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읍

사람이 희망인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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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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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정(聖人井)

온양읍은 옛날불교가 크게 성하여 4사(寺) 9암(庵)이 있었다. 남창 뒤의 안태봉(安胎峯)에 천안사(天安寺), 덕신리의 영남사(嶺南寺), 고산리의 안봉사(安峰寺), 삼광리의 신흥사(新興寺)와 옥련암(玉蓮庵), 대운산의 불광사(佛光寺)와안심사(安心寺), 발리에는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큰절이 있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불광산의 대원사와 대운산의 내원암(內院庵)이 실려 있어 그 이름이 알려져 왔다. 이 가운데 발리의 탑골산(塔谷山)에 있었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절에는 구층석탑(九層石塔)이 있었으며, 이 절에는 조선조 초기의 명승일선(一禪)스님이 수도했다고 한다.

또 온양읍 하발리(下鉢里)에는 일선(一禪)이 판 것으로 전해지는 옥련정(玉蓮井)이란 우물이 있다. 옥련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일선 스님이 엄숙한 표정으로 옥련정(玉蓮井)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푸더니 북을 향하여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일선은 비범한 사람으로 인근에서는 늘 우러러보는 터라 누구도 감히 그 까닭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 해인사(海印寺)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선스님이 정수를 뿌리던 그 시각에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장판각에 불이 나서 큰소동이 일어나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야단들이었다. 이때 동남쪽에서 검은 먹구름이 떠오르더니 별안간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 소나기로 불은 꺼지고 팔만대장경은 안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이는 일선스님이 신통력을 부려 그렇게 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 후부터 이 옥련정을 성인정(聖人井)이라고도 불렀다.

대원사(大原寺)의 빈대

온양읍 운화리 상대(上大)마을의 절터골에는 옛날 대원사라 하는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은『동국여지승람』에 남목(南牧)의 열암사(裂菴寺), 연암의 백연암(白蓮庵), 웅촌의 운흥사(雲興寺), 율리의 망해사(望海寺)와 청송사(靑松寺), 언양의 연고사(連高寺),삼남(三南)의 석수사(石水寺)와 같이 등재 되었던 이름 난 절이었다.

그러나 대원사는 정조(正祖) 10년(1786)에 폐사되고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 있다.
대원사의 내력은 절터에 남아있던 현하당(縣河堂)이라 음각된 부도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이 부도에 새겨진 이름을 보아 현하당이란 스님이 대원사(大原寺)에 계셨던 것만 알 뿐 아무것도 남긴 사적(寺蹟)은 없다. 그러나 이 절이 망하게 된 사연에는 사람의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오를 정도로 크고 이름난 절이었으니 신도들이 많이 찾아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절에는 괴이한 주지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아드는 것을 몹시 귀찮게 생각하여 왔다. 수도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의 불국사(佛國寺)처럼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관광 하는 것을 싫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한 도사가 절을 찾아와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주지의 입에서 사람들이 하도 많이 와 귀찮으니 사람들이 적게 오게 할 수없을까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 말을 듣게된 도사는 "그런 일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 그리 근심치 않아도 될 일이 올시다"하였다. "마을로 내려가는 산모퉁이에 큰길을 내게 되면 소원대로 될 것이요" 하고 그 도사는 절을 떠나 버렸다.

도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 주지는 산모퉁이를 헐어 길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작업 중에 석불 한 구가 솟아 나왔는데 이 부처는 그만 삽과 괭이에 찍혀 목이 떨어지고 떨어진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의 일이었다.

절에는 갑작스럽게 빈대가 들끓었다. 많은 빈대 속에서 사람들은 견디어 낼 수가 없어 쓰레받기에 쓸어 담아 웅덩이에 버렸는데 이곳을 빈대소라고 한다. 지금도 절터의 바위를 뒤져보면 빈대의 껍질이 나올 정도라고 이곳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다.

도통골(道通谷)과 용심지(龍深池)

 

온양읍 운화리의 대운산 밑에는 상대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서쪽의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통골에 이르게 된다. 이 도통골의 용심지(龍深池)는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한 주변에 있는 샘이다.

