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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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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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리

서사리(西砂里)는 정조(正祖) 때 외사량리(外砂良里)와 내사량리(內砂良里)로 갈라졌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다시 사량(砂良), 신안(新安), 내사(內砂), 신리(新里) 등의 4개 마을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들 4개 마을을 다시 합하여 서사리(西砂里)라 하였다.

이때에 신안동(新安洞)의 일부는 다운동(茶雲洞)에, 사량동(砂良洞)의 일부는 척과리(尺果里)에, 내사리(內砂里)의 일부는 중리(中里)에 이속하고, 길촌동(吉村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지금의 서사리(西砂里)가 되었으며, 현재 서사리는 내사(內砂)와 외사(外砂)의 두 행정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내사(內砂) 마을

내사는 옛 내사와 신리(新里)를 합한 것이며, 범서읍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고 울산광역시 다운동과 인접해 있다. 마을의 뒤로는 국수봉(國秀峰)과 옥녀봉(玉女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척과천(尺果川)이 흐르는 산세가 아름답고 아늑하며 환경이 아주 깨끗하다. 자연 마을로는 우리골(于里谷), 고장등(古倉洞), 재앙골(齋內谷), 문고개 등이 있으며, 현재 60여 호가 살는 가운데 성씨별로는 창원황씨(昌原黃氏)들이 10여호에 이르는 가운데 그 외 여러 성씨들로 고루 구성되어 있다.

마을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에 속해 있어 개발이 미비하나, 도심과 거리가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자연환경이나 마을의 경관이 예전에 비해 그다지 변화가 없다. 근래에 건축이 다소 완화되자 나대지를 이용한 신주택이 몇 채 들어 서 유입인구가 조금 늘어난 편이며, 마을 앞과 뒤로 2개의 군도가 신설되어 도로망이 잘 발달돼 있으나 반면에 교통량의 빠른 증가로 사고의 위험이 많다.

외사(外砂) 마을

외사(外砂)는 바깥 모래골이란 뜻이다. 옛 사량(砂良)과 신안(新安)을 합한 마을인데 현재는 범등골, 큰말, 신안, 솔밭등, 새바대, 새앙골 등 자연마을이 있다.

두산리

범서읍의 동북 끄트머리에 위치한 경북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농소 3동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서 정조(正祖)년간에 관문리(關門里)였으나 고종(高宗) 31년(1894)에 관문과 연동(連洞)의 두 마을로 되었던 곳이나 1911년에는 관문동이 관문(官文)과 성저(城楮)로 갈라지고 연동은 그대로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관문(官文), 성저(城楮), 연동(燕洞)의 3개 동과 척과동(尺果洞)의 일부를 합하여 두산리(斗山里)로 불렀으나 현재는 대신(大新)과 구룡(九龍)의 두 행정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대신(大新) 마을

크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대신(大新)이라 불렀으며, 척과 삼거리에서 관문성(關門城)까지 이어지는 범서읍 내동의 최북단에 위치한 큰 마을이다. 여러 성씨로 구성된 160여호의 주민들이 다시 작은 마을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고, 상아산과 치술령이 뻗어내린 산지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경주시와 경계를 이룬 까닭에 경주와 울산 버스 노선의 종점이어서 교통이 비교적 용이해 생활권이 경주와 울산으로 겹쳐있다. 한편 마을에 관문성과 쇠부리터, 치술령 가는 길 등 명소가 어우러져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며, 이로 인해 야외 토속식당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은 개발제한구역에 벗어나 있어 비교적 개발이나 신축이 용이한 편이어서 각종 시설물이 많은 편이고 인구의 증가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범서지역의 특성상 보기 드문 현상이다.

자연 마을로는 먹골, 왕걸, 길밑, 새터, 큰마을, 성지(城址) 등이 있으며 논농사, 밭농사와 더불어 단감과 배, 축산이 유명하다.

구룡(九龍) 마을

구룡(九龍) 마을은 서사를 지나 척과와 대신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지명의 유래는 일제 때부터 생겼는데, 옛날에 구리소(沼)라는 소(沼)에 용 아홉 마리가 살았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속설(俗說)로는 풍수지리상 용 아홉 마리가 구슬을 노리는 형국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구룡은 크게 구리새, 삼거리, 방아다리, 연동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60호에 가깝다.

