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면

사람이 희망인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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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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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고개

신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경순왕(敬順王)은 부처님의 힘을 얻어 나라를 유지해 보려고 임금이 친히 공양하는 제를 올리고 있었다.

이때 차림새가 남루한 한 비구승이 찾아와서 꾸부리고 청하기를 “소승도 같이 제하기를 바라나이다”하니 임금이 허락하여 말석을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제가 끝날 때 왕이 희롱삼아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중이 답하되 “영축산(霙蹙山)에 있나이다” 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남에게 국왕이 친공하는 제에 참석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하니 중이 웃으며 “폐하도 진신문수(眞身文洙)를 친견하였다고 말하지 마소서” 하며 몸을 날려 남쪽으로 향하여 갔다. 왕이 놀라서 어가를 달려 그 뒤를 따랐으나 차차 거리가 멀어지더니 허고개에 이르러 더 멀어지는 것을 느끼자 “헛일이로구나! 헛일이로구나!” 하며 탄식하다가 지지(知止)에서 잠시 머물고 다시 뒤를 따라 망성(望星)에 왔으나 멀리 영축산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멀리 영축산을 바라볼뿐이었다. 그 뒤 ‘헛일이로구나’하여 탄식한 곳을 ‘허고개’라 하였으며 왕이 머문 곳을 지지(知止)라 했고 멀리 바라본 곳을 망성(望星)이라 하였다고 한다.

웅치사

신라 제19대 눌지왕은 볼모로 보낸 두 동생 복호(卜好)와 미사흔을 구출하는데 지혜와 용맹을 떨쳤던 박제상(朴堤上)생각에 항상 잠겨 있었다. 어느 해 초겨울 나랏일을 마치고 막 잠을 청하려는 순간 갑자기 대왕의 귓전에 아기의 울음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왕은 가족을 깨우고 문무백관을 불렀다. 밤중에 궁성은 발칵 뒤집히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오도록 숙의를 거듭했으나 대책은 서질 않고 아기의 울음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도 그칠줄 모르는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잠도, 나랏일도, 수라도 들지 못하니 용안은 수척할 대로 수척해지고 온 성안이 들끓고 이름 모를 변고에 대한 추측은 천갈래 만갈래로 난무하여 민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기 울음소리의 정체는 알 길이 없었다.

소문난 점술가도 영험있는 의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왕은 아기 울음 소리를 찾아 보기로 결심을 굳히고 길을 떠났다. 왕의 거동에 아기 울음소리는 한결 부드럽게 들렸는데 그 방향이 틀리면 이상하게도 곡소리가 들리고 다시 방향을 바르게 잡으면 온화한 웃음섞인 아기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찾아 온 곳이 치술령의 중간쯤이었는데 그곳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뚝 그치고 말았다. 왕은 말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 보니 흙을 뒤진 흔적과 금방 만든 것 같은 작은 무덤 하나가 잡혔다. 그 무덤을 보는 순간 그쳤던 울음 소리가 구슬프고 애절함을 더하여 흐느끼며 들려왔다. 왕은 신하들과 같이 손수 그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잠시 파니 솜으로 된 아기 포대기가 나오고 그 속에는 금으로 불상이 나왔다. 불상은 흡사 살아 숨쉬는 아기와 똑같았다.

왕이 그 불상을 가슴에 안으니 울음을 뚝 그치고 서러움에 못 이겨 치수리기 시작했다. 왕은 불상을 어루며 "그래 그래 내가 너의 한을 풀어주마" 했더니 불상의 두 눈에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일행은 그 포대기와 불상을 안고 마을로 내려와 포대기 임자를 수소문하여 찾아냈다. 포대기 임자는 금슬 좋기로 소문난 가난한 젊은 부부였다.

