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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신(靈鷲山神)변재천녀(辯才天女),보현수,문수고개

울주군 청량읍 율리(栗里)에 영축산(靈鷲山)이 있다. 이 영축산(靈鷲山)은 문수산(文殊山)의 바로 동록(東麓)을 일컫는 산으로 이 산은 신라 때로부터 불교의 성지(聖地)로 그 이름이 높았던 산이다.

영축산(靈鷲山)에는 신라 때의 영축사(靈鷲寺)를 비롯하여 혁목사(赫木寺), 망해사(望海寺)등이 자리잡고 있던 산이다. 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때의 이승(異僧), 낭지대사(朗智大師)와 원성왕(元聖王) 때의 연회(緣會)대사도 이 산에서 은거했다. 그 뿐 아니라 추동기(錐洞記)를 지은 지통(智通)대사도 신오(神烏)의 가르침을 받아 이 산을 찾아가서 낭지(朗智)대사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5권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조(條)에 울산의 영축산(靈鷲山)과 인도(印度)의 영축산(靈鷲山)은 다 같이 제10법운지(法雲地)로서 보살이 살던 곳이라 하였다. 본래 이양공(伊亮公)의 심부름꾼이었던 지통(智通)이 출가하여 불문에 들어갈 때 까마귀가 날아와서 울며 계시하여 영축산(靈鷲山)에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라 함에 그 산을 찾는 지통에게 보현대사(普賢大師)가 나타나서 그에게 계(戒)를 베풀고 숨어버렸다. 보현대사라 함은 보현보살로서 문수사리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의 협사(脇士)가 되어 여래의 오른쪽에 모시고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았고, 또 중생(衆生)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음으로 보현연명보살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의 기록에도 벼슬이 싫어서 이를 피하려는 고승(高僧) 연회(緣會)를 야유하여 문수보살이 영축산(靈鷲山)에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의 보처로서 왼쪽에 모시고 지덕(智德), 체덕(體德)을 맡았다.

영축산(靈鷲山)은 본시 인도에 있는 산으로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은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곳으로 신선(神仙)들이 살았고, 또, 독수리가 많이 날아 왔다 하여 영축산 또는 축두(鷲頭), 축봉(鷲峰), 축대(鷲台)라고도 하였다. 또, 많은 축령(鷲靈)들이 산 위에 있으므로 이름한 것이라고 하며, 혹은 산의 모양이 수리의 머리와 비슷하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라 한다.

인도의 영축산(靈鷲山)을 위에서 살펴보았거니와 청량의 영축산(靈鷲山)도 역시 불교의 성지(聖地)라는 뜻에서 이름지어진 산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위에서 든 여러 문헌들이 말하여 주고 있다. 영축산(靈鷲山)의 축(鷲)은 수리이며, 이 수리는 상(上), 고(高), 신(神)등을 뜻하고 있는 고어(古語)이다.

그런데 이 영축산(靈鷲山)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울산의 읍지(邑誌)가 문수산의 동록이라 하였거니와 생각해 보건대 신라에서 고려까지는 문수산 전체를 영축산(靈鷲山)이라 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하며, 일명 문수산이라 불리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영축산(靈鷲山)에는 이 산의 산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주(山主)가 있었으니 즉 변재천녀(辯才天女)이다. 이 변재천녀(辯才天女)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거니와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조(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삽양주 아곡현(阿曲縣-河曲縣)의 영축산(靈鷲山)에 이승(異僧)이 있어 암자에서 거주한 지 여러 해가 되어도 향읍에서는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도 또한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여 신통력(神通力)이 있었다.」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승려 지통(智通)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양공(伊亮公) 집의 종이었다.

머리를 깎고 불가에 출가하던 7세 때에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와서 울며 말하기를 「영축산(靈鷲山)에 가서 낭지대사(朗智大師)의 제자가 되라」하였다. 지통(智通)이 이를 듣고 그 산을 찾아가서 마을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더니 홀연히 한 이인(異人)이 나타나 이르되 나는 보현대사(普賢大師)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 하고, 계(戒)를 베푼 후 숨어 버렸다.

