長)을 두었다. 당시반연리에는 옹태와세연동, 반호리에는가막못안과 톡골의자연마을(4개)로 구성되어있었다.

 

2개의행정리(반연, 반호)는제1공화국(자유당정부)말기인 1959년 12월 다시 합쳐단일리(單一里)인반연리(盤淵里)가 되어1인의 이장을 두었으니이후의 반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법정리인 동시에행정리가 되었다.

 

1961년 5월 16일군사정부가 수립되고 1962년2월 울산공업센터 설치에착수하였다. 그해 6월 1일울산시 승격으로 종래의울산군이 울산시와울주군으로 분리되면서울산공업단지의공업용수용으로 대곡리의대부분 태기리·반연리의각 일부(산간계곡 지역)에사연댐(泗淵堤)을 축조(1962. 9-65. 12)하였다. 이때종래 반연리의본마을이던(행정)반연리(아래옹태,세연동 지역)가 전부수몰(水沒)되어 철거하고주민들은 각지로산거(散居)하였다. 이후종래 반호리 지역(가막못안.톡골)이 법정리인반연리(盤淵里)의 이름을사용하면서 행정리를겸하고 있다. 따라서 종래행정리의 입장에서 보면수몰된 (원)반연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고유의 제 이름(반호리)를버린 셈이 된다.

대곡리

대곡리(大谷里)의내력을 살펴보면 자못복잡한 양상(樣相)을 띠고있다. 대곡리는 본시조선시대 경주부(慶州府)외남면(外南面)의 대곡리와 언양현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의 직동리이북지역)의 대곡리로나뉘어져 있었다.고헌산에서 발원하여두서면 차리(次里)에서 구량리를 거쳐두동면 천전리(川前里)→반구대로 흐르는대곡천(大谷川)을 경계로했다.

 

우선 경주대곡리부터 고찰해보겠다. 조선 초기경주부의 남쪽지역을남면(南面)이라 하다가중기 이후에 남면이내남면(內南面)과외남면 (外南面)으로나뉘었다. 1895년(고종 32)행정구역 중 종래의부(府)와 현(縣)을 폐하고모두 군(郡)으로 통일할 때경주부는 경주군,언양현도 언양군이되었다.

 

경주군 외남면(현두동, 두서면 지역)은대한제국 시대인광무(光武) 10년(1906) 9월울산군으로이속(移屬)되면서 울산땅이 되었다. 이때면이름을두북면(斗北面)이라 고쳐대곡동(大谷洞 : 현 대곡리반구마을 및 한실의동부지역)을 포함한 24개동을 관할하였다.

 

한일합방직후인 1910년 10월 1일행정구역 개편 이후 1911년이후 두북면이언양↔경주간의 국도를경계로 동쪽은두동면(斗東面), 서쪽은두서면(斗西面)으로양분(兩分)될 때 대곡리는울산군 두동면에 속했다.
※두북면의분면(두동, 두서)시기에관하여 이설(異說)이 있다.즉 1911년설(두서면),1914년설(李有壽),1917년설(울산읍지) 등이있으나 여러사료로 미루어 볼 때 1911년후반 ∼1912년초로 보는 것이타당할 것이다(崔二洛).

 

한편조선시대 언양현의대곡리는 현 대곡리의대곡천(大谷川) 이남의반곡리와 인접해(한때는합쳐져) 있었다.

그후 18세기초엽인 숙종37년(1711)「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은북면(北面)·남면(南面)·현내면(縣內面)(?)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중북면의 현 언양읍북부지역은대곡(大谷)·고하(庫下 : 현반곡리)·다개(茶開 : 현평리지역포함)·기지(機池 : 현태기리와 직동리 지역)의 4개리로 나뉘어져있었다.