사연은 이러했다. 부부는 눈이 멀고 귀가 절벽인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아들 웅이가 태어났다. 웅이는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줘 행복하기만 했다. 부부가 일터에 나가면 웅이는 할머니와 늘 함께 지냈다. 그 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부부는 틈을 내어 온 산을 뒤지다 시피 하여 송이버섯을 땄다. 어머님 겨울 밥반찬을 하기위해서였다. 평소에도 미꾸라지 한 마리라도 들에서 잡으면 어머님 밥반찬을 해 드리는 지극한 효자 부부였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초겨울에 접어 들면서 송이버섯 말린 것을 볶기도 하고 조리기도 하여 어머님 밥상에 올리는데 어머니 당신은 하나도 드시질 않고 손주만 먹이신다. 눈이 어두워 보이지는 못하셔도 이손 저손 더듬어 손주의 입을 찾아 음식을 먹이곤 하시는데 부부는 딱하기만 했다.

하루 밤에는 부부가 의논을 했다. "우리는 아직 젊지 않느냐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님은 한 번 잃으면 다시는 못보니 …… 우리 저 아이를 없애 버리자"하고 잠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칠흙 같이 어두운 밤에 산에 가서 땅을 파고 묻었다고 했다. 그 갸륵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왕은 이렇게도 착한 백성이 있다는데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부부는 이야기를 마치고 흐느끼기 시작해다. 귀가 절벽이시고 앞을 분간 못하시는 어머님은 며느리가 우는 소리가 전달되었는지 방문을 열으시고 "웅이 깼느냐"하고 소리 치신다. 아들, 며느리는 더 이상 말은 못하고 "어머님…"하고 불러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한다. 왕께서는 대신 "예"하고 대답해 놓고 금불상이 된 웅이를 어머님 무릎에 안겨 주신다. 웅이를 받아 안은 어머님은 이리 둥글 저리 둥글 어루며 좋아라 어쩔 줄 모르신다. 웅이가 없어지는 날부터 어머님은 밥상을 받아 놓으시고 웅이를 찾으셨다. 그 때마다 아들 내외는 웅이가 아직 잔다고 했고 어머님은 웅이가 깨면 함께 먹으마라고 하셨다.

그러던 안타까운 세월이 닷새나 지나 갔고 어머님은 물 한모금 드시질 않으셨다.
그러다가 웅이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워 했겠는가 어머니는 한참을 놀다가 "자! 우리 밥먹자" 하고 밥상을 찾는 순간 웅이를 안고 앞으로 쓰러진다. 어머님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셨다. 왕은 너무나 순박한 서민들의 애환을 한눈에 보고 이 산을 치술령(산에 嶺자를 쓰는 것은 벼슬을 준다는 뜻임)이라 이름지었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어 지고 있다. 그때 왕이 말을 매었던 자리를 말등이라 전하고 있고 웅이가 묻혔던 자리에 웅치사란 절을 지어 오랫동안 웅이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절은 빈대가 너무 많이 생겨 사람이 살지 못하고 허물어졌으며 절터에는 깨어진 기와조각만 말없이 뒹굴고 있다.

왕선달과 축지법

상월평 못 안에는 김성출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의 조부가 한학에 능통하고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구전되고 있다.

이 사람은 시우딤 바위에 거꾸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유자재로 하면서 바위에 붙은 있는 식물을 따왔다고 한다. 또 경주까지 50리 길을 순식간에 다녀오고 목침에다 버선을 끼워서 주문을 외우면 비둘기가 되어 날아갔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느 겨울 이 사람이 얼음이 언 못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죽은 줄 알았는데 언제 못에서 나왔는지 사람들이 마을로 왔을 때는 이미 마을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신기한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다.

여나산곡

허고개를 넘으면 연화산을 등지고 있는 은편리가 있다. 자연마을으로서는 두동면에서 제일 큰 동네다 옛날 이 동네에 여랑(餘郞)이란 잘 생긴 총각이 윗 마을에 살고 나비(那飛)라는 예쁜 처녀가 아랫마을에 살았는데 그때 풍습으로는 남녀가 만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볼 일이었다.그러던 어느 해 따뜻한 봄날,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간 여랑이 바구니를 들고 나물을 캐러 나온 나비를 만나게 되는데 둘은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이튿날 또 그 이튿날 사랑은 깊어만 가고 서로는 만나지 않으면 살지 못할 정도였다. 그 해 봄은 둘만의 봄이었다. 긴긴 봄날도 서로에게는 너무도 짧았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되면서 둘은 만나지 못하게 되어 서로 안타까운 사연만 밤마다 허공에 띄우면서 애를 태우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여랑은 그 해 여름 나라의 부름을 받고 서라벌로 들어가 화랑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여랑은 낮에는 고된 훈련, 밤에는 글공부를 하면서도 하루도 나비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때 화랑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산 좋고 물 맑은 곳을 찾아 심신을 단련했다.