 

원효대사는 장안면(長安面) 장안사(長安寺)의 말사인 척판암(擲板庵)에 있으면서'해동원효(海東元曉)'라고 새긴 판자를 날려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법운사(法雲寺)에서 불공하던 천명의 죄 없는 신도를 구했다. 이를 세상사람들이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救衆)'이라고 한다.

 

때는 이 무렵이었다. 장안면의 척판암(擲板庵)에서 도통골은 불과 8㎞ 미만의 거리에 있고 그 계곡의 수려함도 뛰어났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지어 제자를 거느리고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원효대사가 제자 한사람을 부르더니 체를 주면서 그것으로 물을 떠 오라고 했다. 체를 받은 제자는 한동안 머뭇거렸으나 대사의 하는 일이라 그대로 가서 용심지(龍深池)의 물을 떠보고자 했다.

그러나 체에 물이 담길리가 없었다. 물이 주루루 빠지고 말았다. 제자는 다시 체를 물 속에 담구어 들어보니 이상하게도 체에 물이 담기는 것이었다. 제자는 놀라는 한편 행여나 잘못하여 물이 빠져 흐르면 어찌할까 조심조심하며 공손히 대사에게 바치고 난 뒤에 자기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어 쉬었다.
체를 받아든 대사는 북쪽을 향하여 무슨 주문을 외우며 물을 뿌리니 하늘에는 오색구름이 일어나서 북쪽 하늘로 흘러갔다.

 

그런데 이 때 월성(月城)의 불국사(佛國寺)에서는 불이 일어났다. 대웅전(大雄殿)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남쪽하늘에서 오색의 구름이 날라오더니 한바탕 비를 퍼부어 대고 그만 불이 꺼지고 말았다 한다.

 

그 뒤로 사람들은 원효대사가 살던 이골짜기를 도통골(道通谷)이라 불렀다. 대사는 이 무렵 장안사도 통골(장안사에서 약 8㎞지점)에 암자를 지어 수도하였다 한다.

 

이곳 주변에는 뭉텅한 옛날 기와(蓋瓦)조각이 뒹굴고 있으며 3년 전에는 돌절구통이 있었다. 또 천년 전 사용하던 온돌방 구조물(구들) 형태가 남아있다. 이 구들은 신라시대 온돌방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이나 훼손상태가 심각하다.

 

아기장수 바위와 용방소(龍坊沼)

조선 정조 때서호(西湖) 이씨 집안(家)에 사내아이가 탄생했는데, 그 아이가 비범하여 부모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삼칠(21일)이 지난 후 이웃 방앗간에 곡식을 찧어 집으로 돌아와서 아기방문을 열어보니 방안에 운무같은 먼지가 자욱하고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 살펴보니 아기가 천정(天井)에 붙었다가 방바닥에 내려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가족들이 그 형상을 보고 경악하였다.

조선시대는 미천한 집에서 큰 장수 같은 자식이 태어나면 사전에 거세하지 않으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니, 가족들이 의논하여 아기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은 산 앞돌팀에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밧줄로 장수바위를 들고 생매장하였다.

그후 어머니는 아기를 잊지 못해 날로 슬퍼하며 매장소(埋場所)에 가니 큰바위가 사흘까지 흔들거렸다고 한다. 아기장수가 죽은 뒤용마가 나와 집의 앞뒤로 울며 배회하다가 끝내는 아기장수가 나타나지 않아 슬피 울며 뒷산 너머큰 소(沼)에 가서 빠져 죽었다 한다.

그 소를 용마소(龍馬沼)로 불러오다가 지금은 용방소(龍坊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선돌석(先突石)

온양읍 동상리 중서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돌인데 옛날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온다.

선돌석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돌이다. 이 돌에는 '남근(男根)'이있는데 치성(致誠)을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많은 여인과 무속들이 와서 사전에 금주를 치고 지극 정성을 올리면 자식을 낳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다. 중서마을 주민들은 '절받는 선돌석이 복석'이라고 생각해 보호하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제당(祭堂)이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15일 동제를 지낸다. 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공을 드리고 있다.

고령 김씨 장군터와 물난리

조선 21대 영조 18년 임술년(壬戌年, 1742) 7월 23일 온양읍 남창리 현온양초등학교 자리에 고령김씨 공수파(公須派)가 집단적으로 살고 있었는데, 홍수로 물죽음당한 날이다.

