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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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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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리

인보리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너부[仍甫·仍巴] 또는 인보(仁甫)라 불리면서 전읍·서하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1906년에 울산군으로 이속되었으며,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 때 인보동에다 두동의 삼정동 일부가 합쳐져서 지금의 인보리로 되었다. 현재 인보리에는 노동·노서·선필과 신전마을의 일부 등 4개의 행정 마을이 속해 있다.

 

강월마을

1982년에 선필과 신전 마을을 제외한 인보 단위 마을이, 인구의 증가에 따른 행정 구조의 복잡성을 덜기 위해 35호 국도를 중심으로 동은 노동, 서는 노서로 분동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김해 김씨 등이 오래 전부터 살아왔는데, 1981년에 시행된 '소재지 마을 소도읍 가꾸기 사업'을 통하여 종전의 협소한 국도를 폭 10m로 넓혀 우회, 신설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구시곡 소하천을 매립하여 택지로 조성하고 비교적 주거 환경이 불량했던 세대 20호를 입주시켜 신도시에 걸맞은 깨끗한 주거 환경으로 변모시켰다. 그 후 차츰 도로 좌우에는 상가가 형성되고, 교통편도 편리하게 갖추어지자, 인구 또한 급속히 증가됨에 따라 마침내 본 마을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본 마을에는 과거 이 지방의 유일한 금융기관이었던 금융조합 건물에 현 두북농협이 27년간이나 자리잡고 있다가 1991년에 노서 마을로 옮겨갔다. 또 천주교 공소가 있었고, 두서 파출소가 현존하며 그 뒤에 두서면 종합 복지 회관과 노인회관이 건립되었다.

 

주민의 직업으로, 과거에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많았으나 지금은 대다수가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마을 동편으로 경부고속도로와 국도가 확·포장 중에 있어 교통여건은 더 좋아질 것으로 예상되나, 반면에 많은 면적의 농경지가 감소될 형편에 놓여있다.

 

노동 마을에는 수령(樹齡) 500년에 높이 10m, 둘레 3.5m가 넘는 큰 회나무가 유명한데, 인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회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나무 아래 흠상단을 설치하여 당신제(堂神祭)를 지내고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회나무 골목'이라고 부른다.

 

1997년도에 들어 이 노거수 옆에 이동 통신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35m 높이의 철 구조물을 설치하자, 수 백년 긴 세월 동안 탈없이 자라던 거대한 나뭇가지가 갑자기 부러지고 생육상태가 나빠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목신의 노여움이라 여기고 이제 온 마을이 재앙을 당할 것이라 두려워하면서, 통신철탑의 철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철탑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된 가운데, 결국 이동통신 회사와의 적절한 타협으로 철탑의 높이를 10m 낮추게 되자, 그 후로는 지금까지 별 탈이 없는 편이다. 이 회나무 부근에 옛날 좋은 샘이 있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서마을

본 마을의 내력은 대체로 노동 마을과 동일하다. 현재 우리 면의 면사무소가 본 리 486-2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백운산의 지령인 노박산 정기가 힘차게 동으로 뻗어 내린 가운데서 아늑한 인보 마을이 형성되었고, 면사무소·농협·우체국·두서초등학교 등 각급 기관이 이곳에 소재하는, 우리 면의 중심 마을이다. 노서 마을에는 경주 이씨·남양 홍씨·김해 김씨 등이 비교적 오래 전부터 살아 온 편이며, 주민의 직업 분포는 농(農)·공(工)·상(商)의 복합 형태이다.

 

특히 무형 문화재로서, 토철을 녹여 철제품을 만들 때 풀무잡이들이 부르는 '불매 노래'는 일찍이 우리 문학사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민요인데, 이를 전수 받아 보존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인보리 47번지의 고(故) 최재만(崔在萬)이었다. 지금도 그의 며느리 안판순이 그 곳에 살고 있다. '불매 노래'는 골편수를 중심으로 둑수리·뒤편수·불편수 등 적어도 50여명, 많게는 100∼300명에 달하는 풀무꾼들이 지방 도처의 대장간마다 불려 다니면서, 선창과 후렴의 합창으로, 일사불란하게 무쇠를 달구어 내면서 부르는 쇠부리 작업 노래이다. 이 노래는 그 동안 아는 이 없이 묻혀 있다가 1981년 8월에 최재만이 방송 매체를 통하여 고증과 함께 실창(實唱)함에 따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4년에는 울산 문화원의 연구와 거듭된 고증을 거쳐「울산 쇠부리 놀이」라는 민속놀이로 재현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조선시대 남창의 창집 터가 인보리 노서 마을에 있었고, 송탄유[松炭油(송진기름)]제조공장도 일제 말까지 현 후평 소류지 동쪽 국도 건너편에 있었다