어언 3년이 흐른 후 나비는 장성하여 이 곳 저곳에서 혼처가 생겨나는데 철마다 여랑을 만나러 뒷산으로 갔으나 한 번도 여랑을 만나지 못했다. 도대체 여랑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당시의 사회 관습으로는 처녀인 나비가 여랑을 수소문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나비는 날마다 그리운 여랑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사랑의 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부모님 성화에 못이겨 나비는 사주단자를 보내 놓고 치마끈에 목을 매어 기어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한편 여랑은 화랑 교육의 기초를 마치고 심신단련의 수련기에 들어가게 되어 지금의 두동면 천전리에 머물게 되었다. 화랑들은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그 곳에 있는 암벽에 그림도 그리도 글씨도 썼다. 여랑은 3년동안 한번도 잊을 수 없었던 나비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하루는 동료들이 잠든 사이 나비를 찾아 산을 넘었다. 단련된 몸으로 산을 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호같이 달려 나비네집 사립문 앞에 당도하니 소나무 장작불이 한마당 가득했다. 사연을 알아보니 나비는 오늘 낮에 한마디 유언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소리에 여랑은 까무러쳤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본가에 누워 있었다.

부모님과 동료 화랑들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랑은 3일 밤낮을 까무라쳐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여랑은 나비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실성하여 화랑 생활을 그만두고 나비의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여나산곡(餘那山曲)이고 신라 향가의 시초라고도 전해 온다.

그리고 당시 이들이 살았던 산 이름도 여랑(餘)자와 나비(那)자를 따서 여나산(餘那山)이라고 불렀다고 나중에 다시 연화산(蓮花山)이라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이 자리에 연소암(蓮沼菴)이란 절을 지었는데 지금은 잡초만 우거져 있어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한편 『고려사』 악지 (『高麗史』樂志)에는 「여나산곡」과 관련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다.‘어떤 서생이 여나산에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 서생은 과거에 합격한 영광으로 큰 세족의 규수를 맞아 혼인을 하였다. 또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뒤에는 과거의 장시(掌試)를 맡아 보게까지 이르렀다. 고려 때는 과거의 시험관인 장시가 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과거가 끝난 뒤에는 합격자들이 장시를 찾아와서 사배(謝拜)의 예를 행하고 큰 잔치를 배풀었다.

이 때에 그 혼가에서는 영광된 기쁨에 넘쳐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장시자를 위한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는 이 노래를 먼저 부르는 관례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노래의 이름을 여나산곡이라 하였으나 가사와 곡은 전하지 않는다.

통일 소나무

은편리 하일리와 추자말 중간에는 옛날부터 큰 소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군도 31호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 소나무는 모양이 서로 비슷했을 뿐 아니라 크기도 거의 비슷해 같은 시대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수령 3백여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는 두 그루 모두가 길 안쪽으로 가지가 뻗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서로 붙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소나무가 서로 붙으면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된다는 얘기를 자주 하곤 했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당시 국민들이 통일을 얼마나 염원했나 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소나무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군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베어나가고 없어진 것이다. 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요즘 들어 남북 경제협력으로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아마 그 소나무들이 지금까지 있었다면 서로 붙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보덕골 절터

봉계 상월평의 동쪽 치술령 산맥이 뻗은 곳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곳에는 옛부터 절이 많다고 한다. 특히 옛날 이 곳에 보덕사(普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 보덕골이라 한다. 또 그 안쪽으로는 중골과 토골이 있는데 이 곳에도 이름 모를 절터가 많이 있다.