대운산 기슭(굴바우 뒤)장군터에 고령김씨 선령 산소가 있었다. 당시 문중원로 몇 명이 경북에 사는 앉은뱅이 지관을 불러 그 산소를 보이니 지관이"이 산소를 보니 후손들이큰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문중의 어른들은 지관의 말을 듣고 화가나서 지관(앉은뱅이)을 산에 버리고 하산했다. 일설에는 당시 운화리에 살고 있던 학성이씨가 이 지관을 업고 웅촌면 돌내까지 모셔다 주었다고 한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이 지관은 이곳에 학성이씨의 터전을 잡아주고, "자손 대대로 벼슬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글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고령 김씨가 집단으로 사는 지금의 온양초등학교 자리 마을에 어느 날 쥐가 전부 산으로 올라가므로 스님 한 분이 나타나 홍수가 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또 어떤 과객이 지나가면서 남창천에 서있는 저 버드나무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예언했다.

이후 큰 비가 와서 당시 하천가에 생활하고 있었던 고령 김씨들은 물을 피하기 위해 버드나무 위로 올라가서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비가 계속되고 대운산 못의 둑이 붕괴되어 버드나무가 뿌리 채로 뽑혀 떠내려 갔으므로 버드나무에 올라 물난리를 피하려고 한 고령 김씨의 많은 사람들은 화를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령 김씨 종손은 서당에 글을 배우러 갔기 때문에 이 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하며, 또 어떤구전은 외가에 다니러 갔기 때문에 이 물난리를 피했다고 한다.

대문다리

온양읍 발리(상발)울산온천 앞에 있다. 이곳에 월성 이씨(고래마을이씨)가 집단으로 거주한 것으로 전해지고있으며 조상의 산소가 발리 황새 등에 있다.

월성 이씨 후손들에 따르면 발리에 있는 묘소는 윗대 조상의 산소라고 한다. 이 산소의 묘답은 1,500평 가령 되며 매년 묘제를 지내고 있다.

집단으로 거주한 월성이씨 종가는 대문이 12개나 되었다 하니 과히 어느 정도의 부자였던가를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정부의 관찰사가 지방으로 내려오면 이곳이 관가로 착각할 정도로 웅장한 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을 울산고을이라고 착각한 사람도 있었다한다.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귀찮아서 고심하고 있던 중 어떤 과객에게 손님이 적게 찾아오게 하는 방법을 물어 보았다. 그 과객의 말이 "저앞(발리마을 앞 들판)에 조그마한 고동산의 (현재 그 산이 길 옆에 있음) 끝을 날려버리면(산의 모양이 논고동과 같이생겼으므로 그 고동의 끝을 없애면 안에 고동알이 죽어버리는 이치) 손님이 적게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객의 말에 따라 고동산의 끝을 날려버렸더니 손님은 끊어지고 그 화려하게 살던 대문다리 집들은 망해버렸다고 한다. 이는 옛말에 손님이 많이 찾아오면 그 집안이 왕성하고 집안에 손님이 끊어지면 망한다는 말의 이치와도 비슷하다.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진동 무룡골 산118-2중턱 숲 속에는 조그만 바위 하나가 숨어 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고 꼭대기가 펑퍼짐한 아담한 바위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처녀바위라고 불러오고 있다. 또 이웃마을인 선양골못 동쪽 산 숲 속에 촛대처럼 뾰족하게 생긴 남근형(男根形)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총각 바위라고 부른다.

이 총각바위와 짝을지어 음양(陰陽)의 조화를 만들어주기 위하여 이렇게 처녀 바위로 이름지은 것 같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통하여 풍요(豊饒)와 자손의 번성(繁盛)을 기원(祈願) 했다. 우리조상들은 선사시대로부터 기암괴석(奇巖怪石)이나 잘생긴 바위가 있으면 이를 기도처(祈禱處)로 삼아 풍요와 다산(多産),장수(長壽)와 건강(健康)을 기원해 왔다.

이렇듯 한국인에게 있어 '바위' 라는 말은 단순한 물질적 의미의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의 돌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부드럽고 따뜻한 애정과 종교적 심성이 베어 있는것이다.

두꺼비 바위

진동 마을 뒤편 산(발리 103-3) 정상에 있는 바위로 마치 두꺼비가 고개를 높이 세우고 마을 쪽을 향해 뛸 형상을 하고 있어서 두꺼비 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두꺼비 바위는 높이가약 4m, 몸 둘레 6m가 넘는 제법 큰 바위이다.