 

선필마을

선필 마을은 인보리 법정 마을에서 분동된 마을이다. 상선필·중선필·하선필의 3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는데, '선필'이란 마을 명칭의 유래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옛날부터 착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 온데서 생긴 지명이란 설이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은 마병산과 응암산 사이의 협곡 고지대에 올망졸망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지세를 이용하여 산채와 약초 채집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다. 1968년 후반기에 <흥농목장 >이 설립되어 고원지대 수 십만평에 초지가 조성되면서 낙농사업이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채 당시의 건물 일부만이 남아있다.
천혜의 물 맑고 공기 좋은 터전에서, 예로부터 인심 좋은 이 마을은 울도 담도 없이 서로 믿고 살았으며, 특히 물레방아로 솜 타는 공장이 있는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옛날에는 한지를 생산하는 수공업이 성행했는데 그 품질이 매우 우수하였다 한다.

 

정착 성씨로서는, 한씨(韓氏)가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살았으며, 현재의 주 소득원은 농업·산채·약초재배·축산업 등이다. 한편 이 마을은 조선말기의 천주교 박해 때에 천주교인들의 피난처로 알려져 있으며, 천주교 공소도 마을에 비해 2개소나 있다. 처음 피난온 천주교인은 김문익(金文益)이며, 그의 딸이 대구 교구의 김복분(金福分) 수녀이고, 현주민 김주헌(金柱憲)은 김문익의 손자이다.

 

서하리

과거 경주권에 속했을 때는 서하가 인보와 함께 '너부[仍巴)]'라 불리다가, 1911년부터 서하동이 되었다. 백운산 최고봉인 감태봉에서 발원하여 서쪽의 우술절벽 아래로 흐르는 내를 '서하'라 부르면서 아울러 이를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서하는 1911년부터 1924년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면사무소가 자리 잡았던 마을로, 그 당시의 면 청사가 현존하고 있으며[박홍목씨가 거주], 1940년까지는 1개 행정 마을이었으나 그 후 일제가 전쟁기의 효율적 통치 수단으로 서하 마을과 대정 마을로 분동하였다. 광복 후 다시 통합되었으나 행정 수요가 폭주함에 따라 1979년에 또 다시 서하와 대정으로 분동되었다.

 

서하는 옛부터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지이기에 봉수대와 마당역이 있었고, 서하천의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가 잘 되는 곳으로, 양산 만석군(김정표) 고방과 천석군인 배부자가 여기에서 살았다. 배부자의 아들 배기철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통도사의 보광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광복 후 농림부 농정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농지 개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한편 서하는 국군이 창설되기 전에 국방 경비대에 입대한 손무삼 중령과 임석구·정영조 소령 등 6·25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분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그리고 높은 교육열로서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한 이들이 많아, 박사 3명과 교장 6명 그리고 교직자 다수를 배출 시켰을 뿐 아니라 강효자가 태어난 마을로 충효의 전통이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서하마을

서하 마을은 인보리 서편에 있는 서하 본동으로 면소재지 인보리와 인접하고 있다. 옛부터 평탄하고 기름진 농경지에 선필 저수지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 온 덕분에 농사가 잘되고 단위 수확량이 높기로 우리 면내에서 첫손 꼽히는 농토를 낀 서하 마을은 일찍부터 시골 농경 문화를 선도해 왔다. 이 마을에 인동 장씨·경주 손씨 등이 오래 전부터 살아 왔으며, 생업으로는 농·공·상에 종사하는 이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특히 협동과 단결이 이 마을의 전통인 만큼, 면내의 각종 체육대회 및 민속놀이 경연이 있을 때마다 많은 상을 받았고, 리·동의 공동 재산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부자 마을이기도 하다.

 

대정마을

대정 마을은 옛날에 큰 정자를 이루고 있던 나무가 있어 이로 인해 대정이라 전해오며, 다시 대정·방말(芳旨)·구석곡 등의 3개 자연 마을이 들어 있다.

