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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과 김유신

두서면 내와리와 상북면 소호리 사이에는 백운산(白雲山)이 높이 솟아있다. 이 백운산은 신라 이래 열박산(咽薄山)이라고도 하여 무척 신령스럽게 여겨왔던 산이다. 이 백운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감투봉인데, 여기에 신라 때의 한 설화가 전해온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金庾信)은 원래 김해(金海)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왕손이었다. 그의 증조부 구형왕이 신라의 법흥왕에게 귀부함으로써 금관가야는 이제 신라에 병합되었고, 갸야왕족은 신라의 진골(眞骨)에 편입된 것이다. 이와 같이 김유신은 가야계 세력을 대표하는 신라의 귀족자제로서 성장하는 중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흡연(洽然)히 그에게 복종하여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28년(서기 611년)에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는데 북으로는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서쪽에서는 백제가 국토를 침략함을 보고 강개(慷慨)하여 외적을 평정할 뜻을 깊이 품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제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나 범과 같이 우리 강역을 소란케 함에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나는 한낱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소청하는데 뜻을 두고 있사오니 하늘은 굽어살펴 나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하였다.

그러기를 나흘만에 문득 한 노인이 허름한 옷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이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니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이에 유신이 대답하기를,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명(尊名)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하니 노인이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인연을 따라 행동하는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한다"고 하였다.

유신은 이 말을 듣자 그 노인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재배하고 나아가 "나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고명한 분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시옵소서"하였다

노인이 다만 잠잠하여 말이 없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예 닐 곱 번이나 거듭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아직 어린데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하고 이에 간직하였던 비법을 전하면서,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불의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하였다. 말이 끝난 다음 작별하고 2리쯤 가자, 유신이 쫓아 가 찾아보았으나 노인은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5색과 같이 찬란한 빛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진평왕 건복(建福) 29년(612)에 이웃 적병이 박도 하니 유신은 더욱 비장한 마음을 격동시키며 혼자서 보금을 들고 열박산[咽薄山, 백운산]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면서 마치 앞의 중악(中岳)에서와 같이 기도하며 빌기를, "천관신(天官神)께서는 보검(寶劍)에 신령을 내리소서!" 하였더니, 사흘째 되는 밤에 허숙(虛宿)과 각숙(角宿) 두 별의 빛이 환하게 내려 뻗히자, 유신의 칼이 움직이는 듯 하였다.

이상이 우리 고장의 열박산과 김유신이 얽힌 전설의 대강이다. 물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영웅이다. 그의 충성과 통일의 의지는 바로 우리의 열박산에서 다듬어진 것이다.

고함산

두서면 차리와 언양면과 상북면 사이에 있는 고헌산을 속칭 고함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서쪽에 있는 경주군 산내면 사람들이 즐겨 불러오는 이름이다. 한편 산내면 대현의 중마을에는 문복산(文福山)이라는 높다란 산이 고헌산과 마주보고 있다. 그런데 이산에는 「디린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높고 큰 층암으로 이룩된 이 바위는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하여 「디린바우」로 불려온다. 이 디린바우는 드려지듯 험한 곳이므로 좀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석이(石耳)라는 버섯이 돌 틈에 붙어 자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따먹으려 탐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디린바우에는 옛부터 지내와 거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가 몸집이 엄청나게 큰 것들로서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다 한다. 옛날 어느 때 한 용감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이 디린바우의 석이(石耳)가 몹시 먹고 싶었다. 그는 길고 튼튼한 밧줄을 나무둥지에 달아놓고 자기의 허리를 이어 메어 바위 아래쪽으로 내려가 석이(石耳)를 찾아 따기 시작하였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니, 석이가 많아 그저 온 정신이 다 버섯을 따는 데만 팔려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디린바우의 동쪽에는 멀리 고헌산(高 山)이 자리잡아 그 위용을 자랑하듯 웅장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고헌산에서 나무를 한 짐 가득히 지고 내려오다가 잠깐 나뭇짐을 내려놓고 쉬면서 곰방대를 끄집어 내어 담배 한 대를 부벼 넣고 불을 당겨 막 한 모금 빨아 당기는 순간이었다. 문득 서쪽을 바라보니 디린바우에서 한사람이 석이(石耳)를 따고 있는데, 서말지 솥뚜껑만 한 큰 거미가 사람이 메어 달려 있는 줄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새 소름이 오싹 끼쳤다. 줄이 끊어지면 사람이 죽기 때문이다. 나무꾼은 벌떡 일어나서, "보소! 보소! 버섯 따는 사람아!" 라고 고함을 질렀다.