사람들은 예부터 두꺼비를 상서(祥瑞)로운 동물로 여겨 왔다.

우리민담(民談)에 나오는 두꺼비는 악을 물리쳐 사람을 구하고 마을을 지켜주는 용감하고 의협심(義俠心)이 강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듯 의(義)로운 두꺼비가 마을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이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念願)이 이 바위를 두꺼비로 형상화(形象化)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화장산(꼬장산)

신라시대 한 선비가 주색에 빠져 몸에 이상이 있어 고민 중 어느 날 꿈에 선인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남쪽 80리에 가서 약을 구하라는 말을 듣고 화장산에 와서 인진쑥과 산작약을 구하여 먹고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인진쑥은 조금 보이지만 산작약은 약초채취꾼에 의해 없어졌다. 정상에는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있다.

부엉이 바위

내고산에 지장암이 있었다는 절터 조금 후편에 바위절벽이 있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그 바위 위에 돌무더기(돌담)가 있었다. 속가마을에 부엉이라는 어린 처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삭발한 상좌에 반해 매일 부엉이 바위에 숨어서 보곤 하였다.

어느 날 상좌는 도행을 떠났다. 부엉이라는 처녀는 바위 위에서 상좌를 기다리다가 돌아오지 않자 상사병이 들어 죽어서 부엉이가 되었다. 이 지장암은 빈대가 끓어 절은 폐사가 되고, 지금은 돌담이있었던 흔적만 남아있다.

검은돌(흑장군)

외고산 입구 길목쉼터에 검은 타원형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바위에 구멍이 많아 동상리 나무꾼들이 이곳을 지나 다니면서 작대기로 구멍난 바위에다 장난을 하였다.

장난을 하고 난 후에는 동상리 처녀들이 바람이 나서 가출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970년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길을 확장할 때 타원형 바위를 굴삭기로 옮기다가 갈라졌다. 그 후 부터 마을에 두 어린이가 병이 나고 마을이 편하지 못하여 동민들이 의논하여 굿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3일간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두조각난 바위를 처음모양으로 붙이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더니 그 후부터 마을이 편안하고 피해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바위를 흑장군바위라고도 한다.

와천룡(臥千龍)

울산과 부산간의 국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와천룡이란 용(龍)이 천마리 누워 있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어떤 과객이 이곳을 다니며 "용두(龍頭)를 사겠느냐, 호두(虎頭)를 사겠느냐"라고 외치고 다녔다. 송정 박씨가 내가 사겠다며,용두(묘터)는 추어탕 한솥으로 사고 호두(묘터)는밥 한 솥으로 사서 그 음식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그 과객은 이곳에 묘를 쓸 때 하관은 시간에 관계없이 여자가 쇠 갓을 쓰고 오면 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송정 박씨는 그 과객의 말대로 어떤 여자가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을 보고 하관을 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이 산소는 송정박씨 윗대 산소이며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룡소(九龍沼)

중광리 마을 앞 하천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 용이 아홉 마리가 있었다고 하여 구룡소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는 마을의 개발로 인하여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다.

옥녀봉(玉女峰)

대안리 산39번지 일대를 말한다.

옥황상제(玉皇上帝)의 귀녀(貴女)인 옥녀(玉女)가 하늘에서 이 옥녀봉으로 내려와서 세수대야 형태인 하대곡지(下大谷池)에서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참빚등(산71-10번지) 얼개빚(산 68번지 대봉지입구)등에서 머리를 빗고 다시 이 옥녀봉으로 득천(得天)하였다 하여 이봉(峰)을 옥녀봉이라 한다.

이 옥녀봉 능선에는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였던 김일개(金一介), 김일덕(金一德, 부산시립충렬사 현충비에 기록되어 있음) 참봉 김일성의 선친인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김수(金洙, 수로왕 58세손)의 묘소가 있다.

남창장에 얽힌 전설

술이 몹시 취하면 남창장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웅촌면 고현리 근처에 양 사돈이 살았는데 각각 소를 몰고 남창장에 왔다.우연히 만나 소를 서로 교환하기로 결정한 두 사돈은 만족하여 취하도록 술을 마셨고, 밤늦게 서로 교환된 소를 타고 집으로 갔다.