 

서하천이 대정 마을 앞으로 흘러 구석곡을 지나면서 대곡천(일명 장천)과 합류하여 태화강에 유입되는데, 1999년 울산광역시에서 시민의 상수원 식수 개발 사업으로 대곡댐을 축조함에 따라, 구석곡 마을이 직접 수몰지역은 아니지만 댐 공사현장 사무실 및 부대 시설 설치관계로 마을 전체가 철거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구석곡 주민 4가구가 방말과 서하 중간 양지 바른 곳에 집단 이주하여 대송(大松) 마을이란 이름으로 오순도순 살고 있다.

 

이 마을에 7대 동안 이어 살아 왔던 김태원은 기어이 마을과 농경지가 없어지게 되자, 정들었던 고향산천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그는 약 200만원의 사비를 들여 향수어린 느티나무 정자와 함께 옛날 농사일을 하고 나서 쉬었던 곳을 가려「구석곡(龜石谷)쉼터」라는 표석비를 세워 두고, 성묘나 고향을 찾을 때마다 들려 쉬는 가운데 옛날을 회상하면서 구석곡의 추억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였다. 그리고 방말 마을은, 마병산 중턱 양지 바른 두메에 마을이 형성되어 봄이면 살구꽃·복숭아꽃으로 온 마을이 뒤덮여 그 경관과 정취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마을이다.

구량리

구량리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전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변함없이 구량벌 또는 구량화촌(仇良火村)이라 불렸다. 그 뒤 경주의 남면에 속했을 때는 남중리라 칭해졌고, 1906년 울산군으로 이속되어 두북면에 속했다. 1911년에는 두서면의 중리동(中里洞)과 구영동(九永洞)으로 갈라졌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두 곳을 합하여 구량리라는 옛이름을 되찾았다. 여기에 송정 마을과 중리 마을의 2개 행정 마을이 있다.

송정마을

살기 좋은 고장 두서면 구량리 송정 마을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천이 수려하여 아득한 옛날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온화한 기후에다 지세가 수렵(狩獵)과 농경(農耕)에 적합하여 언제나 풍부한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농사법의 개량과 더불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일구어 오늘날의 풍요로운 농촌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실재 1960년대에는 이윤갑(李允甲)이 구량리 산377-1번지를 개간하다가 선사시대의 돌도끼를 발견하였다. 1970년대에도 김행경(金幸經)이 구량리 산 79번지를 개간하던 중에 돌칼[磨製石劍]을 찾아낸 적이 있어, 석기시대부터 이 주변에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한편 1969년 경지정리작업 중 구량리 235-7번지에서 계림부지경(鷄林府地境)이라는 경계 표석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볼 때 아마도 구량천이 신라시대 이래 계림부의 남쪽 경계가 된 듯하다.

현재는 두곡천 상류 구량천을 사이에 두고, 북편에는 한들[太平들] 농경지 600두락이 있고 남편에는 신당들(약200두락)이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에 70호 내외의 집단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하천에 가까운 벌판에 집을 짓고 살 수 없었다. 홍수 때마다 하천이 범람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마을 부지를 '버든'이라 하여, 활대 끝 산밑에 모여 살아 왔다. 현재의 마을 위치에 정주(定住)하게 된 것은 마을 상단부에 있는 제방에 숲(防水林)의 나무를 베어다 무너짐을 막고, 큰물이 마을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한 후부터이다. 이 마을에 제일 먼저 정착한 성씨로는 경주 김씨[金琦洙의 13대조]로서 약 460년 전에 입향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대를 잇고 있으며, 그 후 여러 성씨가 차례로 이곳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중리마을

중리 마을은 차리와 송정 마을 가운데 있다하여 중리라 불렀다고 여겨지나, 확실한 유래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중리라 불려졌다 한다.

이 중리에는 조선 세종 때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이지대(李之帶)가 낙향하여 손수 심은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6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5백년을 지난 오늘에도 그 수세가 푸르기만 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구량천이 조선 초기의 문헌에는 우천이라 기록되어 있다. 거주 성씨로는, 경주 이씨가 조선초 이래 옮겨와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차츰 시대의 조류에 따라 경주 등지로 흩어지고. 그 대신 김해 김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나, 최근에 들어 양계·양돈 등 축산업도 성행하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은 1968년에 울산 동양나이론(주)과 자매 결연을 맺어 마을 숙원 사업 들을 성취하는데 많은 지원을 받아 그 발전을 앞당겼고, 또 마을 금고 사업을 육성시켜, 현재 많은 공동 재산을 보유한 부자 마을이다.

차리

차리 마을은, 우리 면이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 지금의 상·중·하 차리를 합하여 차동이라 하였다. 이 차동은 남중리(지금의 중리) 다음가는 동이라고 차동 마을이라 칭해졌다. 그 후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다개 갈밭마을은 언양에 이속 되었다.