그로 인해 지통(智通)은 심신이 활달하여 지고, 지각 또한 곧 원만하여 졌다. 그는 다시 길을 가다가 중도에서 한 중을 만나 낭지대사(朗智大師)가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그 중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바로 낭지(朗智)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법당 앞에 까마귀가 와서 아뢰기를 “성아(聖兒)가 장차 대사에게 올 터이니 정중히 나아가 맞이하라”하므로 오기를 기다려 정중히 맞이하니 감탄하여 말하기를 “영오(靈烏)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 오도록 하고 또 나에게도 아뢰어 너를 이 자리에서 맞이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祥瑞)로운 일인가. 아마도 산령(山靈)의 음조(陰助)인 듯하다.”이로써 마을의 나무를 보현수(普賢樹)라 이름하였다하며 율리(栗理)에는 지통골이란 마을이 있다. 전해오기를 산주(山主)가 변재천녀(女)임은 다음 기록에도 나온다.

「고승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축산(靈鷲山)에 은거하여 매양 법화경(法華經)을 읽으며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으니 뜰에 있는 못에 연(蓮) 두어 떨기가 있어 사시(四時) 시들지 아니하였다. 원성왕(元聖王)이 그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國師)를 삼고자 하였다. 연회(緣會)가 듣고 이에 암자를 버리고 도망하여 서령(西嶺) 바위 사이를 넘어가니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묻기를 “어디를 가는가”하였다. 연회(緣會)가 답하여 “나라에서 함부로 듣고 작(爵)으로서 나를 얽매어 두려 한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몸을 피하려 한다”하였다. 그 노인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여기서 장사할 만하니 왜 수고롭게 멀리 가려고 하는가. 사(師)야 말고 매명(賣名)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겠다”하였다. 연회가 이는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 하여 듣지 않고 수리(數里)를 더 나아갔다.

그는 계곡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묻기를 “사(師)는 어데로 가느냐?”하기에 답을 처음과 같이 하니 또 노파가 말하기를 “앞서서 사람을 만났는가?”하였다. 연회(緣會)가 답하되 “한 늙은이가 있어 나를 너무도 없수이 여기므로 불쾌해서 왔다”고 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그는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아니하였는가”하니 연회(緣會)가 듣고 놀라서 급히 그 노인에게로 찾아가서 이 말을 하고 뉘우침을 말하며 가로되 “성자의 말을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방금 돌아 왔나이다. 그런데 그 시냇가의 노파는 어떠한 사람입니까”하니 노인이 답하여 그는 변재천녀(辯才天女)이라 말을 마치자 숨어버렸다. 」 대사가 노인에게 감동한 곳을 문수고개라 하고 변재천녀를 만난 곳을 아니고개(阿尼岾)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영축산(靈鷲山)의 기록을 통해서 영축산(靈鷲山)의 산신이 변재천녀(辯才天女)이며 음조(陰助)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변재천녀(辯才天女)는 대변공덕천(大辯功德天) 변재천(辯才天), 미음천(美音天), 묘음천(妙音天)이라고도 하는 여신으로서 이 여신은 노래, 음악을 맡은 여신으로 걸림 없는 변재를 가져 불법(佛法)을 유포하며 사람의 목숨을 길게 하고 원수를 쫓아내고 재산이 늘어나게 하는 이익을 준다. 변재천녀(辯才天女)의 형상은 머리에 흰 뱀으로 장식된 보배관을 쓰고 오른손에 칼을 왼손엔 보배 구슬을 들고 있다. 이러한 변재천녀(辯才天女)는 영축산(靈鷲山)의 산신으로서 치술령의 치술신모와 계변천신(戒邊天神)과 더불어 울산을 지키고 울산인을 복되게 한 신이다.」

무거(無去)와 김신암(金信庵)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때의 일이다.
천년에 가까운 화려하고 번영의 극치를 자랑하던 신라도 말세에 들어와서는 귀족지배 계급들의 분열과 또한 사치에 젖은 문약으로 그 국토는 경주 일원으로 줄어들고 후백제의 군대가 신라를 침입하여 마침내는 경애왕(景哀王)이 고려 태조에 구원을 청했더니 고려 태조는 강병 1만으로 구원케 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정세도 잊은 채 고려의 구원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은 포석정에서 환락에 잠겼다가 쳐들어 온 견훤의 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견훤의 손에 의해 새로이 세워진 임금이 경순왕(敬順王)이었다. 경순왕도 운수가 다 되어 이미 기울어지는 사직을 바로 잡을 기력이나 능력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였다. 또, 조야의 국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 같은 사람도 나라의 운명이란 하늘에 달렸거늘 어찌 천년 사직을 헛되이 할 것인가 하였으나 그 주장도 나라를 바로 잡는 데는 이미 힘이 되지 못하였다.