소는 주인이 바뀐 줄도 모르고 자기 집으로 가는 바람에 밤늦게 두 사람 모두 사돈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하여 의식을 잃고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것이 '술만 취하면 남창장'이라는 유래가 되었다.

투구봉

240여 년 전 외고산 달성서씨 가문에 평산 신 씨 부인이 시집을 왔는데 이때 시아버님께서 병환중이였다. 신 씨 며느리는 시어른께서 돌아가시면 명당에 모셔야 되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정아버지가 별세했다. 친정가문에서는 화장산 기슭 투구봉에 묘를 쓰기 위해 천곽을 내고 다음날 장례준비를 했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사실을 알고 신 씨 부인은 저녁에 남모르게 천곽을 낸 곳에 물을 가득 채웠다. 친정에서는 그 곳에 묘를 쓰지 못하고 다른 곳에 장례를 마쳤다.

얼마 후 시아버지가 죽자 신 씨부인은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시댁이 친정보다 잘 되기를 바라는 신 씨 부인의 욕심에 의해 위와 같은 일이 있었다.

대운산의 굴바위 전설

대운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주봉의 높이는 742m나 된다.이 주봉 동쪽 650m의 석봉에 굴바위가 있다. 굴바위는 방굴(房窟)과 정지굴이 아래위로 짝을 이루고 있다. 방굴은 그넓이가 4∼5명이 들어가서 누워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면적을 가졌다. 방굴에서 가파른 석벽을 2m 가량 올라가면 부엌(정지굴)이 있다. 이 정지굴은 천정에서 사시사철 물방울이 맺혀 바닥으로 떨어진다.

1938년에 울산지방에는 큰 가뭄이 있었다. 못자리는 다 타버리고 마을에 있는 우물도 물이 말라 갈증이 심하였으며 대운산의 나무와 풀들이 타 죽어갔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정지굴의 물은 그런 가뭄을 모르는 듯'또닥또닥' 물이 떨어져서 바닥에는 맑은 물이고여 쪽박으로 떠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아득한 옛날에는 정지굴에 쌀(米)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굴속에는 아그래 할매가 살고 있었다. 그 할매는 여기에서 홀로 살면서 '뚜덕 뚜덕' 떨어지는 쌀을 먹고 살아 왔다.

아그래 할매는 대운산 인근인 웅촌의 원적산,청량의 영취산(靈鷲山),일광의 다암산(多岩山)등에서 산신이 찾아올 때는 양식의 궁색함을 매양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그래 할매는 꼬쟁이로 쑤셔 쌀이 흘러 나오는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나오던 쌀이 그만 어디론가 자취를 감취 버리고 대신 물이 나왔다. 이러한 일이 있는 뒤로 정지굴에서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굴바위의 전설은 상북(上北)가지산(加智山)의 쌀바위와 함께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을 깊이 경계하는 이야기라 볼 수있다.

선령파묘의 전설

약 200여년 전 온양읍 삼광리 신기(새말)에 파평윤씨(坡平尹氏)인 힘이 센 윤장사가 살았다. 선령(先靈)의 산소가 대운산 중턱 안검망 곡(谷)대(大)명당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윤장사는 "대운산 선령의 묘터가 아주 흉터이니 그대로 두면 가까운 시일 내에 가정에 큰 화(禍)가 올 것"이라는 어느 풍수의 거짓 꾀임에 속아 이장을 하게 되었다.

윤장군은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파던 중 천곽 땅속으로부터 안개 같은 김이 오르고, 묘 서쪽 아래에는 어느 누군가 그 자리에 묘를 쓸려고 상여가 올라오다가 대기중인 것을 보고 풍수에게 속았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이에 풍수를 죽이려고 하자 풍수는 도망을 쳤다. 도망치던 풍수는 외광리(현 삼광교회 옆) 속칭 옹판소(沼)에 오자 다급한 나머지 물에 빠져 윤장사와 같이 죽었다. 그 후 윤장사의 가정은 망했고 그 옹판소는 지금까지 그 형태로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시묘(侍墓)등에 관한 전설

대운산 학봉 기슭에 시묘등이라 불리우는 묘터가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효성이 지극한 상주는 3년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매일 밤 여산대우(범)가나타나 상주와 같이 밤이 되면 거기에서 자곤했다.