척과리

범서읍의 동북쪽에 위치한 행정 마을로 옥녀봉(玉女峰)에서 내려다 볼 때 마을의 지형이 자(尺)처럼 똑바르고 길게 생겼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조 (正祖)때는 자과(尺果)라는 단일 마을이었으나, 고종 31년(1894)에 다시 척과(尺果)와 용연(龍淵)의 두 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경주군(慶州郡) 외동면(外洞面)의 반동(盤洞)과 사량동(砂良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척과리(尺果里)로 불렀으나 현재는 크게 척과(尺果)와 반용(盤龍)의 두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반용(盤龍) 마을

척과리(尺果里)의 서북쪽 마을(윗마을)로서 행정구역 개편 때 반자동과 용연동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지금의 '반용(盤龍)'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입구가 좁고 지대가 높은 것이 특징이지만 안은 매우 넓은 편이다. 밭농사와 논농사가 고루 발달되어 있고 지금은 축산과 단감 둥이 유명하다. 또한 산이 수려하고 사시사철 물이 맑고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치술령과 망부석(望夫石), 은을암(隱乙庵) 등 명소를 끼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자연 마을로는 반동(盤洞), 상동(上洞), 중촌(中村), 홍상골 등이 있다.

척과(尺果) 마을

척과(尺果)는 척과리의 아랫마을이며 옛 지명은 자과(尺果)이다. 즉 마을이 자(尺)처럼 바르게 생겼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짐작하여 자과의 어원은 '잣과'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잣과(果松, 海子松)'의 'ㅅ'음이 줄어진 것이 '자과'이며 자(尺)는 자(果松, 海子松)의 차음(借音)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척과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서 자연 마을로는 갈매진, 양지말, 음지말, 새각단, 새밭골, 새안동, 수왕곡 등이 있고 약 90호에 이른다. 특산물로는 배와 단감이다.

구영리

구영리는 정조(正祖) 때엔 구영리(舊營里)리라 하던 것을 고종(高宗)(31년)에 와서 구영동(九永洞)과 점리(店里)로 갈랐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구영리(九英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즉 구영(九英)은 구영(舊營)에서 비롯되었다.

다운동과의 경계에 있는 범서산성(凡西山城) 아래에 있으므로 옛 병영(兵營)이었다는 뜻에서 구영(舊營)이라 하였다가 고종 31년(1894)에 구영(九永), 1914년에 오늘의 구영(九英)으로 되었다. 자연 마을로는 크게 중촌(中村), 대리(大里), 점촌(店村)이 있으며, 국수봉에서 뻗어내린 산지가 이 마을에 오서는 모두 경사가 아주 완만한 구릉지로 변해 개간이 용이해 일찍이 초지 및 과수원이 조성됐다. 배와 단감이 유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대리 마을은 최근 택지개발로 인해 신주거지가 형성 중이고, 점촌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날의 시골의 아늑한 풍경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 구영리를 바라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난다.

울산 삼호(三湖)에서 언양(彦陽) 방면 국도 24호선 1km지점에서 구영교(九英橋) 건너편에 펼쳐진 마을이다.

중촌(中村) 마을

구영리의 가운데 마을이라 하여 중촌(中村)이라 하며 중촌(中村),동촌(東村), 안골(內谷)의 자연 마을이 있다. 낮은 산지 아래에 자리잡은 아늑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또한 중촌 마을은 호랑이가 앉아 낮잠을 자는 형국이라 하여 약 200년 전 청량파 학성 이씨(鶴城李氏)가 이곳에 정착할 때부터 대문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대문을 설치하면 도난과 화재를 입는다 해서 지금까지도 이 마을은 대문이 설치하는 집이 없다.

특산물로는 배와 단감, 양봉이 유명하다.

대리(大里) 마을

구영리(九英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里)라 한 것인데, 이는 다시 대리와 모두배기의 두 자연 마을로 갈라진다. 택지개발과 신주거지 형성으로 인해 옛 마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쾌적하고 새로운 주거 환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특히 배와 밤이 유명했다.

점촌(店村) 마을

대리와 서편으로 맞물린 마을인데,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어 역시 옛 마을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이조 때 사기점(沙器店)과 수철점(水鐵店)이 있는 곳은 중기까지는 이를 도호부(都護府)에서 직영(直營)하다가 뒤에 사영(私營)으로 전환하였으며 사기점은 구영점(舊營店)과 웅촌(熊村)의 내기전(內器店), 농동(農東)의 이원점(二院店)에 있었다.

