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읍

사람이 희망인 울주

전체메뉴보기

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 본문 인쇄
  • sns 공유 리스트 열기

교동리

교동리(校洞里)는조선조 제22대 정조(正祖)때(1777-1800) 언양현(彦陽縣) 중남면(中南面) 덕천리(德泉里)와 평지리(坪地里)에 속했다가 제26대 고종때 언양군(彦陽郡)에 소속되었다. 일제(日帝)시대 1911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지역을 수남(水南),교동(校洞), 평리(平里)란 세행정(行政)리.동(李.洞)으로 개편하였다가 1914년세개 동(洞)을 통합하여 교동리(校洞里)라 하였다. 이때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으로 병합(倂合)되어 언양면(彦陽面)이 되므로 울산군 영역(領域)에 들어갔다.

 

1932년 10월31일 경상남도령(慶尙南道令) 제17호로 이듬해 1월 1일부로 중남면(中南面)과 삼동면(三同面)을 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라하자 이때부터 삼남면((三南面)에소속되었다. 현재 교동리(校洞里)에는 상평(上平), 중평(中平), 봉화(烽火), 평리(平里),수남(水南), 향교(鄕校), 벌장(閥場), 대진(大進), 태봉(太奉), 수정(水晶)의 10개 행정리(行政里)가 있다. 교동(校洞)의 이명(里名)은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이런 마을 이름은 전국에 걸쳐 있다.

 

지금 본면 교동리에 있는 언양향교의 창건은 언제 지어 졌는지 알 수 없으나 네번 짓고 세번 옮긴 복잡한 과정을 밟고 있다. 헌산현(지금의 언양초등학교부지)의 북쪽 2리(里), 반월산(半月山:밤버든) 아래에 있었다가 현(縣)의 남쪽 3리 떨어진 덕천(德泉)인 지금의 곳으로 옮겨지었다. 세번째로 현의 서쪽 화장산(花藏山) 아래, 지금의 언양읍 송대리 성당 자리에 옮겨지었다. 거기서 네번째로 덕천(德川)에 옮겨지으니 지금의 향교자리로 두번이나 옮긴 셈이다. 결국 언양향교는 4번 짓고 3번 옮긴(4建3遷) 복잡한 변천사를 보이고 있다. 언양읍의 성당마을을 구교동이라 한다. 이와같이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한다.

 

상평1리마을

상평1리마을은 순수농가는 없고 도시의 성격을 띠고 발전하고 있다. 교동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이 끝나 도시 주거지역상가로 변모하였다. 2015. 12. 31.자로 상평마을에서 상평1리로 분동되었으며, 대진아파트와 올림푸스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

 

상평2리마을

상평2리마을은 2015. 12. 31.자로 상평마을에서 분동되었으며, 보람병원이 위치하고 있다. 교동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이 끝나 도시 주거지역상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봉화마을

봉화마을은 교동구획정리지구 내 주공아파트 신축으로 700여 세대가 증가하여 2005년 9월 15일자로 기존 상평마을로부터 분동되어 2007년 말 현재 세대수 703호, 인구 1,600명에 달하고 있다. 봉화라는 이름은 주공아파트 뒤편에 봉화산이 자리잡아 봉화마을이 되었다.

 

수남마을

수남부락은 남천(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수남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조 정조 때에는 덕천(德川)이라 하였다. 덕천은 역(驛)이 있던 곳이기에 일찍이 알려져 왔다. 고려 때에는 덕천역이 금주도(金州道:경주)에 속하였고 조선조에 와서는 황산도(黃山道:양산물금역)에 소속된 역이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덕천(德川)을 가리켜 속되게 천(泉)으로 그릇되게 쓴다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덕천(德川)임을 밝힌 것이다. 수남 마을은 역이있었던 마을이라 마을 안길을 한길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 때는 전국의 도로를 대중소로 삼분하였다. 경주의 금주도(金州道:경주)에서 덕천역을 거쳐 황산도(黃山道:양산물금)역까지 구간은 대로(大路)에 해당되었다.

 

덕천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의 작천한증막(일제시 일인학교) 뒤 진장으로 가는 길의 모서리 집(교동리479-1번지) 부근이다. 역부지를 일본인 가와가미(川上)가 상점을 경영하다가 광복을 맞아 국유로 귀속된 땅이다. 역에서 수남마을로 통하는 중앙로가 나있었던 길을 수남부락에서는 지금도 한길(大路)라 부르고 있다. 명승지 작괘천, 작천정이 있는 마을이다.

 

향교마을

향교 마을은 우리읍 내에서 단 하나뿐인 간월산을 할아버지산으로 하는 봉화산의 바로 아래 있는 마을이다. 원래 수남행정마을의 자연마을이다가 분동되어 '향교'마을이 되었다. 옛날 언양현의 향교가 본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향교라 불린다. 수남마을은 중남초등학교학군이고, 향교 마을은 언양초등학교 학군에 속해 있어 분동되었다.

 

봉화산 꼭대기에는 조선조 때 통신 수단으로 쓰였던 봉화대의 석축물이 남아 있다. 봉화대 그 자리에 텔레비전 난시청지구 해소를 위해 KBS 방송국중계탑이 설치되어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교동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봉화산 세 손가락이 잘려 나가 혐오스러운 모습을 자아내고, 문전옥답이 택지로 변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사초는 뭐라고 써야하나.

