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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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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리

법정리

  • 남창리

행정리

  • 남창1리, 남창2리

마을연혁

  • 정조(正祖, 1777∼1800)때는 창동리(倉洞里)와 창서리(倉西里)라 함.
  • 고종(高宗) 31년(1894)에는 온북면(溫北面)의 공동동(公東洞)과 온남면(溫南面)의 공서동(公西洞)으로 갈라져 있었음.
  • 1911년 공동동(公東洞)을 공동(公洞)이라 고침.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공동, 공서, 귀지 일부를 합하여 남창리(南倉里)라 함.
  • 1991년 남창1리, 남창2리로 나누어짐.

공동(公東)과공서(公西) 남창리(南倉里)를 동서로 갈라 동쪽을 공동(公東)이라 부르다가1911년에는 공동(公洞)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서쪽은 공서(公西)라 하였다. 여기에 공(公)자가 붙는 것은 울산의 남부지방에 공수현(公須縣)을 두어 남창리(南倉里)에 그치소(治所)를 두어 남창리(南倉里)를 현시(縣市)라 한데서 유래한다. 『울산읍지』는 신라 때에 이곳에 공수현(公須縣)을 두었다하고 1936년의 『온양면면세일반(溫陽面面勢一班)』은 고려 때에 공수현(公須縣)을 둔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남창중수기문」을 보면 조선 숙종 5년(1679)에 공수현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울산군 역원(驛院)조에 나타나는 공수곶원(公須串院)이망양리(望陽里)의 원골(院谷)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볼 때, 온양면 일대를 무슨 형태로든지 공수(公須)라고 불렀을 것이다. 남면(南面)은 온양(溫陽), 온산(溫山), 서생(西生)을 다관할하였던 면이었다.
사환미 창고대들보에서 나온「남창중수기문」을 보면 남창은 옛 고을이었다. 고노(考老)들이 전하는 바 공수현이다.
이 고을은지방행정본부와의 거리가 멀어 백성들이 곡식을 본부에 수송하기가 힘들어 이곳에 창고를 설치하였다. 창고 감독이사는 집을 창고 몇 걸음 되는 곳에 설치, 숙박하는 객사로 정했다.

"이 청사를 처음 설치한 것은1679년이며, 그 뒤 1685년8월에 부사 노준명이 옛것에 의해 중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선숙종 5년(1679)에 남창에 공수현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그 당시 고령 김씨공수파가 남창에 집단으로 거주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창고관리 및 업에 종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남창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 지금까지도 읍의 소재지 마을로 400여 세대에 인구 1,600여명이 살고 있다.
온양읍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남창역과초등학교 등 각 기관이 위치해 교통과 상업의중심 역할을 하였고, 주민대다수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1970년 3월 이전에는 금융조합(지금의 온양농협협동조합자리)도 있었다.
이후 1991년 9월 군의회의승인을 받아 남창을 1리, 2리로 분동하여 같은 해10월부터 2명의 이장이마을일을 보고 있다.

동상리

법정리

  • 동상리

행정리

  • 상서, 하서

마을연혁

  • 정조(正祖)때 상서포리(上西浦里)와 하서포리(下西浦里)라 불렀음.
  • 고종(高宗)31년(1894)에 동평(東坪), 상서(上西), 하서(下西),서호(西湖)의 네 동으로 갈라졌음.
  •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동평의 동(東)자와 상서의 상(上)자를 따서 동상리(東上里)라 하였음.
  • 1933년에 상서, 하서로 나누어 짐.

상서마을

동상리를 총칭하여일명 서포(西浦)라고도한다. 상서(上西)는 서포의윗쪽 마을을 의미한다.

중서마을

상서(上西)의 동쪽에있는 마을로 1911년 이래중서라 불러 왔다.서포(西浦)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므로중서(中西)라 부른다.

하서마을

상서의 동쪽에 있는마을을 총칭하여하서(下西)라고 한다.동상리에는 중서(中西),서호(西湖), 하서(下西)의자연마을이 있으며,자연마을로서의 하서는동상리의 맨 동쪽에위치한다. 서포의 아래쪽에 있으므로 하서(下西)라한다.

