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읍

사람이 희망인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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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소개

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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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위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선바위(立岩)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곳 입암(立岩)마을에는 달덩이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처녀가 살고있었다 한다. 이 처녀의 미모가 천하일색이니 마을 총각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다. 따라서 이 마을 총각들은 모였다하면 화제 거리는 당연히 미모의 처녀 이야기였다. 어느 날 승복을 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공양미 동냥을 하며 마을을 돌고 있는데 어느 골목에 이르렀을 때 마침 동네 청년들이 모여 앉아 이 미모의 처녀이야기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이곳을 스쳐지나가던 스님이 이야기를 듣게된다. 스님의 신분으로 그냥 지나쳤어야 했거늘, 천하절색이라는 이 집 처녀의 미모에 관심이 쏠리고 말았다. 스님은 신분이 신분인지라 몇 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체념을 다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더더욱 가슴이 두근거리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뿐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하랴!

마침내 이 스님은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이 미모의 처녀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만이 온 뇌리를 사로잡게 되었다. 그래서 처녀가 언제 한번 바깥에 나오기를 빌고 고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성이면 감천이라 미모의 이 처녀가 빨랫감을 이고 냇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기다리던 때를 만난 이 스님은 재빨리 빨래터 건너편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빨래오는 처녀를 기다리며 숨어 있었다. 이 처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빨래터에 나와 토닥토닥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맞은편 숲 속에 숨어서 빨래하는 모습을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던 이 스님은 듣던 대로 천하절색의 미인을 보고 넋을 잃을 정도로 도취되고 말았다.

그러나 삼보 귀의한 불승의 신분으로 여염집 처녀를 어쩌란 말인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스님은 중심을 못 잡은 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날마다 입암 마을을 맴돌고 있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이 스님이 처녀의 집에 들러 목탁 치고 염불하며 동냥을 하기에 이른다. 처녀는 쌀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와 스님의 동냥바랑에 쏟아 붓는 순간 , 스님이 처녀의 미모에 도취해 스님신분을 망각한 채 처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말았다. "에그머니나!"하고 놀란 처녀는 총총걸음으로 집안으로 단숨에 뛰어 들어 갔다. 처녀의 손목을 잡은 스님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마을을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던 처녀는 다시 빨래터에 빨래하러 나왔다. 스님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빨래터 건너편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었다. 처녀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빨래만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이게 웬 변고냐!

이때 태화강 상류 쪽에서 큰 폭우가 내려 홍수가 밀고 내려왔다. 마치 집채같은 성난 물굽이가 사정없이 몰려오는데 불가사의하게도 큰바위 하나가 우뚝 선 채로 둥둥 떠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빨래하던 처녀가 하도 신기하여 "어머! 정말 이상도 해라. 바위도 장가가는가봐?"라고 하였다. 처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람한 바위는 빨래하던 처녀를 깔아뭉개려고 덤볐다. 처녀가 비명을 질렀다. 절박한 순간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숲 속의 스님이 황급히 뛰어내려 처녀를 구하려고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그 애절함도 소용없이 처녀와 스님 모두를 바위는 깔고 앉아 버렸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인연인지 몰라도 이 미모의 처녀와 스님은 우연한 한날 한시에 선바위(立岩)에 깔려 한 많은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고 말았다. 다음날 시신이 백천(栢川)까지 떠내려 왔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옹달샘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선바위가 서 있는 백룡담에는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려고 하는 날 밤에는 애달픈 여인의 애간장을 끓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백천(栢川)에는 큰뱀(大蛇)이 금빛 찬란한 서광을 발하여 물살을 가르면서 백룡담으로 올라가 처녀혼(處女魂)과 상봉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변이 일어나기만 하면 큰비가 내려 이 지방에는 큰 피해를 입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 인연이 후생에 가서 이루기는 했으나 신의 노여움을 산 얄궂은 인연이라 이 같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배리끝의 애화(哀話)

태화강 중류, 즉 우리 고장 구영리와 중구 다운동으로 통하는 비탈 산길이 있다. 굴화에서 보면 강 건너 북쪽 벼랑을 말한다. 일명 벼락끝, 벼락소라고도 하는 곳이다. 앞에 흐르는 태화강을 사군탄(使君灘)이라고 한다. 사군(使君)의 뜻은 "낭군님부터 정할라네"이고 탄(灘)은 물 가운데 돌이 많은 곳의 흐름을 말하는 여울이다.