 

언양향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돼 있으며, 향교에 보관되어온 언양현 호적대장은 지방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돼 있다.

 

벌장마을

벌장 마을은 수남행정마을 제11반이었다가 인구 증가로 1990년 9월 1일부로 분동. ‘벌장’이란 행정 마을이 되었다. 벌(閥)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므로 벌장마을이라 한다. 벌(閥)은 들보다 더넓은 들을 의미하는 뜻이 있다. 이 마을에는 1934년 최경택, 1936년 서정식, 1938년 김재도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박곤수가 농장경영과 동시 중남농지수리조합 이사(理事)로 역임하였으며, 1990년 벌장이 행정동으로 분동되고 마을 발전에 기여하였다. 박곤수의 농장을 안덕기가 인수하여 농장 2만여 평에 과수원을 조성하여 사과, 배단지를일구었다. 또한 대대적인 소, 돼지 목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자유당시절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마을을 빛내기도 하였다. 전작물로는 담배, 삼, 고구마를 많이 생산하여 식량으로 대용했다고 한다.

 

현 서석원의 창고터에 디딜방아간이 있어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진아파트 터에 남천산업 PP포대 공장이 1973년에 입주하여 종업원 300여명 규모로 운영하다가 1991년에 폐업하였다. 안덕기 농장 토지는 일제시 일본인 가와가미(川上)의 소유였으나 광복과 더불어 국유로 환원된 것이다. 여러 사람 소유를 거쳐 지금 소유자는 ㈜농심가 메가마트로 1997년 7월 23일 개장하여 영업 중에 있다.

 

대진마을

2007년 11월 29일부로 벌장마을에서 분동되어 2007년 말 현재 세대수 280호, 인구 947명의 신설 행정마을이다.

 

태봉마을

벌장마을로부터 대진마을과 더불어 2007년 11월 29일부로 분동되었다. 3개반으로 구성되었으며, 364세대, 1,072명으로 구성된 대단위 아파트 마을이다.

 

수정1리마을

수정1리마을은 자연마을로 교동리에 속하고, 면소재지마을이다. 국도35호선을 중심으로 농협, 파출소가 있는 서편은 가천리, 길 아래 부락 측 학교, 면사무소, 보건소가 있는 부락은 신화리에 속한다. 이 세 곳의 법정리가 걸쳐 있으며, 새진흥아파트, 부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옥산의 자수정은 폐광된 동굴을 이용하여 '자수정동굴의 나라'로 개발하여 관광사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수정2리마을

2015. 12. 31.자로 수정마을에서 분동되어 경동우신알프스타운 101동부터 104동까지 수정2리마을이 되었으며 총 9개 반으로 구성되어있다.

 

수정3리마을

2015. 12. 31자로 수정마을에서 분동되어 경동우신알프스타운 105동부터 108동까지 수정3리마을이 되었으며 총 7개 반으로 구성되어있다.

 

수정4리마을

2015. 12. 31.자로 수정마을에서 분동되어 경동우신알프스타운 109동부터 116동까지 수정4리마을이 되었으며 총 10개 반으로 구성되어있다.

 

중평마을

중평마을은 1990년 평리에서 분동하면서 평리의 중간에 위치한다하여 중평마을이 되었다. 중평마을은 남천내를 뒤로하고 앞에는 기름진 마위들을 품에 안고 한길 옆에는 물레방앗간이 돌아가는 한적한 인심 좋은 농촌 마을이었으며 서울산․삼남 IC의 이전으로 인구가 일시적으로 감소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차츰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평리마을

평리마을은 조선조 제22대 정조 때 이래로 평리라 불려오고 있으며 배 대단위 재배를 하고 있으며 축산업도 많이 하고 있어 축산업과 과수업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합리적 경영 방식에 기틀을 두고 있는 표본적인 마을이다.

 

풍요마을

풍요마을은 2009년 분동되었으며 계룡리슈빌아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계룡리슈빌은 657세대, 2,000여명의 인구의 대단지 아파트이다.

신화리

신화리는 조선조 숙종 년대(1675년~1720년) 이래로'쌍수정리' 이었던 마을이다. 그 후 일제초기인 1911년 쌍수정리를 신화리로 개칭하였다. 이때 쌍수정의 범위는 지금의 신화리와 다를 바없다. 1711년(숙종 37년:신묘)식 호적대장에 의하면 지금의 중남에 속하는 이(里)의 구분을 단지 세개 마을 즉 '덕천리'가 지금의 교동리로, '쌍수정리' 가 지금의 신화리로 '가을천리' 가지금의 가천, 상천, 방기까지 포함된 지역이었다.

 

신화리는 우리읍의 동쪽에 위치하며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다. 간월산을 할아버지산(祖山)으로 하는 봉화산계 및 신불산을 할아버지산(祖山)으로 하는 옥산(玉山)계의 평원 또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의 두 산 사이에작괘천이 흐르고 있다. 봉화산 영역의 교동리 평리마을 하단부에 도호마을이 있고, 교동리 수남마을 아래에 쌍수마을이 위치한다. 옥산계 영역에 속하는 교동리 벌장마을 동편 고속도로 하단에 후평마을이 있고, 교동리 수정마을 아래에 마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발전 여지가 잠재된지역이다.