 

지세로는 동으로 구량리, 남으로 언양 다개와 연접하고, 또 북으로는 선필, 서편으로는 고헌산을 중심하여 상북 소호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편 중차리를 덕산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차리 뒷산이 우덕산(于德山)인데서 연유하였다고 본다. 성씨로는, 경주 이씨가 제일 먼저 차리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경주 김씨 또한 오래 전부터 입향하여 경주 이씨와 더불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특히 상차리에는 경주 김씨 일족이 32호나 대를 이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12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들이다.

 

직업 분포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1980년대 이래 축산업(양계·양돈)도 성행하고 있다. 한편 해발 1,033m의 고헌산에는 예로부터 머루·다래 뿐 아니라 희귀한 산채·약초들이 자생하고 있어 이들의 채취가 주민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해 왔다. 또 소호령 고원분지에는 < 두서면 농업경영인단체 > 에서 고냉지 채소를 재배하여 소득원을 확충하고 있다. 하단부 계곡에서는 한때 유명한 자수정을 채굴한 바 있었으나, 지금은 농업용 저수지 축조 공사로 폐광되었다.

 

내와리

내와리는 두서면이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에도 내와라 불렸다가, 울산군 두북면으로 이속되고 나서 1911년에는 내와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내남면 고사리(內南面 古舍里) 일부를 합하여 내와리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고, 내와와 외와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내와'라는 마을 이름을 갖게 된 유래에 대하여, 옛날 기와를 굽던 곳으로 안에 있는 마을은 '아네', 밖에 있는 마을은 '바데'라고 불려진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자료는 없다. 또한 일설에는 내와 마을 뒷산이 골처럼 생겼다하여 안은 '내와' 밖은 '바데'라 했다고도 한다.

내와리마을

내와 마을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의 영기를 얻은 영산(靈山) 백운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있는, 해발 400m의 고지대 산촌으로 비교적 오지에 속한다. 이 마을에는 경주 최씨와 오씨가 약 300여 년 전부터 거주하였다고 전해오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없다. 한편 안동 권씨는 약 300여 년 전에 입향한 이래 현재까지 토박이로서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성씨가 들어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대다수 주민들은 농·축산업에 의존하고 있는데, 특히 이 마을은 산간분지로서 한서의 기온 차가 심해 볍씨도 조생 종자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수원이 길지 않은데다 지하수도 별로 개발되지 않아 관개 용수가 부족하여 항상 영농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특산물로서, 과거에는 식정·농기·기타 철물 목탄(숯) 등이 있었고 현재는 인삼·한약제·납석·자연석[수석] 등이 유명한데, 특히 내와 혹돌은 전국적으로 우리 내와에서만 발견되는 명품으로, 많은 수석애호가들이 찾아오고 있다.

한편 내와는 옛날부터 도시와 거리가 먼 두메산골로 교통의 불편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오랜 세월 북으로는 괘밭·덕천·이조까지 걸어가서야 경주로 왕래할 수 있었고, 동으로는 활천 봉계를 지나 울산으로 통하였으며 서로는 소호령을 넘어야만 청도·밀양 등지로 통할 수 있었다. 경주나 언양에 있는 시장으로 나들 경우에도 고작 말이나 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원거리 시장터에 겨우 반출한 농·축산물이 때로는 시기를 놓쳐 당일 처분이 불가능할 때도 있어, 이럴 경우 보통 2∼3일이 걸려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71년의 새마을 운동은 우리 고장의 교통사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주민들의 피와 땀에다 정부의 지원으로 새마을 사업에 뛰어든 이후 드디어 마을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은 더 넓혀져 포장된 도로에 노선 버스가 운행됨으로써 교통 불편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농업의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기후와 토질에 맞는 영농 방법을 모색하고 아울러 복합 영농·상업 영농에 힘쓴 결과 단위 수확량을 예전 보다 수배로 더 거둘 수 있어, 이를 기반으로 비교적 안정된 농촌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곳에 탑곡이라는 자연 마을이 있었는데, 한 때는 27여 가구가 이곳에 살았으며 천주교 공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다만 그때의 집터나 담장과 과목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날의 마을을 짐작케 하고 있으나, 차츰 농경지로 전환되는 추세이다.