옛날 이곳에는 한 농가에 농부가 살았다 한다. 어느 여름날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벼락맞은 뒷산의 산사태로 인해 농가는 강물로 떠내려가고 그 집 자리는 깊은 여울이 파여 깊은 소(沼)가 생겼다 한다. 이 배리끝에는 농부 내외와 과년한 누이동생이 살았는데 또 하루는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농부는 우장삿갓하여 농토를 살피러 들로 나가고 집에는 시누이와 올케 두 사람만이 남아 서로 부둥켜안고 뇌성벽력의 공포에 떨면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비가 그치기는커녕 비는 점점 더 억수같이 퍼부어 그칠 줄을 몰랐다. 이윽고 쾅! 하면서 천지개벽하는 소리가 나더니 집 뒷산에 벼락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어 산사태는 농부의 집을 덮쳐 삼켰고 방안에 있던 시누이와 올케는 불행 중 다행으로 퉁겨 나와 흙탕 강물에 휘말렸다. 들판에서 논둑을 손질하던 농부는 벼락친 곳이 자기 집 위치란 걸 알고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뒷산의 산사태로 집은 사라지고 아내와 누이는 불어난 태화강물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며 "여보 사람 살려요", "오빠 사람 살려요"라고 아우성이었다

농부는 급히 강물에 몸을 던져 단숨에 아내를 구해냈다. 곧이어 누이를 구하려는데 험악한 물구비로 인해 누이의 손은 잡을 수 없었다. 누이는 통나무 토막을 의지해 마구 떠내려가며 "오빠 사람 살려요"라며 발악을 했다. 하지만 사투를 벌인 보람도 헛되이 누이는 오빠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멀쩡한 사람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오빠의 허무한 심정과, 통나무에 의지해 죽음의 길로 떠내려가면서 오빠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쳤건만 구원받지 못하는 누이의 처절한 심정을 어디에 비길 것인가. 가련한 누이는 이렇게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고 말았다.

농부는 하나뿐인 누이를 잃은 슬픔에 부인을 업고 산언덕 바위굴에서 비를 피하면서 실신 상태의 부인을 되살렸다. 한편 가련한 처녀는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애달픈 심정을 남겼는데 이 노래가 훗날 이 고장에 모심기 소리 등에 유명한 민요 한 구절로 등장하게 된다. 남창남창 배리 끝에 무정하다 울 오라배 나는 죽어 환생하면 낭군부터 정해야지 '남창남창'이란 불어난 태화강 물이 남창남창(넘실넘실) 넘칠 듯 하다는 뜻이고, '배리끝'은 자기 집이 있던 자리이고, '무정하다 울 오라배'는 아내를 먼저 구한 오빠를 원망하는 누이의 애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하겠다. 즉 낭군이 없음을 탄식하며 죽어서 환생하면 낭군님부터 정해야겠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는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갈 정도의 깊은 여울이 파였다고 하는데, 이 여울에는 비가 오려고 몹시 흐린 날에는 한밤중에 애간장을 끓는 애달픈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다고 전한다. 이 소리가 들리면 인근 마을 총각 중 한 사람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 스스로 걸어가 그 여울에 빠져 자살을 하곤 했다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그 처녀의 원한 맺힌 영혼의 변고일 것이라 믿고 원귀(寃鬼)를 달래기 위한 백일 위령굿을 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폭주하는 24호 국도의 교통난으로 인해 구영(九英)과 다운동(茶雲洞)간, 즉 '배리끝 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울산시에서 계획 중에 있다.

무거와김신암(金信庵)

신라(新羅)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때 이다. 천년(千年) 가까이 화려한 번영을 자랑하던 신라도 말기에 와서는 귀족들의 분열과 지나친 호화 사치 등으로 인해 광활했던 국토는 경주 일원으로 줄어들고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입하여 영천(永川)에 이르러도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 구원을 청할 뿐이더니 고려 태조는 강병 1만으로 구원케 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정세 속에서도 구원군이 미쳐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은 포석정에서 환락에 잠겼다가 입성한 견훤 군에 의해 처형당하고 견훤 손에 의해 새로이 세워진 임금이 바로 경순왕이다. 경순왕 역시 이미 기울어져 가는 사직을 바로 잡을 만한 능력은 없었다. 또한 조야의 국론 역시 이미 분열되어 흔들렸으며 마의태자 같은 왕자도 나라의 운명이란 하늘에 달렸거늘 어찌 천년 사직을 헛되이 할 것인가 하였으나 그 주장 역시 통하질 못하였다.