 

신화리는 전통적 경종농업을 중심으로 배·축산 등 복합농업을 경영하고 있다. 최근들어 도호마을 대부분과 평리마을 일부가 경부고속철 역세권개발지역이 되어 활발히 공사가 진행 중이며, 역세권개발계획이 완료되면 도시적인 모습으로 마을발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신화(新華)라 함은 빛나고 번성하는 새로운 마을이라는 지향적(指向的)인 뜻을 가졌다. 신화리는 마산, 후평, 쌍수, 도호의 네 행정마을로 갈라져 있다.

 

마산마을

마을 동편에 있는 산(山)의 형세가 신불산을 향해 뛰는 말(馬)의 모양같다고 하여'말뫼' 라고 하였는데 한자음으로 표기하면서 ‘마산(馬山)’이라 하였다. 말뫼란 말은 높은 웃머리되는 산인「머리뫼」란 뜻을 가진 말인데, 이것을 한자로「頭里山·磊山·馬山」등으로 썼다.

 

우리읍이 삼동면과 통합되기 전인 중남면시대 면소재지가 있었던 마을로 중남면을 지탱해온 구심적인 마을이다. 일찍이 신문명을 받아들인 선각자가 많았고, 통합 삼남면의 초대, 2대 면장도 이 마을에서 배출하였다. 1925년을 전후하여 주경야독의 정신으로 문맹퇴치와 개화의사조를 받아들여,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마을 < 청년야학회 > 가 주동이 되어 야학당을 운영해오다가 중남보통학교 설립과 동시에 청년회 소유재산인 ‘구터산’을학교설립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후평마을

마산마을 뒤 벌판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뒷벌' 또는 '후평' 이라 한다. 1994년 마산마을에서 분동되어 후평마을이라하였다. 서쪽에는 ‘양밭골’이 있었는데 이 골짜기에 양을 방목하던 곳이라 한다. 평(坪)의 본래 뜻은 평평한 광원(廣原)을 말하는「새」에서 온 것이었다.

 

후평은 뒷벌의 한식(漢式)으로 된 이름인데 벌은 아주 넓고 평평한 땅을 가리키며 이의 거센말이 펄이니 같은 말이 된다 전통적 농업에서 축산(소·돼지)의 복합영농을 하고 있다. 특산물로 배(梨)가 있으며, 마을 연중행사로 음력 정월 대보름 전야에 마을 총회에서 선정된 제주(祭主)가 한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쌍수마을

작괘천(酌掛川)과 살미거랑(취성천) 두내(川)가 합수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쌍수라 하였고 그 냇가에 정자가 있어 쌍수정이라 하였다. 이러한 예를 가진 지명은 두동면 구미리(斗東面九味里)의 양수정(兩水亭)이 있다.

 

쌍수정은 신화리란 이름이 등장하기 전인, 이조의 정조 때부터 불러온 옛 이름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이를 신화리라 고쳤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처음 마을의 형성은'양박골'과 '음남숲' '동밋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앞 정자에 계수나무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계정지(桂亭地)'라 불러오다가 마을회의에서 '쌍수정(雙水亭)'이라 고쳐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에 두 거랑이 합쳐 흐르는데 하나는 신불산의 금강골취성(鷲城:일명단조성)에서 발원하여 금강골 폭포, 지푸내(深川), 상천, 마산 마을 앞 윤산(輪山) 밑의 '새밑거랑'과 신불산, 간월산 계곡에서 발원한 화천, 작괘천이 마을 앞에서 합수되었다는데 유래하여 지은 이름이다. 이 두 거랑이 합수되어 언양 남천과 도호마을㈜금강공업지점, 언양읍 '구늪숲' 앞에서 합수되어 태화강으로 들어간다.

 

쌍수정 마을에 들어서면 한눈에 펼쳐지는 넓고 넓은 계곡, 맑은 물, 푸른 숲과 마을을 잇는 징검다리가 놓인 풍경은 이 마을의 얼굴이었다. 지금은 큰다리가 세 곳이나 놓여 편리할 뿐 아니라 주위경치와 어우러져 산수화같은 아름다운 마을이다.

 

상천리

상천리는 신불산을 할아버지산(祖山)으로 하는 고장산 영역의 하단부, 방기마을의 청룡등인 무늘등의 영역으로 하며, 우리 읍의 동남쪽 최 하단부에 위치한다. 남북으로 국도 35호선을 중심으로 서편이 가천리이고, 동편이 상천리이다. 취성천(살미거랑)이 삼동면 조일리, 하잠리와 경계를 이룬다. 상천마을은 무늘등 끝자락에 있으며, 신안마을과 신복마을은 고장산 영역의 하단부에 있다. 경부고속도로상의 비행장 1/3이 고장산 영역에 있으며 넓은 들녘을 끼고 있다.