이 때 경순왕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축산(靈鷲山)의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계시를 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태자와 둘째 왕자를 거느리고 하곡현(河曲縣)의 영축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먼저 태화사(太和寺)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 길가에서 한 동자승(童子僧)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고 하였다. 왕은 다행으로 생각하고 크게 만족하여 길을 따랐다. 그러나 삼호(三湖)앞에서 태화강(太和江)을 건너자 얼마가지 아니하여 동자승(童子僧)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은 직감에 이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여 크게 탄식하며 이제는 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래서 왕은 발길을 돌려 월성에 환궁하여 사방의 땅이 다 타인의 소유로 돌아가고 나라의 힘은 약하고 쇠퇴하여 다시 일으키지 못함을 통탄한 나머지 고려 태조에 항복하기를 꾀하였다.

이 때 군신들의 의논은 제각기 찬반이 엇갈렸다.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 말하되“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 오직 나라 사랑하는 여러 충신들과 함께 민심을 크게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말할 것이나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다른 나라에 내 줄 것이랴.”하였다. 왕이 한숨 지며 말하되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아 형세는 이미 능히 온전할 수 없으니 이왕에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죄한 백성들을 참혹히 죽게 하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하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어 귀부를 청하고 말았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皆骨山-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그 생을 마치었다. 또, 둘째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니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法水)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문수산(文殊山) 남쪽 산에 절을 지어 여기에서 살았으니 그 절 이름을 김신암(金信庵)이라 하였다.

이 절은 정조(正祖) 10년(1780)판 읍지를 보면 ‘문수암’ 남쪽 3리에 있는데 ‘신라왕’이 ‘소창’이라 하여 그 때까지는 절이 실존하였다. 그 절로 말미암아 그 산명을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 불러오다가 지금은 남암산(南巖山)이라 한다. 또, 이 절에는 김신대(金信台)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은 청량읍 율리 지역이며 김신암이 있던곳에 현재 성불암이라는 사찰이 있다. 한편, 앞에 든 전설에 의해 왕이 크게 탄식한 자리를 ‘헐수정’이라 하였으며, 동자가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 하여 무거동(無去洞)이라 하는 지명이 이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설은 한편으로는 『삼국유사』의 진신수공(眞身受供)과도 같이 전해온다. 또, 이 전설의 주인공을 가르쳐 무거 인근의 늙은이들은 「짐부대왕」이라 하나 이는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이름인 것이다.(자료 : 울산지명사)

대마도주등(對馬島主嶝)

대마도주등(對馬島主嶝)에 관한 전설은 오래 전부터 울산에 퍼져 있는 이야기이다. 과거 청량읍 두왕동(斗旺洞)에 있는 이 산등(山嶝)은 동해남부선의 철로와 접하여 바로 그 서편에 남으로 면하여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7∼8기의 묘지로 되어있다. 이 대마도주등에 관한 내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울산시 두왕동에 감나무진(枾木津)이란 곳이 있다. 오래 전부터 외황강(外隍江)에는 9개 나루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의 한 나루가 이 감나무진이며, 이 나루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대나루(大津)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감나무진의 나루터는 울산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였기에 자연히 사람의 왕래도 있어 여기에 주막이 생기고 행인의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