이때 경순왕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축산(靈鷲山)의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계시를 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태자와 둘째 왕자와 동행하여 하곡현(河曲縣)에 있는 영축산을 찾았다. 가는 길에 태화사(太和寺)에 들려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 한 동자승을 만났는데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고하였다. 왕은 기꺼이 만족하여 동행을 하였다. 그러나 삼호(三湖) 앞에서 태화강을 건너자 얼마 못 가서 동자승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왕은 직감에 이 동자승이 곧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져버리는구나' 하고 크게 탄식하며 이제는 할 수 없구나 몇 번이나 한탄하며 실의에 빠졌다. 왕은 발길을 돌려 환궁하여 쇠퇴한 나라를 통탄하며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했다. 이때 군신들의 의견은 제각각 찬반으로 엇갈렸다. 왕자 마의태자는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 오직 나라 사랑하는 여러 충신들과 함께 민심을 크게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연 후에야 망할 것이니 어찌 일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다른 나라에 내줄 것이냐" 하였다.

왕이 한숨지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아 형세는 이미 능히 온전할 수 없으니 이왕에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죄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 하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어 귀부를 청하고 말았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과 하직하고 곧 개골산(皆骨山-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그의 생을 마쳤다. 또 막내아들은 머리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니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法水)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문수산(文殊山) 남쪽 산에 절을 지어 여기에서 살았으니 그 절 이름을 김신암(金信庵)이라 하였다. 이 절은 정조(正祖) 10년(1780)판 울산읍지(蔚山邑誌)를 보면 문수암(文殊庵) 남쪽 3리에 있는데 '신라왕의 소창'이라 하여 그때까지는 절이 있었다 전한다. 이러한 사유로 인해 그 산은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 불러오다가 지금은 남암산(南巖山)이라 부른다.

또 이 절에는 김신대(金信台)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다하며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편 앞에 든 전설은 전해오기를 왕이 크게 "헐(할) 수 없구나"하고 탄식한 자리를 '헐수정'이라 하였으며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 이름지었다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또한 인근 삼호(三湖)는 본시 삼탄(三灘)이라고도 했는데 경순왕이 동자가 사라지자 세 번 탄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지금의 삼호(三湖)라는 이름은 삼호(三湖), 굴화(屈火), 다운(茶雲)의 호소(湖沼)가 세 곳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무거는 1962년 울산시 남구로 편입되기 전까지 범서땅이었다.

망성(望星) 허(헛)고개

망성이란 지명은 원래 망성(望星) 또는 망승(望僧)이라 하던 것이 1911년에는 망성(望城)이라고 쓰다가 1914년 행정 개편 때 지금의 망성(望星)이라 고정되어 부르고 있다. 글자의 뜻을 음미해보면 이곳의 지대가 높고 숲이 우거져 별(星)만 보인다(望)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러한 자연 조건 외에도 마을 이름에 얽힌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옛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후백제로 하여금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문수보살에 빌어 불력(佛力)으로 국운을 회복코자 제사(祭祀)를 친히 공양하였다.

이때 남루한 옷차림에 한 스님이 나타났다. 이 스님은 "소승도 제사에 같이 참여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간청하였고, 임금이 쾌히 허락하니 말석(末席)에 참석할 수 있었다. 제사를 마친 왕이 스님을 보고 조소하며 희롱조로 "이제 돌아가거든 남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제사에 참여하였다고 하지 말아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도 답하기를 "폐하께서도 남에게 문수(文殊)를 공양하셨다는 말은 하시지 마소서" 하며 몸을 날려 남쪽으로 향하였다.

임금은 아차 놀라며 스님을 따라 나섰으나 도저히 스님에 미치지 못하고 헛 고개에 이르니 스님과의 거리는 자꾸만 더 멀어져 갔다. 왕은 뒤늦게 크게 탄식하며 "이제 다 헛일이로구나"를 부르짖으며 망성까지 달려왔으나 스님(文殊菩薩)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영축산(靈鷲山)으로 사라지고 왕은 정신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한다.