 

대곡리는18세기 후반인 정조1년(1777)의「(정유식)호적대장」에는옹태리(瓮台里)로 그이름이 바뀌고,중북면(中北面)에 속했다. 다시 정조13년(1789)의「戶口總數」에의하면대곡(大谷)·다개(茶開)·직동(直洞)의3개리로 편성되는데, 이때종래의 옹태리는 서쪽의 고하(庫下 : 현반곡리)를 합쳐 대곡리가되니 그 범위가확대된다.

 

그로부터40여년 후인 19세기 초 순조32년(1832)「경상도읍지」에실린 < 언양현읍지 > 방면조(坊面條)에"중북면은 3개 마을이 속해있는데 (반곡, 다개,직동), 그중 반곡리는관문으로부터 20리 거리에있다(中北面屬三里盤谷里距官門三十里)"고했다. 이때 다시 대곡리는반곡리로 그이름이 바뀐 것이다.

 

고종8년(1871)「영남읍지」에실린 < 언양현읍지 > 에중북면은대곡·고하·다개·직동의4개리로 개편되니 곧종래의 반곡리는 다시 대곡(현재의대곡리지역)과고하(현재의반곡리지역)로 갈라진다.

1910년 8월한일합방후 그해 10월1일(언양군 시대) 대곡과고하가 다시 합쳐반곡동(盤谷洞)이되었다가 얼마 후 또대곡과 반곡으로 나뉘어졌다.

 

이와같이언양현 중북면지역인 현대곡리와 반곡리 지역은조선시대대곡·고하·옹태·반곡등 여러 이름으로뒤바뀌면서 복잡다단하게 변천해왔다.따라서 조선 중기 이후일제초기(1914년 이전)까지는그 이름이야 어찌되었던한 지역(里洞)으로묶여졌다가 한때는분리되는 많은우여곡절(迂餘曲折)을겪었다.

 

1914년 3월 1일조선총독부의지방행정구역개편(面里관할구역조정)으로 종래의상북면(上北面 : 현 언양읍송대리 이남지역)과중북면 (中北面 : 현언양읍의 직동리이북지역)을 합쳐언양면으로 개편할 때대곡리는 반곡리의일부와 울산군 두동면대곡동(옛 경주군 외남면에서울산으로 편입된두북면지역)을 합쳐오늘날의법정리(法定里)인대곡리가 되었다. 이때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되어 울산군 언양면 대곡리가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후(법정)대곡리는 대리(大里 :한실)와 반구(盤龜)의 2개의행정리로 나뉘어 각각의이장을 두었으나 1962년8월(사연댐 축조직전) 통합되었다.

1960년대 중반군사혁명정부가울산공업센타의공업용수용으로 대곡리의대부분과태기리·반연리의 각일부인 대곡천 주위의산간지역에 사연댐을 축조할때(1962. 9∼65. 12) 대곡리의중심이며 본동(本洞)인한실(큰마을 : 大谷)이 동부산간 일부지역을제외하고 거의 수몰되자 서쪽인반구동(盤龜洞 : 반구대가있는 마을)이 중심마을로자리잡아 지금은 경승지반구대(盤龜臺)와 남쪽의수몰된 암각화(국보제285호), 인접한상류의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국보제147호) 등과 더불어국내외적으로 널리알려져 < 반구대 > 가 곧'대곡리' 요,'반구마을'이라는마을이름을대칭(代稱)하기에이르렀다.

반곡리

반곡리는일제 초기인 1914년 이전의조선시대에는 언양현(군)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의 직동리이북지역)에 속했는데, 이웃한 동쪽의대곡리(大谷里)와는밀접한 관계가 있어이동(里洞) 변천사적으로살펴보면, 한때는 대곡리,또 한때는 반곡리, 고하리(庫下里)등의 이름을 반복하다가간간이이합집산(離合集散)되기도하였다. 조선 중기이전에는 문헌의인몰(湮沒)로 알 수없고, 18세기 초반인 숙종37년(1711)「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은현내면(縣內面)(?)· 북면(北面)·남면(南面)(南川)을 경계로 함) 등으로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북면의 현 언양읍 직동리이북지역은대곡(大谷)· 고하(庫下)·다개(茶開: 현 평리지역포함)·기지(機池 : 현태기리 틀못산과 직동리지역)의 4개 리로 나누어져있었다.