이 사기점이 있었기 때문에 줄곧 점리(店里)라 하여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영리(九英里)에 합하게 되었는데, 수년 전만 해도 옹기굴(甕器窟)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참고; 舊營店 在 凡西面 距府二十里 (蔚山邑誌. 店里)] 점촌에는 점촌과 갓골의 자연 마을이 있다. 특산물이었던 옹기와 배는 이젠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중리

중리(中里)는 정조(正祖) 때 내지지리(內知止里)와 외지지리(外知止里), 욱곡리(旭谷里)로 갈라졌다가 고종 31년에는 망성동(望星洞)과 욱곡동(旭谷洞)까지 관할하였으나 1911년에 이들 망성과 욱곡이 각각 분립하여 나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사동(內砂洞)의 일부의 일부를 합하여 이름을 그대로 중리(中里)라 하였다. 중리에는 중리(中里)와 지지(知止)의 두 행정마을이 있다.

중리(中里) 마을

중리(中里)라 함은 망성(望星)까지 관할하였을 때 지지(知止)과 망성(望星)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범서읍의 북쪽에 위치한 아담한 마을이며 서사리와 다운동으로 이어지는 군도 35호선이 근래에 개통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으나,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는 군도 31호선의 교통량이 많아 사고의 위험이 많다. 단감, 포도가 유명하다.

지지(知止) 마을

중리(中里)를 지나 두동면의 경계 아래에 있는 마을로 지잔 또는 지지(知止)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세워진 신라의 경순왕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바로 세우고자 마지막 불심을 모았다.

어느 날, 왕이 국사(國事)에 영을 친히 내리고 호국(護國)의 불사(佛事)를 일으켜 왕이 친히 가서 부처님을 공양할 때였다. 얼굴이 험상궂고 허리는 꼬부라지고 남루하기 그지없는 한 중이 뜰에 서서 "추하고 보잘 것 없는 노승이오나 소승도 같이 재(齋)를 지내기를 바라나이다" 하며 허리를 굽히며 절하니 이에 경순왕도 말없이 허락하여 참여토록 하였다. 그러나 재가 끝났을 때 그 노승을 보니 너무나 모습이 초췌하므로 희롱 삼아 비웃으며 "어느 절에 있느냐?"고 물으니, 스님은 "하곡면에 있는 영축산에 있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또 왕이 말하길 "이제 그대가 돌아가거든 남에게 국왕이 친공하는 재에 가보았다고 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자 중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되 "전하께서는 남에게 진신문수보살(眞身文殊菩薩)을 공양하였다고 말하지 마소서" 하고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날려 하늘 높이 솟아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모아 국운을 건 행사하였으니 왕이 당황하고 부끄러운지라 빨리 어가(御駕)를 준비하게 하여 문수보살이 간 길을 뒤따라 지금의 두동면 봉계에서 남으로 빠져 나와 두동 은편과 지잔 사이에 있는 고갯길까지 왔으나 아무리 해도 문수보살을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여기에 왕은 크게 탄식하여 "헛일이로구나. 헛일이로구나" 하며 외쳤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어가를 재촉하여 길을 달렸으나, 문수보살은 이미 영축산에 도착하여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왕은 넋을 잃고 멍하니 영축산을 바라보다 환궁(還宮)하였고,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의 천년사직이 그 막을 내렸다 전한다.

이 전설과 더불어 전해오기를 두동면 은편 마을과 범서읍 지잔 마을과의 사이에 있는 고갯길에서 당시 경순왕이 헛일이로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하여 '헛고개'라 하며, 어가를 멈추고 쉰 자리라 하여 '지잔'이라 불리고 있다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옛 신라가 서라벌을 중심으로 반경 500리를 처음으로 구역을 삼았을 당시 신라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선도 할 곳은 '여기가 끝이다'라는 뜻으로 지지(知止] 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이곳은 '지잔'이라고도 부르는데 잔은 '잔'으로 산이 가파르고 험준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知'는 옛 지명에 고원(高原)의 뜻을 가진 '티'의 차자(借字)로서 '池, 遲, 旨'가 다 마찬가지다. '지잔'을 '지잔'으로 본다면 산이 가파르고 험준한 티 또는 고원이 되어 지잔의 지형을 그대로 나타내어 주는 이름이 된다. 사실 이 마을의 양편 산세가 높고 가파르기 이를 데 없다.

지지(知止)에는 고개만당과 아랫동네로 갈라져 있으며 주위에 화강암이 많다. 주위 산세와 경관이 빼어나 음식점이 많으며 축산과 단감이 유명하다.

망성리

망성리는 북으로는 국수봉과 연화봉(蓮花峰), 남으로는 문수산(文殊山)을 바라보며 굽이 굽이 태화강 중류를 끼고 있는 마을이이며 선바위를 조금 지나 첫 마을이다. 망성은 조선 예종(睿宗) 때는 망상리(望相里)라 하였다가 정조(正祖)에 와서는 욱곡(旭谷)의 단일마을이 되기도 하였다.