망양리

 

법정리

  • 망양리
 

행정리

  • 망양1리, 망양2리, 망양3리, 망양4리, 망양5리 
 

마을연혁

  • 숙종(肅宗) 46년(1720)과영조(英祖) 41년(1765)에는 청량면에 속한 소들리(所等里)라 하던 마을이었음.
  • 정조(正祖)때에 온양면으로 옮겨서도 역시 소들리라 하였음.
  • 고종31년(1894)에는 산양동(山陽洞)과 망화동(望化洞)으로 갈라짐.
  •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망양리라 함.
  • 1970년에 망양, 원동으로 나누어 짐.
  • 2001년 1월 1일에 망양, 원동1리,원동2리로 나누어 짐.
  • 2007년 2월 8일에 망양1리, 망양2리, 망양3리로 변경 됨.
  • 2014년 12월 26일에 망양1리, 망양2리, 망양3리, 망양4리로 변경 됨.
  • 2019년 1월 31일에 망양5리가 신설됨.
 

망양리(望陽里)

망양(望陽)이라 함은 망화(望化)의 '望'과 산양(山陽)의 '陽'을 서로 따서 만든 이름이다. 망화리(望化里)에는 망양(望陽)과 사양(沙陽)의 두 행정마을이 있다. 소등리(所等里)는 산양리와 망양동인데 1777년 이전에는 청량면에 속했다가 1777년 정조 때부터 온양면으로 이속되었다.

 

고산리

법정리

  • 고산리

행정리

  • 내고산(內高山), 중고산(中高山), 외고산(外高山)

마을연혁

  • 정조(正祖)때부터 고산리(高山里)라 하였는데
  • 고종(高宗)31년(1894) 고사동(古沙洞)이라 함.
  • 1911년 고사동(古沙洞)과 고산동(高山洞)으로 갈라짐.
  • 1914년 고산리라 함.
  • 1933년 내고산,중고산, 외고산으로 나누어 짐.

내고산(內高山)

고산리의 안쪽에있는 마을을 안고산 또는내고산이라 한다.고종(高宗) 31년(1894) 이후부터 곳마을(古沙洞)이라하였다.

중고산(中高山)

중고산은 고산의 가운데 마을이라 하여 부르는 지명으로 중마을이라고도 한다. 1911년에는 고산(高山)이라 하였다. 중고산 393번지 일대는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관청이 있었다 한다. 어떤 관청인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1990년께 한 주민이 이 자리에 과수원을 조성하던 중 많은 기와조각을 발견했다. 또 부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 재(災)가 많이 나왔다. 관청 100m지점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봉화대자리에는 돌단을 쌓은 흔적이 있을 뿐 아니라 돌이 불에 그을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불매골(현재 외고산)

불매골은 외고산(外高山)의 주된 마을로 옛날 벌목할 때에 불매를 차려놓고 도구를 달구어 다시 만들었던 곳이다. 지금은 옹기를 반조(返照)하는 옹기점을 이루고 있다. 불매골의 '불'은 신명내지 광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매'는 산을 뜻한다. 볼매골은 곧 '명산곡(明山谷)·백산곡(白山谷)'의 뜻을 가진 것이다. 인근의 지명에도 계(白系)의 지명은 없지 않다. 불광산(佛光山, 즉 大雲山), 발리(鉢里), 화천령(火鐵嶺), 비옥산(飛玉山) 등은 모두 신명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고사동(古沙洞)의 '사(沙)'도 'ㅅ'으로 발음되어 받침격이 된 것이다. 이 '곳'의 음차(音借)가 '고사(古沙)'가 되어 '고산(古山또는高山)'으로 변한 것이 오늘의 고산리(高山里)이다. 꽃장산의 이름도 이'곳'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광리

법정리

  • 삼광리

행정리

  • 신기(新基)와 중광(中光)