외와마을

외와 마을의 지리적 여건은 내와 마을과 동일하며, 중점·바데·숲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형산강의 발원지인 백운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으며 비교적 고원이면서도 광활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바데 마을에는 두서 초등학교의 분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고래(古來)로부터 아네 마을과 같이 수목이 울창한 곳으로 송목의 큰 나무가 많아 생쇠부리의 화목·목기·관목·함지 등의 각종 원목으로 많이 소비되었으며, 금·은·동 희귀광물이 채광된 유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중점 서말지 솥은 이 고장에서 자랑할 만한 토산 유물이며, 지금도 잔무골에는 쇠를 녹였던 도가니와 바람을 보낸 풀무[불매독]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다. 그리고 1969년에는 납석 광산이 개발되어 현재까지 채광중에 있다.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자연의 목초가 풍부하고 기후 풍토 또한 목축에 적합함으로 대체로 농가당 큰 가축 5∼6두씩을 각각 사육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인삼 및 약초 재배도 성행하여 수입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는 편이다.

세거 성씨로는, 밀양 박씨가 약 300년 전에 들어와 살다가 영천 북안으로 환고(還故)하였다고 하며, 경주 손씨와 경주 김씨 영분공 24세 및 충원공 9세손이 경주 화천으로부터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숲말에서 살고 있다. 또 바데에는 전주 이씨가 수 백년 전부터 살아 왔고 현재도 9가구가 살고 있다. 그밖에도 여러 성씨가 현재 더불어 살고 있으나 수많은 성씨의 이동으로 정착 성씨는 많지 않다.

복안리

복안리는 우리 면이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에, 지금은 활천리로 된 전천동(箭川洞)에 소속되어 있던 마을이었다. 그 후 정조때 외남면으로 분면 당시 전천리에서 분동된 다음 복안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복안리에는 양지 마을과 음지 마을 등 2개 행정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이 처음에는 봉안(鳳安)이었던 것이 뒤에 보안(普安, 洑安)으로 고쳐 불리다가 언젠가 다시 복안(伏安)이라 개칭되었다 한다. 이러한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마을이 복안산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라시대 이곳에 보안사(普安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복안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라 하나 자세한 내력은 잘 알 수가 없다.

 

양지마을

양지 마을에는 당수(堂樹)라는 하나의 자연마을이 따로 있다. 양지 마을은 북편 문월산(門越山)과 별음산(別音山)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함으로 양지라 하였다 하고, 당수골은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독립 마을이다. 옛날 경주 이씨 판윤공 8대손 학생(鶴生)이 상학곡에 입향한 후, 그 아들이 현 당수 마을로 이주하면서 숲을 치고 그 목재로 집을 지을 때 잔존한 나무 일부를 당수나무로 하여 당제를 지낸 데서 당수(堂樹)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 양지에서 동북간으로 약 500m 떨어진 골안골 안에,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최씨네가 타 성씨보다 먼저 정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후손들이 남아있지 않다. 그후 이 마을의 중심인 양지에 나주 정씨(羅州 丁氏)가 효종 4년(1650)에 입향한 이래 그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성씨가 혼합된 가운데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와리 백운산에서 시류(始流)하는 하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면서 예전에는 형산강 상류 즉, 복안천 좌우에 보안숲이라 하여 송림 및 잡목이 울창하였으나, 1960년대에 제방이 재정비되면서 농지로 전환되었다. 주민들의 생업은, 거의가 농·축 복합 영농으로 전형적인 농촌생활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곳에 일제 때 금광이 개발되어 채굴한 흔적이 몇 개소 있다. 이 가운데는 광구의 길이가 장단들 앞산에서 상학곡까지 관통할 만큼 긴 것도 있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자연 토사가 쌓여 한쪽 광구는 막히고 말았다고 한다.

 

음지마을

음지 마을은 양지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 마을과는 그 이름에서 대칭을 이룬다. 물론 이는 산 그늘로 응달 지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에는 신기 마을[샛터]이란 자연 마을을 두고 있는데, 거주 성씨로는 경주 이씨·월성 최씨·밀양 박씨 등이 오래 전부터 살아 왔으며 특히 신기 마을에는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생업으로는, 주로 미·맥 생산 위주의 농·축 복합 영농으로 토박한 농촌 환경이다. 그리고 신기 마을 앞 들판은 굽들·새들·당산들로 구분하는데, 우리 면내에서는 가장 넓은 들이다. 본 음지 마을은 예로부터 수세가 좋지 않아 한발 빈도가 높았으나, 미호(嵋湖) 저수지가 축조되어 오작곡 산 속을 관통하게 되자 이를 용수로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복안 전역과 활천리까지 몽리 면적에 편입되어 완전 수리 안전답이 되었다. 따라서 단위 수확량도 크게 증가되어 오늘날에는 이 곳이 우리 두서면의 곡창지대가 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신기 마을에는 큰 선비 용운당 최석연(崔錫淵) 선생이 활천 석문암에 기거하다 옮겨 온 후 서당을 차려놓고 한문학을 가르쳤으니, 이 곳을 거친 제자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그 후 용운당의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계를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전수 운영하고 있다.