고종(高宗) 31년(1894)에는 다시 중리(中里)에 속했다가 1911년에 자립한 마을이 되었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욱곡동(旭谷)을 합하여 망성리(望星里)라 하였다. 망성리에는 망성과 욱곡의 두 행정 마을이 있으며, 특히 단감이 유명하다

망성(望星) 마을

망성(望星)이라 불리게 된 유래로는 이 곳의 지대가 높고 숲이 우거져 별만 보인다 해서 이른다는 설과 지지(知止) 설화에 연이어 경순왕이 탄식하며 문수보살을 따라 이곳 망성까지 왔으나 문수보살은 영축산으로 사라지고 왕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는 데서 비롯하여 이때는 망성을 망성(望聖) 또는 망승(望僧)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자연 마을로는 큰말, 새각단, 등넘, 욱천 등이 있는데, 망성(望星)은 우리 나라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 그대로다.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 중류가 유유히 감돌아 흘러가며 그 앞으로 넓은 입암(立岩) 들이 펼쳐져 있다.

주민은 70여호에 300여 명이 수도작, 축산, 과수, 채소 등 근교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단감이 유명하다.

욱곡(旭谷) 마을

욱실(旭室이)라고도 부르며, 정조(正祖) 때 독립한 마을이었으나 고종(1894)에는 중리(中里)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망성(望星)에 합하였다. 욱곡은 망성 서편에서 2km정도 들어가는 골짜기로 20여 가구가 살고 있고, 사방이 산으로 가리진 하나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6·25전쟁 때는 이곳에 빨치산이 진을 치며 거주하기도 했다. 개척인으로 임진왜란 때 피난으로 입산한 공씨 일가로 전하며, 그 다음으로 수원 백씨, 달성 서씨, 영천 최씨, 함안 조씨, 광주 안씨, 경주 김씨, 월성 이씨, 김해 김씨, 동래 정씨 등 여러 성씨가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주로 크고 작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비상골, 뿔땅골, 황골, 한실재골, 삼발골, 외발골, 듬방골, 못안골, 옷물안골, 물방아골 등이 있다. 특히 평지가 적어 일찍 야산을 개간해 감나무를 심어 이 일대는 물론 전국적인 특산물로 자리잡았다

사연리

범서읍에서 언양 방면 사연댐 아래 일대에 형성된 행정 마을이다. 사연리는 정조(正祖) 때 사일리(沙日里)와 곡연리(曲淵里)로 되었다가 고종 (高宗)31년(1894)에는 곡연(曲淵)이라 하던 단일동이었으며, 1911년에 다시 곡연(曲淵)과 사일(泗日)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사연리(泗淵里)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연(泗淵)이라 함은 사일(泗日)의 사(泗)와 곡연(曲淵)의 연(淵)을 서로 조합한 이름이며, 사일(泗日)과 곡연(曲淵)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사일(泗日) 마을

사일(泗日)마을은 뒤로는 연화산(蓮花山 343m)과 함께 나비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태화강의 비단 같은 물길이 굽이쳐 흐르는 산수가 어우러진 마을이다. 사일은 조선 정조 때 '새나리(泗日)'라 불렀다. 여기서 '사(沙)'는 예 지명과 인명 등에 흔히 쓰는 '사'와 '새'에서 음차(音借)한 글자로 동(東), 신(新), 서(徐)와 같이 '새밝', '새벽'을 뜻한다. 또 '일(日)'은 '나리'에서 차자한 글자로 그 새김은 '날'이며, 그 연장음은 '나라'이다. '나리'는 또 '내(川)'의 다른 형태로 마을이나 땅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새나리'는 '밝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사일(沙日)이 지금의 사일(泗日)로 바뀐 것은 차자(借字)나 한자의 뜻을 새겨 읽는 이두(吏讀)의 훈독법이 사라지면서부터다. 이두의 훈독법이 사라지자 '사일'을 '새나리(沙日)'로 음독하면서 사일(沙日)이 됐는데, 이를 사일(泗日)로 고쳐 사용했다는 것이다.