마을연혁

  • 삼광리(三光里)는 정조(正祖) 때 중광리(中光里)라 하던 마을이나 고종(高宗)31년(1894)에 중광동(中光洞), 신지동(新只洞)의 두동으로 갈라졌다.
  •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중광동과 신지동의 전부와 외광동(外光洞)과 귀지동(貴旨洞)의 일부를 합쳐서 삼광리(三光里)라 하였다.
  • 1933년 중광, 신기로 나누어짐. 풍수지리설에 이 마을에 3가지 빛이 있었다 해서 삼광(三光)이라 이름지었다는 설이 있다.광(光)은 불광산(佛光山)에서 연유된 광청골(光淸谷)의 광(光)에서 따온 듯하다. 그러므로 광청골의 세 마을이 형성된 법정리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보인다.

신기마을

고종(高宗) 31년(1894)이후부터 신지(新只)라 불려 왔으나 지금은신기(新基)라 한다. 지(只)는 지(支), 자(者),자(自)와 같이 본래 산(山)의 뜻을 가진 것으로 울산지방에서는 기(基)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농동면(農東面)의 신지(新只)가 신기(新基,新泉里)로, 온산읍의 신지(新只)가 신기(新基,온산읍 처용리)로 변한 것이 그 예이다. 신기란 마을의 이름은'새 마을'을 뜻한다. 하방(下坊), 막대골, 귀지(貴旨), 신촌(新村) 등의 자연마을이 따로 있다.

중광마을

정조 때와 고종(高宗)31년(1894)부터 중광이라 불러온 마을이다. 광청골(光淸谷)의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광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구암(九岩)이란 자연마을이 따로 있다. 지금부터 약 450년 전에는 김해 김씨가 거주했다고 한다. 마을 뒷산고묘(古墓)가 김해 김씨의 선조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온양, 웅촌, 청량 세 개면의 측량 기점이 중광마을 뒷산이다.

내광리

 

법정리

  • 내광리
 

행정리

  • 내광리
 

마을연혁

  • 내광(內光)이란 광청골(光淸谷)의 안쪽부분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
  • 정조(正祖)때 내광리(內光里)라 함.
  • 고종(高宗) 31년(1894)에 중광동(中光洞)에 소속되었음.
  • 1911년에는 내광으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마을임.
 

지금부터 400여년전 내광리에는 순흥 안씨, 경주 김씨가 대대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 당시 통수(洞守, 현재의 이장는 순흥 안씨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쇠붙이, 사기그릇, 생활자기 등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했다. 현재 대운산 85-2번지인 안고막곡(谷)에 서당을 차렸으며 그 후 마을 앞의 과남정에 서당을 옮겨지었다 한다. 그때 훈장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서당의 이름은 서재곡서당이었다. 이곳에 묘곡(墓谷)이 있는데 안동수곡(谷)이라고 불린다.

 

외광리

법정리

  • 외광리

행정리

  • 외광, 귀지

마을연혁

  • 외광리(外光里)란 지명은 광청골(光淸谷)의 바깥부분에 위치한 데서 유래
  • 정조(正祖)때와 고종(高宗) 31년(1894)에 외광(外光),귀지(貴旨)의 두 마을로 갈라져 있었음.
  •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외광(外光)의 일부와 아래 귀지(貴旨)를 합하여 외광리라 함.
  • 1982년 당시 이장이었던 이우환이 청와대와 총무처, 경상남도와 울주군 등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해 외광과 귀지로 나누었음.

외광마을

을외광에는 평광(平光), 새각단, 교동(校洞),주막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귀지마을

옛날 이곳에 귀한부자가 살았다 해서 귀지라고 한다. 이 마을은 정조(正祖)때부터 일관되게 귀지(貴旨)라고 불려졌다. 옛 지명 상에 나타나는 지(旨)는 지(址)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귀지를 아랫귀지 또는 윗귀지라고 한다. 정조(正祖) 때와 고종(高宗)31년(1894)에 귀지라 하였다가 1911년에는 한때 귀상(歸上)이라고도 불렀으나, 지금은 귀지(貴旨)라 한다.