이 전설 뒤로 망성(望星)을 망성(望聖) 혹은 망승(望僧)즉, '성현을 볼뿐이다.' '스님을 볼뿐이다'라는 뜻으로 불렀다 전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경순왕이 문수보살을 몰라봄을 탄식하며 "이제 헛일이로구나"하였다 하여 허고개, 혹은 헛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지인(知人)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버렸구나 하여 지지(知止)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지잔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이 가파르고 험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같다.

두동면(斗東面)의 은편(銀片)과 범서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이곳에는 신경통, 요통에 탁월한 효험을 본다는 소문난 '지잔물탕'이 있다.

은을암(隱乙岩)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에 관한 전설이 깃든 작은 굴이 있는 바위를 말한다. 설화에 따르면 당시 불모로 잡힌 왕제(王弟)를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난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느라 세 딸과 동해가 훤히 건너보이는 치술령(두동)에 올라, 남편이 순국하였다는 부음을 접하자 이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자, 이어 두 딸도 함께 목숨을 끊었다. 이어 시신은 곧 그 자리에 화석이 되어 망부석(望夫石)이라 이름 지어졌고, 이때 부인 김씨의 혼이 혼조(魂鳥)가 되어 망부석 남쪽 십여 리 쪽 바위틈에 날아가 숨었는데, 이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한다. 은을암(隱乙岩)은 박제상 모녀의 혼조(魂鳥)가 마지막으로 들어간 동굴인데, 이 곳은 해발 602m의 국수봉 정상 바로 아래인 범서읍 척과리 산152번지에 있다.

동굴 바위 앞엔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조그만 신라 고찰이 있다. 이 사찰은 나중에 김씨 부인 모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 지어졌다고 전하는데, 은을암(隱乙岩) 동굴 입구엔 국수봉은을암용왕각(國守峰隱乙庵龍王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누각이 있다. 이 굴은 넓이가 1.25m, 높이 1.8m, 깊이 8m로 되어 있다. 이 굴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데,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나 울산 근교에서 불교 행사가 열리면 이곳의 물을 가져다 차를 끓여 손님을 대접한다고 한다. 현재 이 은을암(隱乙庵)에는 굴을 불자들의 기도처로 만들어 놓아, 많은 불자들이 촛불을 켜놓고 예불을 드리기 때문에 굴 입구가 지저분한 편이다.

지금은 척과쪽에서 두동면 비조(飛鳥)로 넘어가는 임도(林道)가 나 있다. 이 임도를 따라가면 박제상의 유적지인 두동면의 치술령( 述嶺)의 망부석(望夫石), 치산사( 山祠), 신모사당(神母祠堂)과 이어진다. 특히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1997. 10. 9)로 지정된 치산서원( 山書院)은 조선 영조 때 지어졌으나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어 제사 지내며 후세들의 충정교육장(忠貞敎育場)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만고충신 박제상과 부인에 대한 기록은 후세까지 우리 고장 사람들에게 큰 자부심과 아울러 감동적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다.

망부석(望夫石)을 찾은 조선시대 점필제 김종직(金宗直)의 한시(漢詩) 한 구절을 소개한다.

【해설】

치술령 꼭대기에서 일본 땅 바라보니 하늘 닿은 물결이 끝이 없도다
내 님은 떠날 때 손만 흔들어 주시더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끊겼도다
길고 긴 이 이별이여 죽어서나 살아서나 서로 만날 날 어찌 있을 건가
하늘보고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열녀기상 천년토록 푸른 하늘 찌르리라

어사암(御史巖)과 원고개

때는 조선(朝鮮)말기였다고 한다.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다운동의 다전(茶田:옛 범서) 마을에는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 장군의 5세손 서달급(徐達伋)이 다산사(茶山祠)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하로부터 급한 기별을 접하였다. 구리미(雲谷) 마을을 지나가는 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풍채나 거동이 아무리 보아도 보통 선비와는 다른 비범(非凡)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도호부사의 머리에는 번개처럼 스치는 한 육감(六感)이 있었다. 급히 걸음을 재촉하여 난곡(蘭谷)마을로 빠져 나와 다시 발길을 돌려 구루미(雲谷)마을에 들어서니 큰바위 위에서 준수한 용모의 한 나그네가 발길을 멈추고 쉬고 있는 중이 아닌가!