달성(達城)서씨(徐氏)가 집성촌을 이루는 가운데 현재 총 29세대에 약 6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마을로 가기 위해 사연교(泗淵橋)를 지나 곧장 우회전을 해 강 따라 내려가면 사일교(泗日橋)를 만나게 된다. 사일교 아래로 흐르는 물은 상류 쪽의 사연댐까지 이어지는데, 여기서 언양에서 흘러온 물(남천)과 만나는 곳을 '아부래비'라고 부른다. 아부래비는 '아우르다' 합치다'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곡연(曲淵) 마을

범서의 서편에 속하며 울산과 언양의 중간 지점인 태화강 중류인 언양천(彦陽川)과 대곡천(大谷川)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반고서원유허비(盤皐書院遺墟碑-지금은 반구서원(盤龜書院)이라 부른다)에 반구대(盤龜臺)의 정경을 이르기를 '반구천의 물이 동남으로 거쳐 무학산(舞鶴峰)에서 흐르는 물과 더불어 동으로 아홉 굽이가 친다' 라 하였음을 미루어 보아 옛날 이곳의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산이나 골짜기에 관한 지명이 많다.

토착민으로는 밀양 박씨가 약 300년 전에 입향하여 살아오다가 중년에 많이 이주하여 지금은 극소수이며, 약 250년 전에 입향한 경주 김씨 40여 호가 현재 살고있으며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 약100년 전에 입향한 풍천 임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들이 합심일체가 되어 향약을 존중하고 애향심이 남다르다. 다소 보수적이고 유교문화가 뿌리 깊은 마을이나 오늘에 와서 현대적인 사고로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특산물로는 들이 넓어 논농사와 함께 배와 채소, 축산이 유명하며, 교통이 용이하여 농축산물 유통과정이 편리하다.

곡연(曲淵)의 곡(曲) 자(字)는 반구천의 구곡(九曲)의 흐름에서 따온 것이다. 구곡(九曲)이라 함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유배지인 반구대(盤龜臺)에서 시작하여 하류로 아홉 개의 소(沼)를 이룬다하여 붙여진 것이며, 정몽주가 벼루를 씻으러 나온 곳이라 하여 세연동(洗硯洞)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사연댐에 수몰되었다. 곡연(曲淵)에는 관서정(觀逝亭), 대방골(大方谷), 샛터, 넓내, 벼락소, 새각단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입암리

범서파출소 뒤에서언양 방면사연교(泗淵橋)까지의일대를 입암리라 부른다. 입암리는 정조(正祖)때는 입암리와진목리(眞木里)라하였다가 고종(高宗)31년(1894)에는평천동(平川洞)에속하였으며 1911년에 다시분리하여 입암이라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평천동(平川洞)과곡연동(曲淵洞)의 일부를합하여 오늘의입암리가 되었다.

입암(立岩)이라 함은마을 동쪽 태화강 중류에자리잡은백룡담(白龍潭)에 우뚝솟은 바위가 있으므로이로 말미암아 부르게 되었다. 입암리에는입암(立岩)과 진목(眞木)의두 행정마을이 있다.

진목(眞木)마을

입암(立岩)과곡연(曲淵)의 중간에위치한 마을이다. 옛날에 참나무가많았던 곳이어서진목(眞木)이라 부른다.진목을 세종(世宗) 때는[가수거(可樹渠)],예종(睿宗) 때는 [가수개리(可樹介里)]라하였는데, [可樹]는 가나무,차자(借字)로 보며, [渠]또는 [介]는 거랑 또는시내의 차자로 보인다.따라서 이가수개(可樹介)가 변하여오늘의 진목(眞木)일것이다.

진목은 남쪽으로는감태봉, 서쪽으로는 태봉,북쪽에는 일산봉의 세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아늑하고 아담한마을이었으나, 1969년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국도 24호선의 확충과더불어 많은 농토와가옥이 도로부지에편입되어 그 형태가 다소 바뀌었다.경지면적으로는 논이 약 20만㎡, 밭이 약13만㎡,과수가 약3만㎡ 이며, 총가구수 34가구에 농가는28가구이다. 특산물은 배와 단감이다. 상동, 중동, 하동, 도둑골등 자연마을이 있고, 윗들,설못들, 모래들 등의 들이있다.

입암(立岩)마을

들앞의 태화강중류에 있는 선바위를 본떠서 입암(立岩)이라부르게 되었다. 수려한태화강 경관을 끼고돌며 들이 넓으며 아늑한기운이 감도는 마을이다.옛날에는 마을의 모양이초원의군마목지(軍馬牧地)라하여 들마을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17세기 초 입촌한성씨로는 창녕 성씨와용궁 전씨로(마을 주변에구묘(舊墓)가 산재해 있음)알려지고 있으나 지금은 대부분 외지(外地)로이주하고 없으며, 1760년경에학성 이씨가 토착하기시작하여 그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있는 가운데 여러성씨들이 모여 마을을이루고 있고 유교성향이강하다. 특산물로는 넓고기름진 입암들에서생산되는 쌀과 배, 단감이나, 1970년대 전만해도 연근(蓮根)이유명하였다.