귀지마을은 동제를 지냈다.
동제는 부정이 없는 집의 사람이 모셨으며, 삼 개월 동안 부정이 있는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는 풍습이있었다. 1958년 동제를 모시는 날이었던 음력 1월15일 이 마을 가옥 11호가 불에 타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당시 주민들은 동제를 잘 못 모셔 화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동제를 모시는 집의 이웃 할머니가 이집에 달걀을 가져다 주었는데 마침 그날 아침이 집 소가 새끼를 낳았다. 이 달걀을 동제에 사용하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마을에 큰 화를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할머니 집도 불에 타버렸으며, 큰 방 천정에 숨겨놓은 돈을 찾아나오던 할머니는 집이 무너져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운화리

법정리

  • 운화리

행정리

  • 상대, 하대, 태화1, 태화2, 태화3, 태화4

마을연혁

  • 정조(正祖) 때와 고종(高宗)31년(1894)에는 대운동(大云洞)이라는 단일마을.
  • 1911년에 대운동(大雲洞)과 태화동(太和洞)으로 분동.
  •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두 동을 합하여 운화리라 함.
  • 1933년에 상대, 하대, 태화로 나누어 짐.
  • 1993년에 상대, 하대, 태화1, 태화2리로 나누어 짐.
  • 1995년에 상대, 하대, 태화1리, 태화2리. 태화3리로 나누어 짐.
  • 2004년 8월 5일 리ㆍ반조정으로 태화3리가 태화1리에 편입됨.
  • 2007년 2월 8일 리ㆍ반조정으로 태화1리가 다시 태화리, 태화3리로 분리됨.

지리적형태

구절봉산(九節峯山)에 운중반월형(雲中半月形)이며,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다. 운화(雲化)란 지명은 대운(大雲)의 운(雲)과 태화(台化)의 화(化)를 서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상대(上大)마을

대운(大雲)의 윗쪽 마을이라 하여 상대라한다. 상대에서 내원암으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대원사지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절터에는4기의 석조부도가 있었다.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 원당형 부도 1기, 기타 형태의 부도1기 였으며, 이 가운데 한부도에는 '현하당(縣河堂)'이라 음각 되어 있어 묘주를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1998년 모두 도난당했으며 그중 일부 부도는 찾아서 지금 내원암에 보관하고 있다. 대원사가 있던 절터는 절터골이라 부른다.

하대(下大)마을

대운(大雲)의 아래쪽 마을이라 하여 하대라고 한다. 하대는 다시 양달진쪽에 위치한 양달(陽達)마을, 음지에 자리잡은 음달(陰達)마을 등 두 자연마을로 형성되어져 있다.

태화(台化)마을

태화1리, 2리, 3리의 행정리로 나누어져 있다. 1911년에는 태화(太和)라 했으며, 1914년에 태화(台化)라 불렀다. 산 아래 높은 곳의 지명에는 대(大), 대(垈), 태(台)가 붙으며 화(化)는산이 바다나 평야로 늘어져 내려 돌출한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태화(台化)는 산이 튀어내린 높은 곳의 마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안리

 

법정리

  • 대안리
 

행정리

  • 대안1리, 대안2리, 대안3리, 대안4리, 대안5리, 연안1리, 연안2리, 연안3리, 연안4리, 연안5리, 솔밭1리, 솔밭2리, 솔밭3리,솔밭4리, 보곡리
 

마을연혁

  • 1994년 대안, 연안, 솔밭으로 나누어 짐
  • 1995년 대안1리, 대안2리,대안3리, 연안1리, 연안2리,연안3리, 솔밭리로 나누어 짐.
  • 2001년 1월 1일에 대안1리, 대안2, 대안3리,연안1리, 연안2리, 연안3리, 솔밭1리, 솔밭2리로 나누어 짐.
  • 2004년 8월 5일에 대안1리가 대안1리와 솔밭3리로 나누어 짐.
  • 2009년 12월 24일 리ㆍ반조정으로 대안2리가 대안2리와 대안4리로 나누어 짐.
  • 2017년 12월 21일에 연안1리가 연안1리와 연안5리로 나누어 지고, 솔밭5리가 보곡리로 명칭이 변경됨.
  • 2019년 1월 31일에 대안5리가 신설됨.
     