때는 고려(高麗) 때였다. 울산시 두왕동(斗旺洞) 당랑끝(九男田峙)에 9남아를 둔 김(金)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랑끝은 이 김씨가 9남아를 데리고 살았다 하여 일명 구남밭티(九男田峙)라고도 불리었는데 하루는 불행하게도 친상을 당하여 상재의 몸이 되었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였던 그는 묘터를 구해 보았으나 살림살이가 궁색한 터라 쉽사리 마음에 드는 자리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집가에 토롱이라고 하는 가장을 하여 두고 좋은 묘터가 구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세월이 지나가던 중 하루는 꿈에 백발의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네가 너의 아버지의 좋은 유택(幽宅)을 얻으려거든 배암골 감나무진에 있는 객주(客酒-여관)집을 찾아가서 그 집의 머슴이 되라.”하고는 어디론지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이 꿈에서 깨어난 김씨는 한 동안 어리둥절하다가 망설였다. 아버지의 초상도 치르기 전에 또 남의 집의 고용살이를 하라 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이 이상하였다. “좋은 유택(幽宅)을 얻으려거든 배암골 감나무진으로 찾아가서 머슴이 되라” 이 말을 다시 생각하면서 집안을 정리하고는 불과 1km도 안 되는 감나무진 객주 집을 찾아가서 간신히 그 집의 머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어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아버지의 묘터 구하는 일념에 젖어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한 상재가 어떤 풍수 같은 사람을 데리고 이 객주 집을 찾아 투숙하면서 수일 동안 근방 산천을 두루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동정을 알게 된 김씨도 자연 그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하루는 두 사람이 소곤거리더니 밤중인데 김씨를 불러 계란 두 개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때 김씨의 머리에는 어떤 육감이 번개같이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계란 두 개를 구한 김씨는 이 계란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다시 찬물에 식게 하고는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 뒤에 김씨는 잠이 들어 한 동안 자고 있었는데, 또 전일의 백발노인이 나타나더니, “네가 이렇게 잠이 들어 있을 때가 아니니 빨리 일어나라.” 하고는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이 노인의 말에 깜짝 놀란 김씨는 벌떡 자리에서 깨어나니 밖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는지라 살그머니 살펴보니 상재와 풍수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김씨도 살짝 나서서 그 두 사람의 뒤를 멀리서 뒤따라가니 불과 얼마가지 않은 한 산등(山嶝)에 이르러 두 사람은 땅을 파고 무엇인가 묻고는 일어서서 다시 객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를 본 김씨도 지름길로 먼저 돌아와서 자리에 들었다.

이윽고 새벽 동이 틀 무렵에 두 사람은 다시 그 산등으로 가서 밤중에 와서 무언가 묻었던 자리를 다시 파면서 고개를 저으며 크게 의아한 몸짓을 하면서 “틀림없을 텐데.”라고 몇 번 연발하더니 객주로 돌아와서는 그 길로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손들이 떠나고 난 뒤 김씨는 생계란 두 개를 초저녁에 그 산등을 찾아가서 묻어두었다가 밤이 샐 무렵에 다시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서 계란 한 개가 부화하여 닭이 나래를 치며 목을 쭉 빼더니 꼬곡꼭꼬 하고 크게 우니 온 산천이 새벽의 적막을 깨고 메아리쳤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김씨는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드렸는데 그 묘는 평토장(平土葬)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이 김씨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 고려에 벼슬하다가 대마도(對馬島)로 건너가 아비루(阿比留)를 멸망시키고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되니 이 사람이 바로 소오씨(宗氏)라는 것이다. 이 후로부터 김씨의 아버지 묘가 있는 산등을 대마도주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의 이름도 이와 관련지어 도왕동(道王洞)이라 하다가 임금왕자를 쓰는 것은 왕을 거역한다 하여 왕성할 왕(旺)자로 고치고 길 도(道)자 대신 말 두(斗)자를 사용하여 오늘의 두왕동(斗旺洞)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주였던 소오씨가 과연 이러한 전설에 나타나는 대로 김씨의 후손인지는 상당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마도의 향토사 연구가 나가도매히사애(永留久惠)의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섬 고대사의 열쇠 쓰시마』에 의하면 1246년이 저물 무렵 고래무내시개히사(惟宗重尙)가 군을 이끌고 대마도로 건너와 이듬해에 아비루(阿比留)를 멸하고 섬의 실권자가 되니 이 사람이 소오(宗)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고래무내시개히사의 선대에 관하여도 해이개(平家)의 일족이라 하였으며 매이지(明治)때에 이르러 이들은 스스로 안도구댄노오(安德天皇)의 후손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료들을 미루어 보아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은 의문이 많으나 사실 대마도주등에 관한 전설은 우리 측보다도 일본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왔으니, 토호(土豪)인지, 그렇지 않으면 기수슈우(九州)나 이기(臺岐)섬과의 관계가 있는 이야기인지 더 연구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내에 있는 김씨의 후손들을 살펴보면 울산시 상개동(上開洞)에 10여호 살다가 지금은 흩어져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야기의 분묘도 팔괘형(八卦形)의 석조물이 있었던 것을 해방 후 청량지서(靑良支署)의 방축벽을 쌓을 때 이 묘석을 가져가서 쌓은 까닭으로 지금은 석축물은 볼 수 없고 평장묘만 남아있다.