 

상천리는 조선조 제22대 정조(正祖)(1777년∼1800년)때는 울산군 중남면 가을천리(加乙川里)에 속해 있었다. 일제초기 1911년 가을천리 일부를 분할하여 상천리란 법정리동(法定里洞)이 되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신작로 현 국도 35호선을 개설됨에 따라 가천리에서 분리되어 길 아래를 상천리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상천이라 함은‘취성천’ 일명 ‘살미거랑’의 생긴 모양이 길게 코끼리의 코모양으로 굽었다 하여 상천(象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상형(象形)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생각하건데「象」의 훈(訓)은 한편으로 법(法)받을 상이기도 하며 불교를 상교(象敎)라고도 하는 것이니 '법받을 내(川)' 또는 '불내(佛川)' 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川」은「내」로서 이는 사람이 사는 터전 또는 땅이란 개념을 가진 것인데, 「川·壤·內·乃·惱·奴·奈·邦·難·路·盧」등으로 차자(借字)되어 왔다. 이는 하천(河川)과는 다른 것으로서, 마을명의 받침으로 쓰는 것이다.

 

상천리에는 신복(新卜), 신안(新安), 상천(象川)의 세 행정마을이 있다.

 

신복마을

신복마을은 신불산을 할아버지 산으로 하는 고장산의 영역에 속하며 ‘열두쪽배기’의 끝 부분인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아래에 분포되어 있는 마을이다. 산지는 없으며 들로 형성된 '들내벌'의 끝 부분에 있기도 하다. 명산인 신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동편으로 내(川)가 흐르고, 고만고만한 야산군(野山郡)이 형성되어 있어 풍수지리학적인 해석이 있음직한 지리적 여건을 이루고 있다.

 

조선조의 영조(英祖)때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대저 살터를 잡는 데에는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고, 인심이 좋아야 하며,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못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 신(新)복(卜)은 이러한 조건들을 다 갖춘 살기 좋은 복지라는 뜻이 될 것이다.

 

신복은 한일합병인 1910년 전에는「흠안」이라고 호칭하여 오다가 1928년 마을에서 점을 쳐서 새로운 명당자리가 신복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지리(地理)는 땅, 산(山), 강(江), 바다 등에 대한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이치를 말하는 것이며, 생리(生利)는 그 땅에서 생산되는 산물이나 이익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신복에는 '양달마을'과 '새각단'의 자연마을이 있다. 양달마을은 지형이나 지세(地勢)상으로 햇빛을 많이 받는 양달진 곳에 자리잡은 곳이라 '양달마을'이라 하며, '새각단'은 신복마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새로 된 마을이므로 새각단이라 한다.

 

신안마을

새롭고 평안(平安)한 마을을 이룩하려는 지향적(指向的)인 의지가 담긴 마을이름 이다. 본 마을은 서(西)로는 신불산 등을 내려 받고, 북(北)으로 언양읍을 5㎞지점에 두고 있으며 동(東)으로는 문수산을 눈앞에 두고, 마을 앞으로 옛 신라시대의 대로(大路)인 통도사와 경주로 통하는 길이 남북으로 통하고 현 경부고속도로는 마을 등뒤로 통하는 가운데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본동은 울타리 없는 집과 집 사이로 정(情)을 나누며 살아 왔다. 도둑 없는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현재도 미래도 이와 같이 살아갈 삶의 터전이다. 신안마을은 원래 아름드리 거목과 잡초와 돌뿐인 불모의 황무지였다. 이곳에 8·15해방 이후 귀환동포 150세대가 정부에서 마련해준 천막집에서 정착하면서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구호품에 의존하면서 황무지 개간에 착수하였으나 갖가지 난관에 부닥치자 각처로 떠나고, 1953년경 10년간 15세대만 잔류하게 되었다. 그러자 도(道)에서 앞산 목재채취를 허가하여 초가(草家)3간 퇴집(마루가 있는 집, 지금 두 채 남아 있음)을 짓게 하였다. 그후 1960년에 군내(郡內) 영세민 37세대가 이 마을에 이주하여 자력(自力)으로 움막집을 마련하여 정부 구호품인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로 끼니를 이어오면서 68년에서 8년간에 걸쳐 50㏊의 황무지 땅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고, 4(넷)치각(삽보르)각재(角材)로 3간 툇집을 정부지원으로 18동 마련하였다.

 

그 후 차차 생활이 안정되어 주택개량사업이 이루어져 새마을로 변모하였다. 그때까지 신복 1개반, 상천 1개반 2개 자연반(自然班)으로 흩어진 마을을 단일 자연마을로 구성하고자 내무부에 건의하여 1973년 1월 1일부로‘신안(新安)’이란 독립마을로 승인 받아 희망찬 출범을 하게 되었다. 1976년 갖가지 소득사업을 추진하여 새마을 훈장 협동상을 받아 외국인 홍보마을로 선정되어 새마을 운동의 산 교육장이 되었다.

 

밭농사, 논농사를 주로 하는 경종농업에서 가축을 도입하여 한우을 사육하는 등 복합영농경영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주민의 피나는 노력으로 오늘날의 부자마을로 변모하였다. 축산으로 생긴 부산물인 퇴비·구비(堆肥·廐肥)를 이용, 지력을 향상시키고 경영 합리화를 기해 과수(梨)농사에도 주력하고 있다. 토지이용의 극대화를 도모함과 동시 농가소득 증대를 향한 의욕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본 마을은 시대흐름에 능동적으로 잘 적응하는 마을이며 협동정신이 투철한 희망이 넘치는 마을이다.