이 곳에 있었다는 보덕사는 보덕(普德)이란 고승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또 신라시대에는 원효(元曉)대사가 지냈다는 얘기도 전해 오고 있는데, 당시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경주 분황사가 이곳에서 50리 거리밖에 안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원효대사가 이 곳에 자주 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이 옛날에는 경주의 문화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곳에 이처럼 큰 사찰이 많았다고 하지만 다만 전설로 내려올 뿐 지금까지 문헌이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선바위

하삼정에 있는 큰 바위이다.
옛날 사람들은 큰 바위 앞에서 불을 켜고 소원 성취를 기원하면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민속 신앙은 산수가 맑은 계곡에서 이루어졌는데 불선바위가 있는 곳도 이런 자연 조건을 갖춘 곳이다.

하삼정 숭충골 상류에 있는 이 바위는 높이가 7m가량 되는데 이 바위에 공을 들이면 생남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인근 두동면 사람들은 물론이고 멀리 경주 등지에서도 아기가 없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 찾아와 아들 낳기를 간구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병사등

하삼정 숭충곡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병사등이라는 이름은 병사가 죽은 뒤 능선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병영성 전투에서 패해 왜군에 쫓기던 한 병사가 연화산 중턱 연소암(蓮沼菴)을 거쳐 북으로 후퇴하던 중 타고 오던 병마가 죽자 말을 장사 지내 주고 자신도 이 곳에서 죽어 묻혔다고 한다. 말무덤이라는 것은 이 때 말이 묻힌 무덤을 말한다.

이후 이 병사의 무덤이 있는 아래에 기계유씨의 선영이 생겼는데 유씨 문중에서는 가을에 묘제를 지낼 때 반드시 병사 무덤에 술 한잔을 먼저 올리고 난 후 선조의 묘제를 모신다고 한다.

장천사의 폐사

두동면 천전리에는 장천사라는 큰 신라 고찰이 있었다. 보안골 안으로 들어가면 명산동(名山嶝) 끝에 이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정조때 경주출신인 진사 도와공(陶窩公) 최남복(崔南復)이 백련암(白蓮菴)터에 백련정(白蓮亭)을 짓고 노실(奴室)의 정씨가 명산등에 몰래 묘를 드리고 난 뒤에 절의 운기가 그만 쇠하더니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정씨가 명산등에 묘를 드릴 때의 일이었다. 장천사 중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때문에 묘를 드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제들이 모여 앉아 궁리를 하던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이라는 것이 경주에 있는 광대들을 모아 장천에서 며칠동안 굿 놀이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주위에 사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왔으며, 이 때 장천사 중들도 마을로 내려와서 구경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광대들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노래와 춤이 등장하니 다들 숨을 죽이고 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광대 한명이 나와 사설(辭說)을 한다.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랭이 담배 피울 때, 이띠띠고 지띠띠고 범호(虎)띠고, 앞집처자 헐띄 띠고, 뒷집 총각 말띄 띠고, 큰 골에 짱치고, 작은 골에 벼락칠 때, 백발노인 운기 떳네, 명산하나 잡을라고, 백두산 쳐다보고, 구월산 훑어보고, 봉래산 밟아보고, 삼각산 지나오고, 계룡산 뒤비보고, 방장산 파디비보고, 한라산 배없어 못가보고, 치술령 쫓겨보고, 마등산(馬登山) 뛰어넘어, 동도(東都) 끝봉 올라서니, 연꽃에 피었구나, 이등 저등 쇠다놓고, 명산등에 쇠놓으니 여기가 유택일세. 평토제는 지냈겠고, 산신제도 끝났겠네” 하고는 한숨을 돌렸다.

그제야 중들이 눈치를 알아차리고 놀라 명산등으로 올라갔으나 이미 묘제가 끝난 뒤였다. 노실에서 말에 흙과 돌을 싣고 와서는 그 흙으로 봉분을 모았으며 성분한 상제들은 이미 철수하고 없었는데, 장천사는 이곳에 묘가 생긴 후부터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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