또, 일설에는 1910년경에 일본 사람이 이 근처에 배미골이 있느냐고 찾아온 일이 있고 비석도 만들어 가지고 왔으나 묘를 찾지 못하고 물 속에 던지고 되돌아갔다는 말도 전해진다.(자료 : 울산지명사)

수구못(樹溝池)

처아주 먼 옛날 동내 초군(草軍)들 여러 명이 풀 뜯으러(草刈作業) 바지개를 지고 들곡 위로 서서히 올라가니 수구못(樹溝池) 안에서 목욕하는 인적(人跡)이 들리기에 이 초군들이 숲 사이로 음신(蔭身)하여 몰래 보니 동리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색다른 젊은 선녀(仙女)같이 보이는 난생 처음 보는 미인 중의 미인들인지라, 그 중 노총각 한 사람이 숲 속을 몰래 기어가 목욕하는 선녀의 옷 한 벌을 몰래 숨겨놓고 동행한 초군들과 같이 그 자리를 피해 은신하였다. 그랬더니 돌연(突然)히 하늘에서 우루루 뇌성(雷聲)이 치더니 천상(天上)에서 용마(龍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하는 선녀들을 말에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선녀 중 한 사람이 옷이 없어 같이 가지 못하고 낙오가 되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것을 본 노총각이 선녀에게 접근하여 숨긴 옷을 내어주고 선녀를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꾀어 동거(同居)하게 되었는데, 수년(數年)이 지났으나 임신(姙娠)이 되지 않아 큰 바위 밑에 촛불을 켜놓고 공(恭)을 드렸으나 내내 허사(虛事)가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더니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번쩍거리며 폭우(暴雨)가 쏟아져 냇물이 범람하는 중에 하늘에서 용마가 내려와 그 선녀를 태우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옛날 목욕하던 못이 그 후 큰비로 못 둑이 무너져버린 형태가 있고 노총각과 선녀가 누워 잤다는 골짝을 누분숙곡(臥宿谷)이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린 바위를 불선바위, 하늘 장수가 말을 타고 내려왔던 말발굽 자국과 장수의 발자국이 들반석 바위 위에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신방을 차릴 때 금비녀를 꽂아준 장소를 비녀농골이라고 불리우며, 하늘 장수가 용마를 타고 내려올 때인지 올라갈 때인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비녀농골 산너머 고랑숙골 안마굼치 폭포수 바위 위에도 장수와 말 족적(足跡)이 뚜렷이 남아있다.

처용설화

처용설화(處容說話)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설화이다. 신라(新羅)의 제49대 헌강왕(憲康王) 때의 일이었다.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은 다 자기 생업에 힘을 다하여 신라(新羅)의 영화가 계속될 때였다. 헌강왕(憲康王)은 측근을 거느리고 울산의 바닷가에까지 왔다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운무가 덮쳐 지척을 분별 못하는 천변(天變)을 당하게 되자 같이 있던 일관(日官)의 조언에 따라 용(龍)의 조화임을 깨닫고 그를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되자 동해용(東海龍)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기이한 의복과 형상으로 어가 앞에 나와 춤추며 왕의 성덕을 찬미하여 그 가운데 한 아들을 임금에게 바쳐 따르게 하여 서울에 돌아가서는 왕정을 보필토록 하니 이가 바로 처용랑(處容郞)이다. 왕은 처용(處容)이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미녀로 하여금 아내를 맞이하게 하니 그 아내의 아름다움을 탐낸 역신(疫神)과의 사이에 사통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밖에서 돌아와 이 꼴을 보고도 노하지 않고 달밤에 춤추며 노래부르니 이 노래가 이름난 처용가라고 하는 향가(鄕歌)이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려 노니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해인고,
본대 내해다만은 뺏겼으니 어찌하리꼬.