 

상천마을

본 마을은 약 300년전 채(蔡)씨, 변(卞)씨, 울산 박씨(朴), 의흥 박(朴)씨, 인동 장(張)씨, 청주 한(韓)씨, 나주 임(林)씨 등의 성(姓)을 가진 분이 10여 가구를 형성하여 양산 통도사 사답(寺畓)을 소작하며 삶을 이어 왔으며 이로 인하여 생긴 마을이다. 오랜 기간 동안 가을천리에 속하였다가 1911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법정리동이 되었다.

 

상천에는 고려 선종(宣宗)때 세운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가 있다. 국장생 이라 함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세운 장승이란 뜻이며 이 석표는 울산광역시 지방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는 양산군 하북면의 것과 같이 통도사의 경계를 표시하는 석표이다. 고려 때는 절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호부(戶部)에서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전토(田土)의 경계선에 세운 것이 국장생석표이다. 상천리의 국장생석표는 높이 172㎝, 폭70㎝, 두께 30㎝나 된다.

 

연봉마을

연봉마을은 신불산을 할아버지산으로 하는 무늘등(방기 청룡들) 영역에 속하는 사자평(獅子坪)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연봉마을을 연봉진(連峰陣)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자평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적을 맞아 장열하게 적을 무찌른 곳이다. 연봉진의 진(陣)은 군사적인 용어와 관계가 깊다. 즉 군인의 진중(陣中)을 의미한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여기서 진(陣)을 쳤다고 하며, 역시 왜병이 주둔하였다고도 전한다. 6·25때는 미군들이 주둔하기도 했다. 사자평과 금강골은 지금도 군부대의 포사격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 유탄으로 말미암아 산불이 잦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본마을을‘연봉진(連峰陣)’이라고 한다. 본부락은 지리적 여건으로 방기리, 상천리, 가천리, 삼동면 조일리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연봉마을을 일명‘대문다리마을’이라고 하는 딴 이름이 있다. 지금도 암리, 상천리의 고령의 촌노들에 의하여 자주 듣는 마을 이름이다. 지금의 상천리 949-3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대문이 많은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이 일대에 부서진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다. 본 부락 일대에는 무연고의 큰 무덤이 많았는데 신라시대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의 흙을 경주에서 운반하여 묘를 섰다고하는 전설도 전해 왔다. 지금은 개발의 물결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명절이나 제사가 들면 이웃마을인 지내마을·상천마을·조일마을, 사람들이 기왓장을 주어다가 가루로 만들어 놋그릇을 닦는 재깨미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국도 35호선에 접하고 있는 ㈜오뚜기식품, 삼성SDI㈜ 부지 전부, 군포부대(軍)‘사자평’이라 불렀던 바, 이 일대 백 수십 정보(ha)가 '경상남도면양장' 으로 면양의 품종개량과 증식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는데 일반적으로‘양목장’으로 불렀다. 해방과 더불어 이곳이‘경상남도종축장’으로 바뀌어 가축의 품종개량과 보급을 목적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1957년 종축장이 부산 개금동으로 옮기자, 1957년에 '경상남도사료원종장' 설립을 보게 되었다.‘사료원종장’은 사료작물의 품종개량에 따른 시험사업과 사료작물의 종자생산 보급을 목적으로 하였다. 포장관리에 따른 인력동원은 주로 연봉마을에서 충당하였기 때문에 농외소득으로 생계에 도움이 많았다.‘사료원종장’은 1972년‘경상남도종축장’과 통합되었으며, 1972년에‘경상남도가축보건소 동부지소’가 부지 일부를 할애 받아 설립되었다. 나머지 땅을 1997년 '경상남도임업시험장포지’로 사용한 후 경상남도에서 처분하여 1991년에 ㈜오뚜기식품이 입주하였다. 경남가축보건소는 2000년 10월 1일부로 울산광역시보건환경연구원 가축위생시험소로 변경 이관되었다.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오랫동안 인근 주민들은 최신의 농사정보를 입수, 영농에 반영하여 온 것이다.

가천리

가천마을 서(西)편으로는 소위 '영남알프스' 라 하는 고산의 일곱 산봉오리 중 두 번째로 높은 영봉(靈峰) 신불준령(神佛峻嶺)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서로는 상북면 이천리를 경계로하고, 남(南)으로는 본면의 방기리, 북(北)으로는 상북면 간월산을, 동(東)으로는 상천리를 경계로 한다. 가천리에는 신불산을 할아버지 산으로 하는 야산이 4개가 있다.

가천리의 행정적 지명의 표기는 조선조 세종 6년(1460년)~성종 16년(1485년)에 완성된 호전(戶典)에 처음으로 표기됨을 볼 수 있다. 헌양현 남쪽에 흐르는 남천(南川)내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을 ‘천남(川南)’ 북쪽을 '천북(川北)' 등으로 나누었다. 천남에는 가을천리(加乙川里)와 대토리(大吐里)만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예종 원년(1469년)의‘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역시 같은 표기를 볼 수 있다. 이 때의 가을천리 일대는 중남면 지역에 해당되고 대토리는 삼동면지역으로 향토사학계는 보고 있다. 숙종 37년(1711년)‘언양현호적대장’에 의하면 중남면은 덕천리(德泉里), 쌍수정리 (雙水亭里), 가을천리(加乙川里)의 3개 리동이 보일 뿐이다. 이 때의 가을천리는 방기리, 상천리까지 포함하는 얼안(범위)이었다. 1864년 고종 때까지 가천을 가을천(加乙川), 대야리(大野里)라 하였으며 1911년 장제(장자골)와 대가천(큰들내)이 분동 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장제마을을 합(合)하여 가천리가 되었다. 그후 1930년을 전후(前後)하여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통(通)하는 신작로(新作路)를 개통하게 되었다. 이 길이 오늘의 국도 35호선이다. 이 국도 35호선 아래는 화산리(華山里), 상천리(象川里), 붉은디기 등으로 분리(分離)되고 35호선 국도를 중심으로 위로는 장자골, 큰들내, 작은들내, 강당, 지내, 기푸내, 공암, 새각단, 밤벌 등 자연부락이 가천리(加川里)이다.