 

다시 목이 터질 듯 큰소리로, "보소! 여보소! 이 사람아!"하고 한참이나 고함 지르기를 되풀이 하니 그제야 사나이는 나무꾼을 바라보며 손으로 응대하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거미가 줄을 끊는다! 거무바라! 거무들!"하였다. 사나이가 비로소 말귀를 알아듣고 위를 보니, 저런! 디린바우의 지킴이 거미가 기어 나와 밧줄을 물어뜯고 있지 않는가? 놀란 사나이는 급히 몸을 피하여 간신히 큰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는 뒤로부터 이곳 사람들은 고헌산을 '고함산'이라 하였다. 나무꾼이 석이(石耳)따는 사나이를 위해 고함을 지른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천마산 백병바위

미호리 마을 가메달 우측 천마산 기슭에 있는 병처럼 생긴 흰 바위로 사람의 생사 운명을 미리 알려 준다고 전해 온다. 고려 중엽 한 수도승(修道僧)이 바위 부근에 절을 지어 기거하면서 시주를 받으려고 마을로 내려왔다. 어느 집에 이르러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권하니 집주인이 엉뚱한 말을 한다.

"스님 한가지 물어볼 말씀이 있는데, 대답을 좀 해 주이소."
"허허 무슨 말씀인지요? 소승이 알고 있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다름이 아니 오라 제가 몇 살까지 살 수 있겠습니꺼?"
"예? 소승은 관상가나 점장이가 아니라 불도를 닦는 몸입니다."
"그렇다면 뭐 때문에 시주를 하겠소! 다른 데나 가보이소!"
"나무관세음보살…"

터무니없는 일을 당한 수도승은 다른 집으로 향한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천마산에서 내려온 소승입니다. 시주하십시오."
한 아낙네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지금 바깥양반이 앓고 계신데 언제 나을 수 있겠어요?"
"뭐라고요? 소승이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름난 중은 그런 것도 척척 알고 다닌다던데… 틀렸군요. 다른 집에나 가보시오."
아낙네는 쌀쌀하게 말을 내뱉고 문을 닫아 버린다. 수도승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 난감한 일인지고.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한다.' 수도승은 무거운 발길을 돌려 절로 돌아왔다. 시주는 받아야겠는데 시원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수도승은 야박한 세상 인심을 한탄한다.

'부처님의 영험을 받아 인간의 생사를 판가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골똘히 사색에 잠긴 도승은 '영험을 내리소서! 지혜를 내리소서!'하며 오랫동안 기도하더니, 이튿날부터 정과 망치로서 절 옆에 있는 큰바위를 다듬기 시작했다. 불상을 만들려는 것이다. '부처님 상을 깎아 그 앞에서 백일기도를 해야지! 영험과 지혜를 내려 주십사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도승은 열심히 바위를 다듬었다. "스님, 예불 올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도승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박봉례의 친정으로는, 삼촌이 통도사의 주지스님을 지낼 만큼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고, 시가(媤家)인 진주 강씨 집안 또한 불교를 받드는 가문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아마도 부처님이 타이르기 위해 그날 밤새 신부로 하여금 그 바위를 맴돌게 하신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그는 입 속으로 염불을 외어가며, 손에서 피가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를 다듬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상을 조각하는 수도승의 모습은 흡사 미친 사람과도 같았다.
드디어 불상이 완성되자 도승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쉬지 않고 돌부처 앞에서 염불을 한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이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시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염려 말아라 관세음보살…"

동자승이 걱정스러워하는데도 수도승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거 큰일났구나! 이러다간 스님께서 지쳐 스러지시겠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수도승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수도승은 목석처럼 꿈쩍도 않는다. "스님! 스님께서 기도를 시작하신 지가 벌써 99일이나 되었습니다. 꼭 염불을 계속하시려면 법당 안에서 하십시오!"