역신(疫神)은 뜻밖의 관용에 감복하여 맹세하기를 금후로는 공(公)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는 나라 사람들이 처용(處容)의 형상을 문에 그려 요사한 귀신을 쫓았다. 또, 왕은 서울로 돌아와서 동해용과의 약속대로 좋은 터를 영축산(靈鷲山)에 골라 절을 짓게 하였으니 이 절이 망해사(望海寺)로 일명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하였다.

처용(處容)에 관한 일은 이러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전해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1 신라본기(新羅本紀) 헌강왕(憲康王)조에「…3월에 왕이 국동 주(州) 군(郡)을 순행할 새 어디서 온지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노래 부르고 춤추었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이 괴이하여 시인(詩人)이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고기에는 왕 즉위년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헌강왕(憲康王) 5년(879)의 일이다.

헌강왕(憲康王) 시대에 신인(神人)이나 용이 왕의 어가(御駕)앞에 나타나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는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 조의 처용설화(處容說話)와 남산신화(南山神話), 북악신화(北岳神話) 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남산신화(南山神話)는 경주(慶州) 포석정에서 있었던 일이며, 북악신화(北岳神話)도 경주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에 갔을 때의 일임으로 이 모두 처용(處容)에 관한 이전(異傳)으로 믿어진다.

『동국여지승람』 경주부고적(慶州府古蹟) 월명항(月明巷)에도 처용(處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금성(金城) 남쪽에 있다.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蔚山)에 유람하고 개운포(開雲浦)에 이르니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형상과 괴상한 의복으로 임금의 앞에 나아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임금의 덕을 찬미하였다.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이름짓고 밤마다 시가(市街)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나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神)이라 하였고 그가 가무 하던 곳을 뒷사람들이 월명항(月明巷)이라 이름하였다. 인하여 처용가와 처용무를 만들어서 가면(假面)을 쓰고 연출(演出)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자료 : 내고장의 精氣)

문수산 명포수

저어 박씬데 여어 문수암(文殊庵), 저어 보연암, 배이내라 카는 데가 있는데, 문수산(文殊山)에, 저 그 배이내라 쿠는 데가 고 인자 산 이름인데, 문수산에, 문수산에서 고 인자 저어 북쪽으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가몬 배이내라 쿠는 데가 있는데, 거계에 그 사람들이 그 인자 살았다는데, 그 삼형제가 사는데, 삼형제가 다 큰 포수라.

그 인자 큰 포순데, 그 마 전해 내려오는 말이 범 보몬, 평소에 위습은(우수운) 기 범 보몬 우습고, 술 보몬 우습고, 두가지 밖에 우습운 기 없다 쿠는 기라. 범이 딴 사람 보몬 범을 겁을 내는데, 이 사람들은 범만 보몬 웃음이 나온다 이기라. 그만큼 범 잡는 거로 숩게 여긴다 이기지요.

그래 인자 하루 저녁에는 저녁을 묵는데, 총을, 예전 엽총 그거 인자 화약 달아가지고 화약에 불로 붙이가지고 인자 밑에 그 인자 요새 뇌관이지요. 뇌관 거어 불로 붙이몬 총알이 나가지. 나가고 이렇는데, 총을 인자 구석에 인자 방 구석에 이리 떡 세와 놓고 저녁을 물라 카이(먹으려 하니) 총이 쨍쨍 운다 말이지. 총이 울며는 반다시 그 산에 큰 짐승이 왔다카는 거로 증명을 한단 말이지요.

그래 인자 저녁을 묵고 총이 우니 틀림없이 큰 짐승이 왔다. 큰 짐승은 범을 큰 짐승이라 이라는데, 그래 인자 이식해가지고(밤이 깊어서) 문수산을 한 바꾸 빙 둘러, 혼자 둘러가 나가이, 문수산 앞에 그 인자 큰 칭암이 있는데, 그 인자 범굴도 있고 마 요새도 범굴이라 카는 데도 있고 마 이렇거만요.