도호 부사는 스스럼없이 그 길손 앞에 나아가 정중히 인사하고 성내(城內)로 정중하게 길을 안내하였다 한다. 뒤에 알았지만 역시 그 길손은 암행어사(暗行御史)였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로는 고을 백성들은 그 길손이 쉬어간 바위를 일컬어 어사암(御史巖)이라 불렀고, 도호부사가 길을 질러갔던 곳(지름길)을 원님께서 가신 지름길이란 뜻으로 '원고개'라 불렀다.

이 어사암(御史巖)은 높이 4m 직경 약 3m 정도 되는 바위로 10여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바위였으나 지금은 메워져 그리 높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나가소(羅哥沼)

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예로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이다.
중구 다운동의 다전마을의 낙안산(落 山) 자락 아래 나씨(羅氏) 일족이 큰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한다.
당시 태화강은 현재와는 달리 범서읍 백천에서 굴화 앞을 지나 삼호마을의 남향으로 흘렀다 한다. 나씨들이 살던 이곳은 강변마을이고 보니 넓고 기름진 땅이어서 대대로 윤택하게 사는 복된 고장이었다. 이렇게 풍요로운 마을이면서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관문성을 통해 동래(東萊)로 가는 길목이니 과객들의 출입이 잦았다.

어느 날 해질 무렵 석양을 받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던 한 노인이 이 마을을 찾아들었다. 삿갓을 눌러쓰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이 노인은 옷조차 매우 남루하여 겉으로 보아 걸인의 행색이었다. 이 노인은 마을에서 가장 큰집인 부잣집을 골라 대문간에서 주인장을 찾았다.

"주인장 계시오? 주인장 계시요?"하고 주인을 찾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목을 가다듬어 다시 주인을 찾아 불렀더니 이윽고 하인이 나타나 누구를 찾으시느냐고 물으니 노인은 "길가는 나그네인데 주인장을 좀 뵙고자 한다"고 전하니 조금 기다려라 하고 하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리는데 바깥주인이 나타났다. "누구시길래 이 석양에 사람을 찾소?"

"예, 이 사람 월성(月城)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손인데 그만 해가 저물기에……"하며 말끝을 힘없이 흐렸다. 그러자 주인은 "해가 저물었는데 어찌하자는 거요?" 하며 되묻는 말이 아주 언짢은 눈치였다.

노인은 다시 사정 조로 말했다.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 헛간이라도 하루 밤 머물 수 없겠소?" 하니 주인은 다시 짜증스럽게 답하였다.

"우리 마을을 찾는 사람이 당신 하나 뿐인 줄 아시오. 손님들 때문에 우리 마을은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서 못살겠소, 제발 손님 좀 없는 곳에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소원이요." 하고는 퉁명스럽게 안으로 들고 말았다. 사정한 보람도 없이 문전박대를 당한 노인은 하는 수없이 다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무거(無去)에 이르러 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쉴 수 있었다.

이튿날 동이 트자 이 노인은 다시 주막을 나서서 영축산(문수산)으로 올라가 북쪽을 이윽고 살피더니 한동안 침묵하였다. 노인에게 강 건너 아담한 나씨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래 등 같은 큼직한 기와집들의 아담한 이 마을은 한눈에 부자촌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한동안 건너편의 나씨촌(羅氏村)을 바라보던 이 노인은 아무 말이 없더니 드디어 무슨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더니 들고 있던 지팡이로 구영동( 營洞:현 九英里) 앞에서 배리끝을 거쳐 그 마을 쪽으로 크게 선을 긋고는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갑작스럽게 서쪽하늘에서 시커먼 구름덩이가 덮여오더니 진종일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졌다.
밤새 쏟아 부은 폭우는 그 이튿날 새벽녘에 와서야 겨우 멈추었다. 날이 밝아서 보니 곳곳에 산사태와 변해버린 물줄기로 인해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이다. 성난 태화강은 배리끝에서부터 나씨 마을을 삼키고 지금과 같은 강줄기로 변했고 그 부자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큰못이 생겨 있었다. 그 뒤 고을사람들은 나씨들이 다 망하고 그 영화 역시 다 끝났는데 이 모든 결과는 그 노인의 소행이라 하였다.

그 뒤로 사람들은 못(池)으로 변해버린 이 나씨촌을 나가소(羅哥沼)라 하여 지금도 전해오는데 범서와 다운쪽 사람들은 '난간소'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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