 

여기서의고하(庫下)가 곧 현 반곡리지역이다. 대곡리는 18세기후반의 정조 즉위(1777)이전(영조 때)에옹태리(瓮台里)로 그 이름이 바뀌고고하리와 같이중북면(中北面)에속한다.

 

대곡리는예로부터 반구대 밑대곡천(大谷川)을 경계로북쪽(현 반구마을)은 경주부 외남면(外南面)대곡리이고 남쪽(현 반곡쪽)은언양현 중북면 대곡리로나뉘어져 있었다(1914년 3월이전까지).

 

18세기 말인정조 13년(1789)에발간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중북면은대곡(大谷)·다개(茶開)·직동(直洞)으로 삼분동(三分洞)되니곧 종래의 고하리와옹태리(종래 대곡리지역)를 합쳐대곡리(大谷里)라 했음을알 수 있다. 그범위가 매우 확장되었던것이다.

 

그로부터40여년 후인 19세기 초엽순조32년(1832)「경상도읍지」에실린 < 언양현읍지 > 방면조(坊面條)에 "중북면은 3개 마을(반곡,다개, 직동)이 속해 있는데그 중 반곡리는 관문에서20리 되는 거리에있다(中北面屬三里 盤谷里距官門二十里)"고했다. 이 때 다시 대곡리는반곡리로 그 이름이 바뀐것이다. 그 범위는 현대곡리 지역을 포함한 지역이다.

 

고종8년(1871)「영남읍지」에실린 < 언양현읍지 > 에중북면은 대곡, 고하, 다개,직동의 4개 리로 개편되니곧 종래의 반곡리는 다시 고하(현반곡리 지역)와 대곡(현대곡리 지역)으로양분(兩分)된다.

 

고종 32년(1895)언양현은언양군(彦陽郡)이 되고1910년 8월 한일합방 후 그 해10월 1일 행정구역의개편으로 종래의 대곡과 고하가 다시 합쳐반곡동(盤谷洞)이되었다.

 

위와 같이옛 언양현(군) 중북면지역인 반곡리와 대곡리지역은 조선 중기 이후대곡·옹태·고하·반곡등 여러 이름으로뒤바뀌면서 복잡다단하게변천해 왔다. 따라서 일제초기(1914년 3월 이전)까지는그 명칭이야 어쨌든 한지역(里洞)으로묶여졌다가 한때는 분리되었다가 하는등 이합집산을 되풀이하여 많은우여곡절(迂餘曲折)을겪었다.

 

1914년 3월 1일조선총독부의지방행정구역개편(面里관할구역조정)으로 종래의상북면(上北面 : 현언양읍의 송대리이남지역)과 중북면이 합쳐언양면(彦陽面)으로 개편될 때 울산군 두동면천전리(川前里)의 일부(윗진티(進峴))와 두서면구영동(九永洞 : 현구량리)의 일부를합쳐 반곡리(盤谷里)가되어 오늘날과 같은법정리(法定里)의 기초로정착되었다. 이 때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되어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가 되면서법정리 겸 행정리의단일마을로 오늘에이른다.

평리

1914년 3월 1일행정구역의 개편으로언양군 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 직동리이북지역)과상북면(上北面 : 현 언양읍송대리 이남지역)을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될 때종래 다개동(茶開洞)의동남부 지역을 떼어평리(平里)로 신설된 것이오늘에 이르는 법정리의기초가 되었고, 이때 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되어 울산군 언양면평리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현재의 다개리에 속해숙종 때는 언양현북면(北面)에, 영조이후에는 중북면에 각각속했으므로 1914년 이전의내력은 다개리와같다.