 

대안리

조선시대 정조(正祖) 때는 사안(四安), 고종(高宗)때는 사안(士安)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를 대안리라 하였다. 이후 대안리는 동해남부선 철길을 중심으로 대안택지구획정리사업1·2지구로 나누어아파트단지 및 그린생활 시설이 대폭늘어나 세대 및 인구가 급증했다. 2004년 9월 30일 현재 대안리 법정구역내 9개 마을의 인구는 3,824세대에 13,039명으로 온양읍 전체인구의 약 58%를 차지하고 있다.

 

발리

 

법정리

  • 발리
 

행정리

  • 상발1, 상발2, 상발3, 하발, 진동
 

마을연혁

  • 발리(鉢里)는 정조(正祖)때 단일마을 이었음
  • 고종(高宗) 31년(1894)에 발리와 진동(進洞)으로 갈라짐
  • 1911년에 진동은 장동(長洞)으로 고침.
  •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발리라 함.
  • 1933년에 상발, 하발, 진동으로 나누어 짐.
  • 2017년 12월 21일에 상발1리가 상발1리와 상발3리로 나누어 짐.
 

조선시대 초기 발리에는 월성 이씨가 집단적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문다리(12대문)가 있을 만큼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관리들이 이 집을 관청으로 착각할 정도로 웅장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에는 '사자고산(死者高山),생자발방(生者鉢坊)'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죽은 사람은 묘지터가 좋은 고산리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발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뜻이다. 논과 밭이 흔하고 기름지며, 또한 지하수가 풍부하여 가뭄의 영향을 적게 받을 뿐 아니라 강이 인접해 있고, 산야의 면적이 넓어 임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까닭이다.

 

발방(鉢坊)의 방(坊)이란 마을이란 뜻이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방방곡곡이라 할 때의 방이 바로 이 방(坊)이다. 발리란 지명(地名)은 조선 성종(成宗) 때의 스님이었던 일선(一禪)이 탑골산의 절에 있다가 이곳을 떠날 때 바랑을 앞산에 묻고 갔다하여 붙혀졌다고 한다.

 

상발(上鉢),하발(下鉢)

발리는 바리방(鉢里坊) 또는 발방(鉢坊)이라고도 한다.‘坊’은 조선시대 행정하부 조직인 ‘坊’, ‘社’와 같은 것으로, 마을을 뜻한다.발방(鉢坊)을 동서로 갈라서 서쪽을 상발(上鉢),동쪽을 하발(下鉢)이라 부른다. 하발에는 자연마을 선량골(善良谷)이 있다.

 

진동(進洞)

발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종(高宗)31년(1894)에는 진동, 1911년에는 장동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다시 진동이라한다. 골짜기가 길(永)다고 해서 진동이라 한다.진(進)은 길다를 의미하는 '진'의 음차(音叉)이다.

진동(進洞)은 원래 긴골짜기라는 뜻으로 마을이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지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게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집안의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난(亂)을 피했다고 하니,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특히 고대때부터 마을이형성되었던 발리와는매우 가까운 거리이고,경작지가 있고, 물이좋아 사람이 사는데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어 그 역사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수도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진동마을은 처음에는 웃마을과 아랫마을 두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웃마을은 점차 쇠락하여 없어지고, 아랫마을이 남아 오늘의 진동마을이 되었다.

진동은 발리에 속하나 발리는 법정리이고 진동은 행정리이기 때문에 이장(里長)을 두고 독자적으로 마을운영을 해오고 있다. 향우회가 결성되어 있어서 해마다 봄에는 이곳 출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합대회행사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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