마을 행사로는 년초의신년예배(新年禮拜)를시작으로 경로사상에의한 윷놀이와달집태우기 등이 있고품앗씨, 두레 등의 협동영농이 잘 정착되어있다. 상촌, 하촌, 외촌,솔고개, 강당 등 자연마을이 있?f데, 1988년에솔고개 일부가송현마을에 편입되었다.

천상리

범서 삼거리에서언양 고속도로 건너편문수산(文殊山) 자락 아래자리잡은 마을로 수년전만 해도 평범한농촌이었으나택지(宅地)가 조성되고아파트 단지가들어섬으로 인해 신주거지로 변모한 곳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일찍이 배가 유명했는데안타깝게도 택지에 밀려많이 사라졌다.

천상리는 정조(正祖)때는 천상리의 단일마을이었으나 고종(高宗)31년(1894)에 천상(川上),평천(平川), 대동(垈洞)의 3개 동으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천상과 대동에 평천동의일부를 합하여 지금의천상리에 이르고 있다. 천상리에는 송현, 평천,천상, 대동의 행정 마을이있다.

송현(松峴)마을

이 마을은 범서읍사무소을 비롯한 파출소,농협, 우체국등 범서읍의관공서가 밀집한심장부라 할 수 있다.1988년 1월 1일 국도 24호선 남쪽천상리 일부와 북쪽입암리 일부가 합해져소재지 마을인송현(松峴)마을이 탄생되었다.

읍사무소(면목소)는1918년 구영리(九英里)에세워졌다가 1936년 이곳송현으로 옮겨왔으며일제 때부터 성업하던이우성의 한의원이있었으나 폐쇄된 지오래며 지금은 한춘란 이경영하는 영생약방이있다. 두동으로 가는삼거리에 윤규봉이경영하는 범서주유소가 있고 옛범서 재건중학교 건물에외갓집이라는 식당이있으며 소재지 유일의까치다방과 약간의식당이 있다. 지금의농협건물과 안정중의집터부근은 광복이후새곡장터가 옮겨와 매월3일,8일(13,18,23,28일) 개장되던솔곡 5일 시장이개장되었었는데 1959년사라호 태풍으로 인해폐장되고 말았다.전봉수가 경영하던포목시장과 지금의이근수·차도규의 집은 한 때 꽤나흥청대었던 주막이라전한다.

읍사무소맞은편에는 옛기와집그대로 70년 전통의하월가(下月家)란 간판을 내건 한식집이 꾸준히성업중이다. 하월식당은일제시대부터경영했었는데 창업할머니는 작고했고 그의따님 전봉수가 경영하고 있다. 옛 범서를출입했던 인사들은 이식당의 특미인 각종 장아찌 맛이 지금도그리워 전통의 이 식당을찾곤 한다. 이 곳은읍소재지 임에도불구하고 그린벨트 지정으로 인해 전혀개발되지 않은 초라한소재지이다. 금번 그린벨트 조정에지역주민들의 거는기대는 아주 남다르다.

평천(平川)마을

천상으로 가기 전에있는 마을로 들내, 들땅,들말 등의 뜻을 가진마을이었는데, 지금은고층 아파트가 밀집해있어 옛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평천은 다시 평천1, 2, 3, 4, 5,6, 7, 8, 9리로 나누어진다.

천상(川上)마을

천상리의 가장 안쪽마을이다. 천상리(川上里)를처음에는 천상(天上)이라부르다가 변해서지금처럼 된 것으로전하나, 좀 더 생각해보면천(川)은 '내'이다. 즉'내'는 사람이 사는 터전을일컫는다. 옛날 인류가 산에서채집이나 수렵을 하면서살다가 점점 냇가(川)로내려와서 농경생활을하게되면서 들로 옮겨살게 되었다. 그래서사람들이 사는 터전을내(川)라 하게 되었고, 이내(川)의 뜻이 차차 내(壤)의개념으로 변해갔다.그래서 천상의 천(川)은'내'로서 평천(平川)의'내'와 같이 사람이 사는터전이라는 뜻을가졌으며, 위쪽 내라 하여천상(川上)이라 하고넓은 들내라 하여평천(平川)이라 하였을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 마을은선사시대(先史時代)의주거지로 추정되는곳이기도 하다. 1996년도에두 차례에 걸쳐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박물관(博物館) 등에서조사 발굴을 했으나정확한 결과는 알 수없지만, 이곳의 장터를개간할 때 옛 주거생활에쓰였던 도자기가출토되었다 한다. 장터는설에 의하면 오래 전에장씨들이 살았다 하여부르게 되었다 전하나정확한 근거는 없고, 문헌상 기록된 주거의태동은 300-400년 전으로추정된다. 구묘(舊墓)로미루어 볼 때 김해 김씨,동래 정씨, 경주 이씨가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성씨이며, 다음으로 약 200백이상으로 보이는 여양진씨, 창원 황씨, 밀양 박씨등이고 이어 경주 김씨,서씨, 강릉 유씨, 전주 이씨,신씨, 손씨, 고령 박씨 등여러 성씨가 주거하고있다. 이 마을 역시택지개발로 인해신주거지로 변모한곳이다.