 

또 이마을에는 조선시대에 각지방의 고을에환곡(還穀)을 저장보관하던 곳집(倉庫)이괴말에 있었다. 동남쪽에 위치한현재의 반곡리가 당시 < 고하(庫下)>라고 한 것도이 창고(社倉)가 있는아랫마을이란 뜻에서나온 것이라 한다.

 

마을 이름을평리(平里)라 한 것은평지에 있는 마을이란뜻이다. 지금의 평리는법정리(法定里)인 동시에행정리(行政里)이다.

다개리

다개리(茶開里)는현 언양읍은 물론, 옛언양군(彦陽郡),언양현(彦陽縣) 시대까지거슬러 올라가 이 지방지명 중 한번도 변화가 없었던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지닌 마을이다. 조선초예종 1년(1469)에발간된「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언양현(彦陽縣)원우조(院宇條)와제언조(堤堰條)에'茶開里'와 '茶開堤'가나타나는 것을 보면최소한 그 이전인 건국직후쯤(?)부터 지금까지 약 550년의역사를 지닌 지명이란사실(史實)을 증명해 주고있다.

 

현재의평리(平里)는 역대로 이다개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3월 그 동남부를 갈라분동(分洞)된 마을이므로이전의조선시대(언양현) 와구한말의 대한제국에서일정초기(1914년 2월까지)의언양군(彦陽郡)시대에이르기까지 다개리와역사를 같이 한다. 따라서여기서 논하는다개리는 1914년 3월이전까지는 현재의다개리와 평리를 합한 < 다개리 > 로 이해하여야할 것이다.

 

위의「경상도속찬지리지」원우조(院宇條)에"고을 북쪽 다개리에우천원이있다.(縣北茶開里于川院)"고했고, 제언조(堤堰條)에는"우천리에 있는다개못은 면적 12結 6負의논에 물을 댈 수있다(于川里茶開堤灌漑十二結六負)"고했다. 위의원우조의 기록을살펴본다면, 당시우천원이 있었던 현반곡리의 일부는다개리에 속한 것으로보이나, 제언조의 기록을보면우천리 (于川里)도이 근처(현 다개리, 평리,반곡리 일부지역)에 따로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따라서 당시 다개리(현평리지역 포함)와고하리 (현반곡리)는 경계를 이루고있었으니 이 부근의 어느지역을 갈라 우천리가따로 있었음을 암시하고있다.

 

조선중기에는 기록이 없어고찰할 수 없고 후기인18세기 초반 숙종 37년(1711)에편찬된「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은 현내면(縣內面)(?)·북면(北面)·남면(南面)(南川을경계로 함) 등으로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북면(北面)의 현 언양읍직동리 이북지역은대곡(大谷)·고하(庫下)· 다개(茶開: 현 평리지역포함)·기지(機池 : 현태기리 틀못산과 직동리지역)의 4개 리로 나누어져있었다. 위의 다개리는당시 북면에 속했으나18세기 후반의 정조즉위(1777) 이전(즉영조시대)에중북면(中北面)에속했다.

 

이 후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에이르기까지 아무런변동없이 그대로다개리라 하였다. 고종32년(1895) 언양현이언양군으로 승격되고, 1910년8월 한일합방 직후그 해 10월 1일 행정구역의개편 때다개동(茶開洞)이라 했다.또 1914년 3월 1일조선총독부의지방행정구역개편(面里관할구역조정)으로 종래언양군 상북면(上北面 : 현언양읍 송대리이남지역)과중북면(中北面 : 현 언양읍직동리 이북지역)을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될 때원다개(原茶開)의 일부(동남부지역)를 분할하여평리(平里)를 신설하고두서면 차동(次洞 : 현次里)의 일부를 편입하여다개리라 한 것이 오늘날법정리(法定里)로서의기초가 되었다. 이때 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되어 울산군 언양면다개리가 되어 오늘에이른다.