그래 인자 그 문수산 칭암 밑으로 내려오이 거어 밑에 보니까네 ‘으응’캐 쌓고 이래 쌓는 데 보이 범이 마 사람을 하나 업어다 놓고 사람을 어루는데, 그래 인자 그런 거로 보고 인자 차차 잡을라고 인자 자꾸 곁으로 인자 가차운(가까운)데로 자꾸 찾아갔다. 찾아가 보이 여잔데, 마 뫼등에, 언제든지 그런 짐승들이 사람을 잡아무을 적에는 뫼등에다 갖다나 놓고 잡아묵는다 쿠는데, 뫼등에서 마 사람을 갖다가 마 양발로 가지고 이발로 가지고 이쭉으로 땡긴까네 이리 툭 구부리지몬‘응’쿠고 일라서니까네 이쭉 발로 또 이죽으로 땡기니까네 이쭉으로 구부라지고. 그래 마 가만 같에 기이 들가가지고, 그러니까네 총을 쏘몬 맞을 죽을 거리로 인자 갔다 말지요. 그래 마 탁 쏘이 이 범이 큰 마 그리 소술디마는(솟구치더마는) 소술디마는 마 널찌가(떨어져셔) 죽는데, 그래 마 범은 잡아 놓고 그래 사람을, 인명을 구해야 되니까네, 보이 마 여잔데, 업고 자기 집으로 갔다 말이요.

집에 오니깐 사람은 벌어(벌써) 실신이 돼가지고 가히 죽으는 거 한 가지고 이렇는데, 그래도 사람을 마니 보이 따따하이 이래 가지고, 그래 인자 물로, 끓이가지고 이리 디루고(먹이고) 이래 쌓이 정신을 채렀는데. 이 인자 정신을 채리고 며칠 있다가 그 연유를 물으니까네, 저어 저 저 목도 카는, 목섭 카는 데가 있거만. 울산 저기 가몬 목섭 카는 덴데. 거기서 여어 거리가 그래도 아무래도 한 50리도 넘죠. 50리도 넘는데, 저녁 묵고, 처잔데, 시집갈라고 날 받아 놓고 이런 처잔데, 저녁 묵고 머리를 감다가, 머리로 감다가 마 범인데 업히가 와가지고 문수산에 여 와가지고 그 인자 호식할 지경이 됐는데, 명포수를 만내가 살았다고. 살고, 살아가지고 그 인자 자기 집에 델고 가가지고 예를 치르고 이랬다 카는데, 그래 인자 우리 요기 보몬 명포수 박포수라고 있는데, 그 집에 인자 자손들이 요새는 덕하 저어 가가지고 사는데, 아직까지도 포수를 하는데, 우리 울산서뿐아니라 전국적으로 명포수라고, 명포수라고 할 수 있지. 짐승을 참 잘 잡거만.

영축 소혀바위

길가에 댕기는데(다니는데), 그 소쎄바우라고 하나 있었구만. 바우가 지다란 기 [손을 내밀면서] 이리 질가에 쑥 나와 있는데, 그 바우로 길에 쑥 나와 있는데. 그 바우로 길에 걸거친다고 석수밭이로 대가시로 반튼(반은) 깰라고 그래 이리 하니까네, 거기 소가 못 오더라는 기라. 그래가 돌로 못 깨고 그냥 둔 배가 있는데, 고거 한 가지, 우리 고오 전설이 되가 있는데.[조사자 : 소를 데리고 이리 가가지고 맬라고 하는데 소가 안간다 이 말이지요?] 어언데요(아니). [부정하고는] 그 바우가 질에 걸거친다고 깰가고 하이 소가 못 오더랍니다. 그래가 텍이 그 바우를 못 깨고 요(이렇게) 금을 딱지아 놓고 있구만. 똑 소 쌔겉이(혀같이) 생겼구만, 바우가 질가에 쑥 내밀어 논 기. 그 영축하는 동네가 여내(알다싶이) 소 축짜(丑字)로 씌구만, 영축 마실 이름이. 마실 이름이 내나(알다시피) 영축이라고 씌구만.

현대문

여기 길가에 '소혀바위'라고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위가 길어서 길가에 쑥 나와 있는데 옛날에 그 바위가 길에 길게 나와 사람에게 걸린다고 석수를 데려와서 바위의 반을 깨려고 하니깐 거기에 돌을 깨는 소가 못 오더라고 하였다. 그래서 돌을 못 깨고 그냥 둔 바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 마을 전설의 한 가지로 되어 있다. 그 바위를 못 깨고 바위를 깨기 위해서 금만 그어 놓았는데 그것이 똑 소 혀같이 생겼다. 그래서 영축이라고 하는 동네의 축자가 소 축(丑)자를 쓰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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