대동(垈洞)마을

범서 삼거리에서언양고속도로 바로 건너인접해 있으며 현재 구범서초등학교가 있는마을이다. 고종(高宗) 31년(1894)에대동(垈洞)이라 하였다가1911년에는 대동(大洞)이라하였고 1914년에 다시대동(垈洞)이라 하였는데, 옛날 이곳에대나무가 많아대골(竹谷)이라 했는데이것이 변하여 지금의대동이 된 것이라 한다.

이 마을은 남으로는문수산을 끼고 있고북으로는 국수봉을바라보며 선바위백룡담(白龍潭)을 감돌아유유히 흐르는 태화강 물줄기가 스쳐 가는황정지(黃亭地)밭둑이었다. 따라서이곳은 옛부터 산수가수려하여 풍류와 천렵을즐기던 곳이다. 이 마을 역시신주거지로 변모하여 옛마을의 모습은 많이사라졌으며, 남녘골,불당골, 연짓골(점골),쇠부리터, 골안, 못넘,대갓봉 등 여러 가지 뜻을담고 있는 옛 지명들이마을 도처에 널려 있다.대동은 다시 대동1리, 2리,3리, 4리, 5리로 나눈다.

굴화리

울산광역시 남구무거동과 바로 입접해있는 마을로서울산시에서 범서읍 소재지로 들어오는초입이다. 굴화리의일부가 신 주거지역으로개발되어 옛날의 모습이많이 사라졌다. 특히 굴화리는울산지역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도매우 유래가 깊은 곳이다.우리 나라의 오천년역사를 거슬러 보면 단군(檀君)과 기자의 신화시대가 있었고, 그 다음이 위만조선, 삼한시대,삼국시대로 이어진다.

B.C108년에 위만이 멸망하고 한반도는삼한{마한(馬韓),진한(辰韓), 변한(弁韓)}부족국가(部族國家)시대로 분열하였다. 당시 울산은 삼한 중진한의 12개국 중 한부족국가였는데 염포에 염계국이 있었고,웅촌(熊村) 검단에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다 전하며, 이때 굴화는굴아화촌(屈阿火村)이라는 한 부족국가 마을로촌락을 형성했는데 차츰현치(縣治)와역촌(驛村)으로 발전했다.

그 후 신라 5대왕인파사왕에 이르러 진한이 막을 내리고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이곳의 현치소(縣治所)를 굴화로 정하고 현명(縣名)을 굴아화현(屈阿火縣)이라고 하였으며,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신라의 전역의 행정을 대폭개혁하면서 하곡현(河曲縣)이라고 개칭하였다가 고려와조선 초기에는 굴화(屈火)로도 서사하였다.

세종(世宗) 때와예종(睿宗) 때는굴화(堀火)와장고암(長古岩)으로 갈라졌고, 정조(正祖) 때는장 검리(長劍里)와 굴화리(堀火里)로, 고종(高宗) 31년에는 역리(驛里)와 장검(長劍)이라 하였다가,1911년에는 다시 굴화(屈火),장검(長劍), 백천(柏川), 괴정(槐亭)으로 세분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굴화리(屈火里)라하였다. 굴화리에는 백천(栢川), 장검(長劍), 굴화(屈火)의 행정 마을이 있다.

백천(栢川)마을

굴화리(屈火里)의서편 마을이며 안마을과바깥 마을로 나누어진다.옛날 잣나무가 많았다하여 백천(栢川)이라하였는데,잣나무마을이라는 뜻을가졌다. '栢'은 '白, 伯, 百, 朴' 등과같이 신명(新明)을의미하는 고어로는'밝은'이라는 뜻이며, '川'은'江'을 말하는 것이아니라 내(壤)를 뜻한다.