“들내”,“작은들내”,“큰들내”,“기푸내”,“지내” 등의 마을 이름은 한문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불러온 순 우리 말이다. 한문(漢文)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 우리말의 음에 한자(漢字)의 음을 따서 음사(音寫)하거나, 뜻을 따서 표기하는 방법을 이두(吏頭)라 한다. 이두는 신라시대부터 표기해 오다가 이두식 독법(讀法)이 사라지고 한문식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순 우리말인‘들내’에 대하여 이두로 표기해 보면 첫째“들”하는 소리에 대하여 한자를 골라보면 더한다는 뜻을 가진“더할가”의 한자인“加(가)”를 취하게 되고, 둘째로“내”하니“내”는 내천자(川)의 우리 말의 뜻을 한자 음으로 취하여 “加川” 이 된 것이다.“들내”는“들에 있는 내”의 뜻으로 억지로“野川”으로도 표기가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실재로‘큰들내’제4반을‘벌’에 있다고 하여‘벌반’이라고 하는데‘장자골’밑에서부터 가천리 537번지 주위를 지나 강당마을 사이까지 부산우유 제2공장 앞 포장길을 따라 국도 35호선까지 큰비가 오면 이 일대가 대하천으로 변한다. 이름 그대로“들내”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마을이 크지면서 분동되고, 한자가 보급되면서 한자로 표기하게 되었는데‘큰 들내’를 1911년에는 大加川(대가천), 大野里(대야리)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또는‘작은 들내’를‘小加川(소가천)’이라 표기하였다. 또“들내”를 야벌(野伐), 큰들내벌(大野閥), 加乙川(가을천), 가알천(伽謁川)이라고도 하였다. 이두(吏讀)로 「加乙川」로 표기하여 부르다가 이두의 독법이 사라지면서 이것을 한문식(漢文式)으로 읽게 되고, 3자로 된 지명은 번거로우므로 두 자로 된 지명으로 변하여 1911년에는 가천리(加川里)가 되었다.

가천마을

가천마을은 신불산을 할아버지 산으로 하는 고장산 영역에 속하는‘큰들내’와 옥산 영역에 속하는‘작은들내’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에 소 가천(小加川)이 신불재 대피소 부근 샘(泉)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가관이다.‘공암저수지’는 수량이 풍부하며 작천보와 더불어 수정·벌장·마산·후평 일대의 광활한 농지에 물을 댈 뿐 아니라 못뚝에서 신불산을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이다. 신불산 케이블(철삭도:鐵索道) 계획도 이 공룡등(칼등)의 경관을 노려서 운위되고 있다.

들내’를 가을천(加乙川) 또는 대야리(大野川)이라 하였으나 철종 9년 (1858)에 처음으로 가천(加川)이라고 하였다. 대가천(大加川), 소가천 (小加川)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으나 장제마을에서 연유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입으로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문동수네’ 문씨라고 전해 오나 그 후손은 현재 한 집도 거주하지 않는다. 1708년(숙종 34년) 밀양 박씨 족보, 무자보에 의하면 조선조15대 광해군 8년(1616:병진)경 인조반정(인조반정, 1623:계해)의 징후(徵候)를 감지한 밀양 박씨 박태재(朴泰齋) 일가(一家)가 화를 피하기 위하여 낙향(落鄕)하여 '안장자골' 가천리 1081번지에 정착하여 시거(始居)하였다고 한다. 그 후 몇 집은 지금의 가천마을에 흩어져 살았으며 1900년대 석유(石油)가 처음으로 등유(燈油)로 농촌에 보급 되였다. 그 때‘솔가지’ 또는‘아주까리 기름’‘쌍어애 기름’ 등으로 등불을 밝히던 시절이라 석유의 사용방법을 잘 몰라 음력 11월 13일 안장자골 마을 일대가 불이 나서 마을이 깡그리 타버렸다. 몇 가호가 고장산비탈 닥 밭(한지원료)과 모시밭(楮田:모시베원료)을 헤치고 집터를 마련하고 건축 목재는 발화인 소유인‘썩갓’(현 안장자골 뒷산)에서 베어다가 집을 지어 현 가천'보리미' 와 '굼턱' 에 옮겨 살게 되었다.