"………"
수도승은 밤새도록 돌부처 앞에서 지혜와 영험을 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하루만 지나면 꼭 백일이 된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다.
"으악!"
수도승은 그만 바람에 휘말려 바위 밑 낭떠러지로 떨어져 거의 죽게 되었다.
"아니 스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제 나는 죽는다. 하루를 못 채우고 이렇게 죽는구나! 내 말을 명심해 들어라! 내가 죽으면 이 바위에 하얀 병 모양의 돌이 생길 것이니 너는 그것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판단해 주어라! 만약 그 흰 병이 다른 색깔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큰 병(病)을 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하얀 병이 아예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 으흐흐…"

한을 풀지 못한 채 수도승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수도승의 말대로 부처를 새긴 바위 한쪽에 하얀 병 모양의 돌이 나타났다. 구전되는 이야기로는, 그 수도승이 백일을 채웠더라면 인간의 백년운수를 훤히 뚫어 볼 수 있는 비기(秘記)를 완성하였을 것이나, 끝내 하루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운수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오직 그 사람이 당장 병(病)을 얻게 되거나 죽을 사람인지 아닌지만 백병 바위를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도승이 살던 절과 부처는 없어지고 백병 바위만 남아서 옛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혹 우리 면민 가운데 여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지금이라도 운동 삼아 천마산 백병 바위로 찾아가서, 쳐다보아 하얀 병이 뚜렷이 잘 보이시거든 자신이 아직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만약 그 하얀 바위가 노랗거나 빨갛게 보이면 빨리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 보십시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바위가 보이지 않으면 내려오는 대로 곧 유언장(遺言狀)을 써 두심이 좋을 것 같으니 한번씩 시험해 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복안 옥로승전설

옛날 신기마을 뒤 복회골에 선불암(仙佛庵)이란 절이 있었고 거기에 옥로승이라는 힘센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은 상학곡 깊은 곳에 논을 갖고 있어, 거름으로 절에서 수거되는 인분을 매일 같이 이곳까지 갖다 날라 처리하였는데 논의 이름도 옥로답이라 하였다. (지금은 수림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형태는 그대로 있다.)

 

그 시기에 복안사람들이 '새들보'를 개설하기로 하였는데, 그 수로가 음지 마을 앞을 지나게 되자 음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으로 수로가 나게되면 마을 정기가 끓긴다'하여 반대투쟁에 나섰다 한다. 이에 몽리 주민들은 힘센 옥로승 스님에게 보·용수로를 내어 줄 것을 부탁드리자 옥로승 스님이 야간을 이용하여 단숨에 봇물을 관통시켰다 한다.

 

그때 도랑을 내려고 땅을 파헤치니 주혈[朱血, 붉은 피]이 솟아났다 한다. 그러고 난 뒤 한때 마을사람들 가운데 혀가 짧아 발음이 분명치 않고 어눌한 사람들이 유독 많이 태어났는데, 이는 그때 옥로승 스님이 보수로를 개설할 때 마을의 정기가 끓어진 탓이라 전해졌다. 그러나 그후에 수리조합(농업기반공사)에서 각 몽리구역에 걸쳐 거미줄처럼 관계(灌漑) 수로를 개설하자 2통에 복안 일대의 지기가 도로 왕성해져서 지금은 더없이 풍요롭고 태어나는 아기는 건강하고 또 총명하기만 하다.

 

동오배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우리 고장에서 그런 대로 인기 있던 볍씨 종자가 '동오배'였다. 그런데 이 볍씨가 '동오배'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좀 엉뚱한 연유가 있었으니, 다음은 그에 대한 유래이다. 옛날 우리 면 활천리에 진(陳)씨 성을 가진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진노인은 원래 산내면 대현리가 고향이었는데, 언젠가 활천리로 옮겨와 벼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해 농사의 풍흉은 그해의 볍씨 선택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쌀 농사에서 볍씨 선택은 중요하다. 물론 토질과 기후에 맞는 볍씨라야 하며, 특히 아무리 좋은 종자라 하더라도 연작을 하면 퇴화되어 소출이 떨어지기 때문에 각 농가에서는 거의가 해마다 벼 종자를 바꿔가며 농사를 지어왔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 진노인은 고향인 '소야동골'로 가 신나락을 구하여 왔는데, 필경 새 종자의 이름을 알고 왔건만, 집 근처에 이르러 도랑을 건너다가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여간에 농사를 지은 결과 작황이 의외로 좋아 이웃의 너도나도 그에게 새 종자를 부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듬해부터는 그 종자가 퍼지기 시작하여 이태가 못 가 그 일대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볍씨의 종자 이름은 알 길이 없어, 그냥 '동오배', '동오배'하고 불렸는데, 사실 '동오'는 바로 진노인의 택호(宅號)였다. 그러니까 평소 이웃에서 진노인네 가정을 가리켜 '동오댁', 아니 '동오때기'라 부르던 터라, 누군가 편한 대로 이 택호를 따다 그 아리송한 볍씨 이름에 붙인 것이, 나중에는 모두가 그것을 '동오배'라 부르면서 알아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동오배'가 어느 기관의 연구소에서 나온 신품종인줄 알고 < 농촌지도소 > 에까지 찾아가 '동오벼'의 특성이며 관리방법을 문의하여 전문가들을 어리둥절케한 일조차 있었다고 한다.