고개 사람들이 산을삶의 터전으로 삶고있다가 냇가(川邊)로내려와서 차차 농경을하고 살았으므로 내(川)는삶의 터전을 뜻하게되고 뒤에는 내(壤)의뜻으로 변했으니백천(栢川)의 천(川)은내(壤)의 뜻으로 보아야 할것으로 본다. 문수산 자락 아래 터를잡은 백천(栢川)은 마을앞에 넓은 들과태화강(太和江)이 펼쳐져있어서 옛부터 살기 좋은마을이었다. 특히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울산의 중심지로서 많은인구가 밀집해서 거주한곳이다. 그러나 마을한가운데로 고속도로가 생기고 사연댐에서내려오는울산시생활용수와공업용수관로가지나가면서 마을이분리되고, 국도 24호선의확포장으로 일부 세대가 철거되는 등마을에 많은 변화가생기면서 세대수가 많이줄었을 뿐 아니라, 현재가압장, 신도로,인터체인지 등이 설치,계획 중이어서 앞으로도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특산물로는 논농사외에 배, 단감, 채소, 화원등이 유명하다.

장검(長劍)마을

굴화의 남쪽마을로서 고속도로너머를 말한다. 장검은 본래 독립된마을이었으나 1914년행정구역 개편 때굴화리에 합해졌다.장검은 예종(睿宗) 때는장고암(長古岩)이라 하였는데, '長古'는장고(長鼓)의 차자(借字)로이는 지형이 장고 같은데서 유래된 것으로도생각할 수 있으나, 좀더 다른 방향으로생각해보면 장고는북(鼓)으로, 비슷한 지명에비유하여 그 뜻이'밝다'이므로장고암리(長古岩里)는광명한 마을이라는뜻이 된다.

문수산은 영축산과더불어 굴아화(屈阿火)부족들의 신령스러운성산(聖山)이었다가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불교의 성지(聖地)가 된산이니 광명한 마을이란이름이 붙을 듯도 하다.'장고암'이 줄어서 '장검'이되었다 한다. 또 다른 설로는장검(長劍)은 한자의그대로 '긴칼'이라는뜻이다. 마을 모양이 한줄로 길게 뻗은 긴칼처럼생겼다. 이어 장검에는'칼설'이라는 전설이 있다.'칼설'이란 칼의 날한가운데를 말하는데, 이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없고 부자만 모여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해방 당시만해도 2-3명의 머슴을 데리고농사를 지을 정도로부자들의 마을의한가운데를 차지하고있었다 한다. 지금은 사연댐관수로,고속도로, 대암댐관수로등의 관통으로 마을이도막나 옛 모양이 다소사라졌다.

굴화(屈火)마을

울산에서 범서로들어오는 초입에 있는마을이다. 이곳엔삼한시대(三韓時代)의진한(辰韓)에 속했으며굴아불(屈阿火)이라는성읍국가(城邑國家)가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따르면 신라파사왕(婆娑王)이 이곳을취하여 처음으로굴아화현(屈阿火縣)을두고 현치(縣治)를 열었다 하나 당시사로국(斯盧國)의 성질로보아사로연맹(斯盧聯盟)에가맹을 뜻하는 것으로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이곳은 신라 일대를통해서 울산지방의현치소(縣治所) 역할을하여 오다가 고려 태조때에 행정의 중심이학성(鶴城) 지방으로옮겨갔다.

굴화(屈火)는굴아불(屈阿火)이 줄어진것인데 굴아(屈阿)는내(川)의 흐름이 굽었다는것이며 '불(火)'은원야(原野) 또는성읍(城邑)이나 도시를뜻하는 말이 된다.'불(화)'는 당시에 주로부족국가의 받침으로사용하여 왔다. 그러므로 굴아화(屈阿火)는 '굽은냇가의 나라'라는 의미를가진 것인데, 이를 신라경덕왕(景德王)이한식명(漢式名)인하곡(河曲)으로 고쳤는데굴아화(屈阿火)와 같은뜻이며 일명하서(河西)라고도하였다.

태화강을 끼고 넓은들을 둔 전형적인농촌마을이었으나 근래에택지가 조성되고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등 신주거지로 탈바꿈한 마을이다. 구성 세대는여산. 은진 송씨(20여세대)와 김해 김씨(8세대), 진주강씨(5세대), 경주이씨(10세대) 등 여러성씨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산물로는 배, 단감,채소, 화훼 등이 있으며굴화 1, 2, 3, 4리로 나누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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