'작은들내(小加川)' 는 소가천 냇가(川邊)에 3∼4호가 모여 취락(聚落)을 이루고 1920년대‘공암저수지’ 축조와 밀양박씨 재실 및 송태관 재실건축 공사가 이루어져서 한때 10여 호이던 것이 근년에 이르러서는 농가 호수가 감소되었다. 마을 위‘뒷골들’과 마을 아래‘산도밭들’에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해 오던 작은 산촌이‘큰들내(大加川)’와 합쳐 한마을이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본을 알 수 없는 박씨가 처음 살고 있었다고 전하여 지며, 일제 때 전가족이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지금은 각성 6∼7성이 모여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가천 마을은 '작은들내(小加川)' 와 '큰들내(大加川)' 두 개의 뜸(聚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더욱 작게는 '보리미' 와 '굼턱' 및 '아랫마을' '벌동내' 의 내 뜸으로 갈라져 있다. 길다랗게 고장산 기슭에 동남(東南)을 향(向)해 위치한 마을이다.

가천마을은 논농사는 적은 편이며 산지에는 밤나무, 들녘에는 배과수원이 주작목을 이루고 젖소, 한우비육사업이 활발하며 농가소득이 높은 편이다.

공암마을

'소가천저수지' 뚝밑 '산도밭들' 언덕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여름철 밭에서 일을 하다가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크기의 바위 구멍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공암(孔岩)' 이란 용어가 나왔다고 전한다. 원래는 공암 안마을 뒷산 기슭에 몇 가호만 있었는데 신작로(현35호 국도)가 생기고 1920년대 소가천저수지·송씨재실 등 토목공사판이 벌어졌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전국각처에서 품팔이를 하기 위하여 유동인구가 모여들었다. 신작로 양편에 옹기종기 집을 지어 촌락을 이루었다. 이 촌락이 "밤벌동네" "불건디기" 등의 소지명(所地名)으로 형성(形成)된 동네다. 오랫동안 큰들내(加川)마을에 속하여 있었으나 1984년 2월 5일부로 분동 되여 행정리동이 되었다

공암마을의 당수(堂樹)는 소나무이고 수령 약 100년 가량이며 수호신을 모시는 당우가 있다. 가천리 131번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 당제(堂祭)를 지내며, 오곡의 풍요와 마을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데 제주는 동민이 선정하였으나 지금은 이장이 제주가 되어 행한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며 지신밟기를 하여 가운의 융성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강당마을

지명의 유래는 국지대찰 (國之大刹)인 통도사의 강당(講堂)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강당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재고의 여지가 많다. 이 마을은 지푸내(深川)·장자골(長提)·강당·에덴마을 등 뛰엄 뛰엄 흩어져 있는 마을이다. 1933년 가천리에서 분동 되어 새로운 행정구역을 이루었다. 여기서 잠깐 이 마을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제마을은 안장자골·바깥장자골(일명 새각단)의 2개 뜸으로 이루어진 자연 취락마을 이다. 1616년 병진년에 밀양 박씨 밀직부원군파 박태재(朴泰齊)가 가천리 1081번지에 최초로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고 지푸내(深川)란 말은 내(川)가 깊(深)다 하여 깊은내(深川)이라는 뜻이 담긴 사투리로‘지푸내골작'을‘지푸내'라 한다. 이 지푸내 기슭 심천(살미거랑:취성천) 냇가(川邊) 비탈 논에 못을 막았는데 이 못이 심천저수지이다. 이 제방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강당마을은‘조산등'(가천 산 177-1) 동남쪽 솔이 우거진 들판에 벽진(碧珍) 이씨가 구한말 초기에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1920년대 신작로(35호 국도)가 개설되고 심천저수지 축조공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각처에서 인력(人力)이 모여들어 길가에(35호 국도) 술집(酒幕) 및 각종 행상(行商)인이 생겨났다. 행상 품목으로는 바디, 솔, 채, 과자, 비단 등이었다. 이 강당마을에 저수지공사의 총수인 일본인 다가하시(高橋)가 입주하고 또한 한국인 통역사(윤상용)가 옮겨 살게 되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에덴마을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는 마을로써 천상세계를 추구하는 뜻이다. 에덴농원마을을 줄여서 에덴마을이라 한다. 8 15해방으로 생긴 난민을 수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기독교장로회 소속인 중남교회가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로 이루어져 있다. 초창기에는 닭, 돼지, 한우 등 가축을 위주로 한 축산마을 이었다. 강당에는 심천(深川), 장제(長堤), 에덴마을의 자연마을이 있다. 심천은 저수지 밑 깊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강당마을에는 자연취락형 가구가 260여세대가 살고 있으며 배(梨)과수농사가 많고, 한우비육 등으로 축산업과 복합농업경영을 하는 농가가 많다. 주민소득이 삼남읍에서는 상위권에 들어가는 편이다. 장제 마을은 30여호로 형성된 오래된 자연마을이다.

지내마을

지내마을은 신불산을 할아버지산으로 한 무늘등(문을등) 아래 사자평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35호선에 접한 마을이다. 못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뒤로는 '금강골폭포' 에서 흘러내리는 '지푸내(深川)' 를 뒤로하고 강당마을과 접하고 있다. 서남으로는 넓은 황무지였으나 '사료원종장' 의 포지(圃地), '주축영농부락' 에서 논밭(田畓)으로 개간한 들이였다. 지내마을은 본래 가천마을에서 분동된 강당마을에 속해 있었으나 인구증가로 인해 1993년에 분동된 신생 마을이다.