활천리

활천리는 원래‘살그내’라고 불려지던 곳으로, 언제부터인가 이를 한자(漢字)로 표기할 때 화살을 뜻하는 전(箭)자와 시내를 가리키는 천(川)자를 써서 전천리(箭川里)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우리 두서면이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 지금의 복안리를 합하여 전천리라 하였는데, 이후 조선 정조때 외남면으로 될 적에 다시 복안리를 분리하고 전천리가 되었다. 1906년에는 울산군 두북면에 이속되었고, 1911년에는 활천·가장으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활천과 가정동을 합하여 활천리라 하였다.

1910년 9월 1일부터 면사무소가 이 활천리에 자리잡았으나, 너무 한쪽에 치우쳐있다 하여 이듬해 5월 5일에 서하리로 이전하였다가 1924년 2월 1일에 지금의 인보리로 옮기게 되었다. 활천리 마을 여러 곳에서 신라시대의 토기가 발견됨을 미루어,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으리라 추측되지만 그들이 우리 마을의 조상인지에 대한 근거는 없다. 확실하기로는, 경주 최씨가 약 380년 전에 가장 먼저 정착하였고, 그후 월성 손씨·달성 서씨 순으로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3성(三姓)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한편 가정 마을에는 경주 김씨가 260여년 전부터 자리잡아 왔으나 도중에 각 지로 이향했고 현재는 한 집만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 외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많지는 않지만 여러 성씨가 들어와 이웃을 이루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지세로는, 동으로 봉계와 연접하고 서편으로 복안리, 남으로는 미호리와 각각 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경주의 내남면 월산리와 연접하여 바로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의 하천이 복안천인데, 멀리 백운산 소호령에서 발원한 물길이 내와리·복안리의 각 세류와 합쳐진데다 다시 가정 열박천의 물을 합수하여 봉계를 거쳐 이조천으로 유입되니 즉, 형산강 상류가 된다.

도로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마을 중앙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고, 국도 35호가 연결되어 있으며, 봉계∼내와간의 지방도로도 개통되어 있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며 서당곡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도 계획되고 있다. 이 마을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촌의 낙후성을 탈피하지 못한 채, 가난과 불편을 대물림하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근면·자조·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점차 그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당시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한 새마을 사업에 마을의 전 주민이 헌신적으로 참여하여 노력한 결과, 울주군 가운데서 새마을 사업성과가 가장 앞선 시범 마을로 선정되었고, 당시 지도자 손후복(孫後福)은 국민 훈장[협동장]을 받았다. 마을 주민들의 주된 생업은 농·축 복합형으로 미맥(米麥) 생산과 한우 사육이 중심이지만, 최근에는 가까이 있는 회사에 다니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소득증대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미호리

미호리는 경주 남면 당시 사음(舍音)·마리골로 불렀으며, 울산군에 이속되어 두북면에 속하였던 때에도 사음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때 미호리(嵋湖里)라 고쳐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명을 미호리라 고쳐 부르게 된 이유로, 종전의 사음(舍音)이 지주가 소작료를 받고 관리함을 뜻하는 말로 별로 좋지 못한 용어라 하여 이를 버리고 그 대신 아미산(峨嵋山)에서 미(嵋)자를 따고, 가메들의 많은 호수(湖水)에서 호(湖)자를 따서 미호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마리골과 관련하여, 신라 설총의 이두문에 의하면 사음(舍音)이란 '맑음'을 뜻하는 말임을 볼 때, 원래 마을 이름이 '맑은 골'이었던 것이 내려오는 동안 '마리골'로 바뀌게 된 것이라 추리된다. 미호리는 상동과 하동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상동마을