 

혼귀석 홍두께바위

우리 면 서하리의 봉화산 기슭에 '배고개, 천고개'라 불리는 고갯길이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일대는 언제나 음산한 곳으로, 지나기만 하면 까닭 없이 불안해지고 또 자주 허깨비가 나타나기 때문에, 백명이 모여야만 이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배고개'라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람이 모여야 비로소 편안히 넘을 수 있다해서 '천고개'라 불려지기도 한단다. 특히 이 고개의 한 길목에는 혼귀석(魂歸石)이라 불리는 큰바위가 있어 간혹 혼을 빼 놓는다고 알려져,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 바위 옆을 지나기를 꺼려왔다.

게다가 천고개 밑에는 '하이칼라 못'이라 불리는 못이 있는데, 이 곳 또한 귀신이 나타나는 못이라 소문이 나 있어, 으스스한 고갯길을 걷는 사람의 공포심(恐怖心)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이 언양 장에 갔다 돌아 올 때, 날이 저문 귀가길에는 이 고개를 넘어서야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한다.

다음은 이 고개의 혼귀석에 얽힌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년 전 양산의 하북면 초산리에서 성장한 '봉례'라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 집안의 규수가 15살 나이로 우리 면 방말 대골 마을에 사는 진주 강씨(晉州 姜氏)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강씨 일가는 새로 맞이한 신부를 잘 대해 주었으나,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신부는 시집살이가 너무도 고달픈데다 부모의 슬하가 그리워서, 어느 날 밤중에 그만 시집을 뛰쳐나와 친정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어린 신부는 밤새 부지런히 길을 걸었지만, 동이 트도록 끝내 이 바위만 맴돌고 말았던 것이다. 날이 밝자 그 신부는 한동안 지쳐 쓰러졌다가 마침내 시집으로 도로 돌아갔는데, 이 일이 알려지고 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혼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박봉례의 친정으로는, 삼촌이 통도사의 주지스님을 지낼 만큼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고, 시가(媤家)인 진주 강씨 집안 또한 불교를 받드는 가문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아마도 부처님이 타이르기 위해 그날 밤새 신부로 하여금 그 바위를 맴돌게 하신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다시 시집으로 들어간 신부는 그날 밤의 일을 부처님 뜻이라 여기고, 참고 견디면서 끝내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고 한다. 현재 대정 마을 방말에는 박봉례의 증손(曾孫)인 강대식이 살고 있다.

호식과 명당

우리 면의 내와리 탑곡에는 현재 풍천 임씨(豊川 任氏) 집안의 분묘 5기가 한곳에 있다. 원래 이 곳은 내와리에 살고 있던 안동 권씨(安東 權氏) 문중에서 묘를 쓰기 위하여 잡았던 터였으나, 당시 유명한 지관(地官)이, "여기에 묘를 쓰면 후일에 반드시 큰 인재(人才)를 배출하게 되지만, 당장은 하관(下棺)과 동시에 어느 상주가 호식(虎食)당함을 피할 수 없다." 라고 일러주는 말을 꺼리어 끝내 묘를 쓰지 못하고 포기했던 자리라 한다.

그 후 조선조 숙종 을미(1715) 1월 17일에 경주 남산에 살고 있던 풍천 임씨 가문에서 진사를 지낸 임인중(任仁重)의 처 월성김씨(月城金氏) 묘를 다시 그 자리에 쓰려고 하였는데, 이번에도 지관이 같은 말을 하자, 임씨 문중에서는 묘를 '쓰네' '못쓰네' 하고 양론으로 갈려 한참이나 왈가왈부할 뿐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그러자 맏 상주가 나서서, "내가 호사(虎死)하더라도 우리 후손이 잘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니 내 기꺼이 묘를 쓰겠다."