 

합면(合面)이전의 옛 상북면의소재지는 현 언양읍남부리 239번지에 있었고중북면의 소재지는 현다개리 544번지(굼다개)에있었는데 뒤에 직동리 513번지로 옮겼다가다시 합면되었다. 중북면최후의 면장은김홍경(金洪經)으로 합면후 초대 언양면장으로계속 재임하였다.

태기리

태기리는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그해 10월 1일 단행된행정구역의 개편으로종래의 직동리(直洞里)가기지동(機池洞)·직동(直洞)· 남동(南洞)으로삼분동(三分洞)되기이전까지는 현재의직동리와 함께 한마을이었다.

 

18세기 초인조선 숙종 이전에는기지리(機池里)라 하여언양현 북면(北面)에속했다가 영조이후부터는직동리(直洞里 : 현태기리지역 포함)라 하여중북면(中北面 : 현 언양읍직동리 이북지역의 옛面이름)에 속했다. 또 고종32년(1895) 6월 언양현이언양군으로 승격되었을 때도 변동없이중북면 직동리였으니 1910년10월 이전까지는마을이름이야 어찌되었든태기와 직동은 한 마을로그 내력을 같이 한다.→ < 직동리마을내력 > 참조.

 

그 후 1914년3월 1일 지방행정구역의개편(面里관할지역조정)으로 종래 언양군상북면(上北面 : 현 언양읍송대리 이남지역)을 합쳐 언양면(彦陽面)이될 때 태동(台洞 :(윗)옹태지역)에기지동(機池洞)의일부(틀못산)를 합쳐태기리(台機里)라 한 것이오늘날법정리(法定里) 로서의기초가 되었다.
이 때언양군(彦陽郡)이울산군(蔚山郡)에병합(倂合)되어 울산군언양면 태기리로 법정리겸 행정리의 단일마을로 오늘에 이른다. 1965년사연댐(泗淵堤)의 축조로아랫옹태(반연리에속함)와 윗옹태(태기리에속함) 마을 모두가수몰되자 당시윗옹태마을 전 주민 33가구 중 18 가구는부산·울산·언양 등지로각각 흩어져이주(移住)하고 나머지일부 농토가 있는 15 가구가미수몰지대인상류지역으로 옮겨와새로이 마을을형성한 것이 현재의태기리 옹태마을이다.

 

이 마을은약 250m 간격으로 산모롱이를 사이에 두고 두뜸(자연마을)이 서북에서동남으로 나란히 있는데,직동리(直洞里) 신흥욋골에서 들어가는 서북쪽의 첫동네가 윗마을이고, 그다음의 동쪽 동네가아랫마을이다.

 

이아랫마을에서 동쪽산모롱이를 휘돌아 다시서북쪽으로 올라가면태기리 본동(本洞)인틀못산에 이른다.

 

원래 15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아래, 윗마을 각각 6 가구씩모두 12 가구가 살고 있다.

직동리

직동리는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0월1일 행정구역의 개편으로종래의 직동리(直洞里)가직동(直洞)·남동(南洞)·기지동 (機池洞)으로삼분(三分)되기 이전에는현재의 태기리(台機里)지역과 함께 같은마을이었다. 따라서 1910년10월 이전의양 (兩)지역은마을내력을 같이한다.

 

조선 초기예종 원년(1469)에편찬된「경상도속찬지리지」언양현조(彦陽縣條)에의하면 당시 언양현은현치소(縣治所)를 중심으로 약 20리이내의 지역을현내면(縣內面),남천(南川)을 경계로 그이북을 현북면(縣北面),이남을현남면(縣南面)으로 하여 크게 3면으로나뉘어져 있었는 듯 하다.뒤에 숙종 이전에현북면은 북면(北面)이되고, 현남면은남면(南面)으로 되었다가, 영조 이후(18세기중엽)에 이르러 남천을경계로 현내면은상북면(上北面), 북면은중북면(中北面)과하북면(下北面)의 3개 면으로 나뉘고남천 이남지역은상남면(上南面),중남면(中南面),삼동면(三同面)의 3개면으로 나뉘어천남북(川南北) 모두 6개 면으로개편되었다. .