상동 마을은 미호리의 서편 위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약 400여년 전 조선조 광해군 때 지금의 저수지 근처에 김해 김씨가 자리를 잡았는데,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가 자주 내려와 사람을 해치므로 공포에 질려 지금의 상동 마을로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나주 임씨가 들어와 다래나무 덤풀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정착하였고 뒤이어 각 성씨(姓氏)가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미산과 천마산 사이의 가메들 계곡은 백운산 탑곡에서 시류하는 태화강 최상류 발원지로 자연 경관이 빼어난데다, 그 긴 계곡 중간 중간에 거울 같은 석반을 끼고 호박소·구이소·가마소 등 아름다운 소가 많아 지금도 이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1955년 정부에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당시 이장으로 있던 홍순해(洪淳海)가 앞장서서, 1970년대 초 새마을 사업이나 마찬가지로, 도로 확장·울타리 없애기·부엌개량·화단 가꾸기 등 환경개선 사업을 일찍 추진한 결과 우리 면내에서 가장 먼저 개화된 문명 마을로 변모된 곳이다. 당시의 한가지 특이한 사례는 음력 과세를 폐지하고 양력 과세를 실행한 것인데, 이때 65세 이상 노인들을 한데 모시고 젊은 사람들이 합동과세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군수가 현지에 방문하였을 때 동민들이 '재건의 노래[洞民歌]'를 제창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돌아가서 곧 상금 오십만원과 리어카 40대를 상으로 보냈다. 그때 기증 받은 리어카가 얼마나 견고하게 제작되었던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때 부르던 동민의 노래는 뒤의 제9장 [민요] 편에 수록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주된 생업은 역시 농·축산업이다. 아직 정기적으로 운행되는 노선 버스가 없어 교통이 불편한 편이나, 신설 중인 도로가 개통되면 곧 교통 문제는 해소될 것이며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가 올 전망이다. 한편 1985년∼1991년에 완공된 농업용 미호 저수지가 상동 마을에 있는데, 그 규모가 면내에서 가장 클 뿐 아니라 전체 울주군 내에서도 대표적인 수리 시설이다. 이 마을 아미산 중턱 광활한 부지에는 규모가 큰 <신우목장>이 개설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가로이 풀 뜯는 소떼가 그저 풍요롭기만 하다.

 

하동마을

하동 마을은 미호리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인데, 상동 마을과 하동 마을 중간에 중동이란 자연 마을이 또 있다. 하동 마을에는 경주 최씨가 약 200년 전부터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진양 정씨·강릉 유씨·밀양 박씨·경주 이씨 등이 차례로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주업으로는 과거에는 미맥 위주의 농업에 주력하였으나, 근래에는 각종 농산물 구매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가계에 보탬이 되고 있는 편이다.

 

한편 이 마을은 1977년도에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서, 농촌취락 구조개선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산재해 있던 가옥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샛터 마을에 집단적 택지를 조성한 다음 농촌 표준형 규격의 자재를 사용한 현대식 주택을 지어 입주하였다. 이와 더불어 공동 축사·마을회관·공동 취사장 등도 건립하여 비교적 문화 수준이 앞서 가는 마을로 변모되었다. 특히 당시의 이장 최금식(崔今植)은 1977년부터 1997년까지 20년간이나 이장직을 맡아, 재임하는 동안 마을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크다.

 

교통은, 35호 국도가 마을 중앙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 사정은 좋은 편이며 마을 앞 하천에는 미호 저수지의 풍부한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 주민들은 자칭하고 있다.

전읍리

전읍리는 조선초기에 '돈 마을' 또는 '회은촌(回隱村)'이라 하던 곳이다.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에는 너부[仍甫]에 속해 있었으나, 조선 정조 때 비로소 전읍리가 되었다가, 울산군으로 이속되면서 전읍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후 1914년에 지방행정 구역 개편 때에 다시 전읍리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읍리는 신라시대에 돈을 만들었던 곳이라 하여 '돈골'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한 고증 자료는 없다. 전읍리에는 대리와 월부의 두 행정 리가 있어, 그 중 대리에는 대리·유촌·신전 등 3개의 자연마을이 속해 있고, 월부에도 양지·월부·수중내 등 3개 자연 마을이 들어 있었다. 이들 마을 모두가 1950년대에 전읍으로 통합되었다가 1979년에 신전 마을이 행정리동으로 따로 분리되었다(전읍 신전과 인보 신전). 그리하여, 현재의 전읍리는 대리·월부·수정·양지·유촌의 5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으며 두서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다.