세월이 흘러 3년이 된 마지막 날 여산대우는 오지 않고 상주가 시묘등에서 혼자 잠을 잤다.상주는 삼남읍 가천 들래뻐든(들판)(지금도 작은들래 큰 들래가 있음)에 여산대우가 함틀에 갖혀있는 꿈을 꾸고 그길로 달려가 함틀에서 여산대우를 구해주었다. 여산대우는 그 상주를 등에 업고 시묘살이하던 대운산 시묘등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대목딸 호식(虎食)당한 전설

대운산에 100년 전에는 범이 살았다. 범을 보았다는 마을 주민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범에 관련된 전설도 있다. 마을의 한 아낙이 나물 캐러 대운산에 올랐다가 범이 새끼를 낳은 것을 보고 귀여워 어루만졌다. 어미범은 아낙이 자기새끼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위에서'으흥'하고 울었다.

아낙은 나물 바구니도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 다음날 어미범은 나물바구니를 그 집 앞까지갔다 놓았다고 한다. 지금부터 100년 전 온양 귀지 근처 마을 처녀들이 대운산 제일봉(내봉) 밑에 딸기를 따러 갔다. 딸기따는 한 처녀에게 범이 나타나 앞다리로 처녀를 놀리더니 덮쳐 처녀를 입에 물었다.

일행처녀가 급히 마을로 내려와서 이 사실을 처녀의 어머니에게 알리고 동민들이 햇불을 들고 쇠소리(징)을 치면서 사건장소로 갔다. 그러나 범은 여전히 이대목 딸(필이)를 가슴에 품고 입에 피를 묻히고 있는데 누구도 달려들지 못하였는데 필이의 아버지가 햇불로 가까이 가면서 범을 도망치게 하고 그 남은 시신은 동민들이 같이 운구하여 마을로 내려와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이대목딸 회채한 곳이라고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후 범은 여러날 마을 앞산까지 내려와 울었다고 한다. 또 마을에 연락한 처녀는 마을에 도착하여 정신이 없어 전후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엄마필이, 엄마필이를 되풀이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사실을 처녀어머니께 알려 동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행동을 같이 했다고 한다.

원효대사와 탑곡 척판암

온양읍 발리 탑곡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큰 절이있었다.(고성 일선(一禪)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절에 원효대사가도를 닦고 있었는데, 하루는 대사가 기거하는 방에 여인이 나타나 아기를 순산해야하니 방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방이 한 칸 뿐이니 방 가운데칸을 막아 사용하라고 했더니 여인은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대사는 불심이 약하여 이와 같이 헛것을 본 것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오랫동안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장안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가는 도중 목이 말라 주위를 살펴보니 여인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므로 여인에게 물을 청하니 구정물을 대사에게 주었다. 그런데 대사께서 그 물을 받기도 전에 여인은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길을 걸어가다가 또 목이 말라 주위를 살펴보니 앞에 본 여인이 또 빨래를 하고있어 물을 청하니 양잿물을 주기에 받지 아니하니 여인은 전과같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대사는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를 드리고 길을 재촉하며 걸어가다가 또 목이 말라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 전에 본 여인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에 대사는 물을 청하니 그 여인이 여자 월경이 묻은 생리대를 세척한 뒷물을 주기에 대사가 받지 아니하니 여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사는 위의 세 가지일들을 생각하고 내가 불심이 약하여 이와 같이 생각지도 않는 헛것이 보인다고 느껴 목마름을 참고 걸음을 재촉하여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척판암으로 가는 길목에 뒤는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은 절벽인데 그 사이에 대사 혼자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이곳은 눕지도 못하고 다리를 펴지도 못하며 기댈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대사는 그 곳에서 자리를 잡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올리고 도를 닦았다. 이윽고 오랜 세월이 지나 대사는 도를 터득하였다.

원효대사(617∼686)는 신라후기의 스님으로서 대중교화의 선구자이며 이름은 설서당(薛誓幢)이며, 임피공(仍皮公)의 손자로 나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고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17년 (진평왕39)압량군(押梁郡)(경북 경산군 자인면)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648년 32세에 황룡사로 출가하고 집을 불문에 희사했으며 자기가 태어난 자리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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