하면서 기어코 묘를 드리도록 주장하였다. 그의 표정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는 듯 엄숙하고 단호함마저 베어 있었다. 이러한 상주 고집에 따라 결국 그 자리에 관을 묻기로 하였으나, 그래도 지관의 범상치 않은 지론을 의식하여, 모두 긴장 속에서 주의를 다해가며 하관 차비를 했다. 하지만,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 막 하관을 하자마자 갑자기 주위가 음산해지더니 난데없이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저만치 나타나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듯 놀라 떨었으나,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 상여의 홍줄로 주위를 둘러친 다음 중앙에 상주들을 모으고 나서 힘센 상여꾼들로 하여금 방패처럼 그들을 에워싸게 했다. 그러나 천만에! 다음 순간 천지가 진동하듯,

"어 - 흥 -!"

한 소리에 모두가 혼비백산(魂飛魄散)!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호랑이는 어김없이 망자(亡者)의 장자인 맏 상주를 순식간에 채어가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였다. 사람들은 다만 후손의 출세를 위하여 한 몸을 기꺼이 바친 거룩한 뜻을 기리며, 희생당한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흘러 과연 호사한 당사자의 손자 임옥(任玉)이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또 이 무렵부터 그 가문에서 천석군의 부자가 나와 대를 이어가며 부와 귀를 누렸다 한다. 당초 묘를 들였던 자리 아래에는 나중에 후손들의 묘를 또 들여, 모두 5기의 분묘가 조성되었는데, 현재 9세손 임방우가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호랑이를 잡은 설화

호랑이는 지구상에서 뭇 동물의 왕이요, 신령스런 맹수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에는 호랑이가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호랑이를 직접 본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호랑이라는 짐승은 무섭고 사나우며 체격이 크고 힘이 세어, 여타의 동물은 감히 그 위용에 비교도 못할 존재이다.

그리고 웬만한 산 짐승들은 거의가 호랑이의 먹이가 되며, 간혹 어린아이들이 보채고 울 때, "범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딱 그쳤고, 소행이 고약한 사람보고는, "에라 이! 범 물어 갈 인간아!", 또는 "호식(虎食)할 팔자" 등의 속언이 전래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도 영험의 존재로 우상화하고 있다. 또한 호랑이는 번식율이 낮아 전세계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서식지도 북방의 경우 시베리아나 백두산 등에 한정된 희귀동물이다. 호랑이 한 마리의 활동 영역은 대단히 넓다고 한다. 가령 여기 저기서 범이 출현하였다고 할 때, 이는 대게 여러 마리가 아니라 단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가끔 이곳 저곳 사람들 눈에 목격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설적이고 신비한 호랑이를 두서면 활천리에서 포획한 실화가 있기에, 전해오는 경위와 노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여기에 기술코자 한다.

때는 일제(日帝)초기 즈음에, 활천의 능주봉 산록과 석문암 계곡·준주봉 등지로 호랑이가 자주 출현하여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던 중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고 그개 박서원네라고 불렀단다. 그 무렵 그 부근에서 호랑이가 개나 가축 등을 차고 가는 일이 허다하였다는데, 하루는 갑자가 호랑이가 박씨집을 덮쳐 그의 남동생을 물어 차고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한 시기에 한 민첩한 포수(신원 미상)가 있었다. 그는 조심해서 범을 찾던 중 어느 날 운수 좋게 산마루에서 낮잠을 자는 범을 발견하고는 닥아 가 화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범을 사살한 정확한 장소는 지금의 「검둥바위」정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사살된 호랑이를 마을로 운반한 다음 우물가 큰 대추나무에 메달아 놓고 해체 작업을 하였는데, 그 호랑이의 뱃속에서 '중소'이상의 소다리가 겹쳐서 나왔다고 하니 과연 그 범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리라.

그후 호랑이를 잡은 사실이 점점 퍼져나가 인근 도처는 물론 관가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호랑이를 잡은 그 포수는 마침내 관가에 불려가, 위험한 짓을 하였다하여 곤장 3대의 벌을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용맹성에 대해서 후한 포상이 내렸다고 한다. 그 호랑이가 잡힌 후부터 활천리에는 밤마다 앞산 뒷산 곳곳에 시퍼런 불빛이 왔다 갔다하는 가운데, 3∼4년 동안이나 공포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고 촌노들은 전하고 있다.

한편 보다 앞서, 이 호랑이가 사살되기 전에 일화가 또 전해진다. 어느 날 내남면 안심리의 한 서당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글을 배우고 있는 아동을 덮쳐 낚아채는 순간, 마침 훈장이 이를 보고 아동을 살리기 위하여 황급히 호랑이를 잡으려 하자 호랑이는 이제 훈장어른까지 물어 차고 큰 개울을 한 걸음으로 건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맹수가 지방곳곳에 나타나서 으르렁거리며 인가를 해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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