처음 마을이 형성된 내력은 잘 알 수 없으나, 선사시대의 토기가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곳에 사람이 취락을 이루어 살아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사실로서, 월부[달비터]마을에는 약 450여년 전 면천 복씨가 들어와서 다래나무를 베고 자리잡은 것이 시초로 믿어진다. 그 이래 면천 복씨 후손들이 전읍일대에 30여호에 이르는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나, 도중에 각처로 다 떠나고 지금은 불과 10여세대가 남아 대계(大系)를 잇고 있다. 한편 월성 이씨 관람파 중의 후손이 이조 광해군시대에 이미 이곳 출신이었다고 자처한 만큼, 적어도 그 이전부터 이씨의 선대가 살고 있었다고 추측되며 지금도 그 일족이 수중내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편 월부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면천복씨 복윤수(卜閏壽)의『월현집(月峴集)』이라는 책에 의하면 그 생김새가 달뜨는 형상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월현이라 불렀는데, 일제시대에 이르러 월부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은 해발 600m나 되는 아미산의 주령 분지에 형성되어 있어, 예로부터 웬만한 터에 묘를 쓰기만 해도 곧 명당 자리가 된다고 전해진 탓으로, 다른 곳에 비해 특히 묘지가 많은 마을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성씨분포는 월성 이씨·경주 최씨·월성 손씨·연안 이씨·면천 복씨·월성 박씨 등이 주종을 이룬 가운데, 그 밖의 여러 성씨들이 서로 도우면서 더불어 살고 있다.

대리 마을은 1979년도에 들어 농촌 표준형으로 주거환경이 깨끗이 정리된 새마을로, 교통사정도 매우 좋은 편이다. 게다가 1989년부터 1991년에 이르기까지 두서면의 농공단지가 이 마을 국도변에 조성되어 14개의 기업체가 입주함에 따라 이 마을은 물론 인근 지역의 유휴인력을 흡수함으로써, 농촌 경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주된 생업은 아무래도 농·축산업이라 하겠으며, 특히 양질의 토질과 수세가 좋아 근채류 및 엽채류의 고등소채 생산이 풍부하다. 그 가운데서 특산물로는 미나리를 꼽을 수 있겠는데, 최근에는 3ha의 면적에 답리작(畓利作)을 이용한 재배법을 개발함으로써 시기 구분 없이 연중 질 좋은 미나리를 출하하고 있다.

신전마을

신전 마을은 1979년 8월 17일 인보리 신전과 전읍리 신전이 합쳐서 독립 행정 마을로 되었다. 그 내력이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지세로 볼 때, 서북방은 긴 골짜기의 하단부이며 동남으로 길게 뻗은 하천변으로는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세천을 따라 농경지가 일구어졌음을 미루어, 다른 어느 곳 보다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다고 믿어진다. 마을 중심부에는 노거수(老巨樹:수종은 포구나무, 수령 500년, 위치는 153­3번지, 면적은 약 150평, 1970년에 울주군 문화공보실에서 보호수로 관리)가 있었고, 그 건립 연대는 미상이나 경주부윤 노영경(盧永敬)의 선정비가 비바람을 맞으며 당나무와 함께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 왔다. 이 노거수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서하 봉화산, 북쪽으로는 열박재를 잇는 신작로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거주 성씨(姓氏)로는, 경주 최씨가 가장 먼저 입향한 이래 오늘에도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나 그 외는 성씨의 이동이 많고 정착 성씨가 드문 편이다. 이 마을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 자시(子時)에 당제를 모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으며, 마을세가 좋았을 때는 가끔 정자수 놀이터에 청·장년들의 힘 겨루기로서, '들돌'을 마련하여 이 돌을 들어야만 남의 집 품삯 일꾼 자격을 인정해 주는 등 갖가지 옛 농경사회의 전통민속이 계승되고 있었다. 그 밖에 옛날에 쓰였던 석매·방앗간·물레방아들이 마을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으나 1978년에 당나무는 말라 죽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에 얽힌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회양목·느티나무·감나무 등의 거목들이 고루 분포하여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전읍 돈골을 순시하다가 열박재에서 잠깐 쉬면서 "남쪽에 숲이 많은 저곳이 어디냐?"고 묻자, 신하들이 "저 곳은 숲이 많아 섶밭이라 불리는 곳"이라 고해 올림으로 해서 그 말에 따라 지금의 신전(薪田) 즉 '섶밭'이 되었다고 한다.

신전마을에는 우리 면의 유일한 중등학교[두광 중학교]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학교 교육과 관련된 두동·두서 양 면의 유동인구가 많아져 자연히 상가가 늘고 이주해 오는 상인들도 늘어남에 따라, 주택 수보다 세대수가 월등히 많을 정도로 주택사정은 좋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교통은 상하 어느 쪽으로도 아주 편리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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