 

18세기초엽인 조선 숙종37년(1711)「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의하면 당시 언양현북면(北面) 중 현 언양읍 북부지역에대곡(大谷)·고하(庫下 : 현반곡리지역)·다개(茶開 :현 평리지역포함)·기지(機池 : 현태기리와 직동리지역)의 4개 리로 나누어져있었다.

1777년(정조원년) 이전(즉 영조 때)부터위의 4개리가 모두중북면(中北面)관할구역이 되면서대곡리는옹태리(瓮台里)로, 기지리는직동리(直洞里)로 그이름이 바귀었다.

 

그 후 오랜기간 동안 직동리로불리었고, 조선 말기인고종 32년(1895) 6월 언양현이언양군(彦陽郡)으로승격되었을 때도 역시 중북면직동리였다가 한일합방직후인 1910년 10월 1일행정구역의 개편으로언양군 중북면 직동리가기지동(機池洞), 직동(直洞),남동(南洞)의 3개 동(洞)으로분동(分洞) 되었다. 그중기지동은 현 태기리본동인 < 틀못산 >지역이고직동과 남동은 후일 현재의직동리로 통합되었다. 이때 중북면사무소는직동리 513번지(당시 南洞,현 신화리)에 있었다.

 

당시의직동은 현재 신흥리의새마을·욋골(瓦谷)·고등골·새각단(수문솔배기)지역이고, 남동은 현재신흥리의감천·돈밖곡·동 사마을과신화리의 새터(新基)관정(觀亭)·정거리지역이었다.말하자면 언양↔경주간제35호 국도를 경계로 하여동쪽을 직동 (直洞),서쪽을 남동(南洞)이라 한것이다. 따라서 한일합방직후인 1910년 10월 이전의종래의 직동리와 현재의직동리는 이름은 같지만 그범위면에서는반분(半分)된 지역이다.

 

"직동(直洞)"이란이름은 영조(18세기 중엽)이후부터 계속 사용하여왔으니 조선 초기부터사용된 다개리(茶開里)다음으로 가장오랜 장수를 누린지명이다.

그후 1914년 3월1일 지방행정구역의개편(面里관할구역조정)으로 종래 언양군상북면(上北面 : 현 언양읍송대리 이남지역)과 중북면(中北面 : 현언양읍 직동리이북지역)을 합쳐언양면(彦陽面)이 될 때태동(台洞 : 윗옹태마을)에기지동(機池洞)의일부 (틀못산지역)를합쳐 태기리(台機里)가되고, 직동(直洞)과남동(南洞)에 태기리의일부(남은 지역)를 합쳐직동리(直洞里)로 개편된 것이오늘날법정리(法定里)로서의기초가 된 것이다. 이 때언양군이 울산군에병합되어 울산군 언양면직동리가 되었다.

 

1945년 8월광복과 1948년 8월의 건국,1950년 6월의 한국전쟁을거쳐 제1공화국 말기인1958년 6월 (법정)직동리는신화리 (新華里)와신흥리(新興里)의 2개의행정리로 분동(分洞)된 후오늘에 이르기까지 각각이장(里長)을 두고 있다.

 

분동시의경계는 동부리에서감천(坎川)을 경계로직동들판으로 올라가송대리 능골(陵谷) 입구의돌배기 부근에서동쪽으로 난농로를 따라동사(洞舍)마을 뒤쪽을가로지르면 국도제35호선을 만난다. 여기서북쪽(반곡쪽)으로올라가다 다시 동북으로 태기리로들어가는 길을 경계로한다. 이 선의 동남쪽을신흥리(新興里), 서북쪽을신화리(新華里)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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