1969년도에 이 일대가 200ha 규모의 공장지역으로 공포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장지역으로 정해졌다. 당시 '삼성SDI' 에서 개별적으로 부지매수 교섭이 있었으나 마을회의에 의하여 마을을 존속키로 결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부락은 공장지역으로 지적고시 된 지역임으로 주택의 신축이나 개축에 대한 심한 규제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 '삼성SDI' 의 하청업체를 비롯 군소 공장들로 둘러 쌓여 있다. 원호 17호는 모두 순 농가였으나 셋방살이와 공장입주를 합하여 60~70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수 개의 삼성SDI의 협력업체, 수 개의 중소기업체가 산재된 마을이다.

방기리

방기리는 취서산(鷲栖山) 단조봉(丹鳥峯) 아래 있는 마을이다. 단조봉을 '영취산'(1059m)이라고도 하는데 소위 '영남알프스'라는 고산군(高山群) 중의 하나다. 옛 언양현의 읍지나 양산현의 읍지 기타 향토지를 보면 어디에도 '영취산'이란 이름은 볼 수 없다. 다만 언양읍지에는 간월산, 신불산, 영취산 일대를 취서산(鷲栖山)이라 하고 현의 남 12리에 있다 하였다. 양산읍지에는 영취산(靈鷲山)을 대석(大石:火石)산으로 이름 지어져 있다. 다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통도사에서만 '영취산(靈鷲山)'을 영축산(靈鷲山)이라 발음하여 부르고 있으나 틀린 것은 아니다. 영축산(靈鷲山)은 석가(釋迦)가 설법한 인도의 산을 말하는데 통도사의 뒷산이 인도의 영축산(靈鷲山)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같은 이름은 방기리에서 동편으로 마주보이는 문수산(文殊山)의 옛 이름도 청량, 울산에서는 영축산(靈鷲山)이라고 불렀다.

 

방기들은 비록 큰 산 밑에 있으나 한건하여 금강골에 옛부터 사자보를 막고 못을 막아 무늘등(청룡등)을 잘라 수로를 내어 농사를 짓고 있다. 이들 사지보와 사지못은 그 소재지와 몽리구역이 다름으로 사자평의 경작자와 방기들의 경작자간에 물싸움이 자주 일어 난 곳이다.

 

그러나 하들(하방기)은 저지대라 상부에 있는 넓은 사자평지대의 물이 모이는 곳임으로 비교적 수리가 안전하여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았으며, 선사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고, 하들에서 천석지기가 난 곳이다. 상방과 방기마을은 방기 제1지구, 제2지구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되어, 주거지역으로 변모하는 마을이다.

 

방기는 우리 말로 방터, 또는 방대라 하는 마을이다. 이곳에 방씨(方氏)가 많이 살았던 곳임으로 방터 또는 방대라 부른다고 한다. 방씨가 살았다고 하는 곳은 청룡등의 고개 밑 굼벌의 '남녘각단'에 살았다고 전해 온다. 방대의 「대」는 흔히 한자(漢字)로 「臺·大·台·垈」로 서사(書辭)하는 말인데 산아래의 높은 지명에 붙는다.

 

'방터' 라는 어원으로 추리해서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으나 방기마을은 통도사와는 등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4월 초파일이 되면 절에서는 방이 모자라 방을 빌려주는 곳이라 하여 방터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방기리에 뿌리 내리고 사는 집은 초파일의 행사가 끝날 때까지 찾아오는 많은 인원의 일가친지,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행사를 연례행사로 치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방터에 사는 집이라면 방이 많아야 한다는 뜻이 내포된 지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방기리는 양산과 경계하고 있음으로 양산생활권과 가까운 편이다.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 3, 8일의 5일 시장을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화도 양산국을 이용하고 있다. 도시계획구역 역시 신평도시계획권에 들어 있으며, 2000년 울산광역시 기본도시계획조정에 따라 울산도시계획권에도 포함되어 있다.

 

방기마을

방기 마을은 2000년 1월 1일 하방에서 분동된 마을이다. 전통적인 농촌마을이었으나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인구가 증가되어 농경지가 주택지로 변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원래 방기리는 상방․중방․하방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중방이 방기리의 중간이 있다고 하여 중방이라고 불러 왔는데 방기의 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울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10호인 알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상방마을

상방마을은 영축산의 동녘에 위치한 마을로 방기리의 맨 위에 위치하여 상방이라고 하며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방마을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삼아아파트와 구획정리지구개발 등으로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2015. 12. 31.자로 상방마을에서 분동되었다.

 

하방마을

하방 마을은 일제초기(日帝初期) 1911년에 방기리에서 분동 된 마을이다. 다시 2000년 1월 1일부로 방기와 하방으로 나누어지면서 방기리의 맨 아래에 위치한 관계로 '하방'이란 지명을 부여받았다. '하들' '난민' '인석골' 등 자연 마을로 구성된다. 동쪽은 삼동면 조일리, 북쪽은 연봉 마을, 서쪽은 방기 마을, 남쪽은 양산시 하북면과 접하고 있다.

 

1967년에는 중남초등학교 방기분교가 1973년에는 방기초등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69년에 전기시설이 완료되어 문화생활을 향유하게 되었다. ‘난민마을’은 가천리 강당에 있는‘에덴농원’입주와 같이 생긴 마을로 생활구호 대상자를 집단적으로 입주시킨 예다. 이로 인하여 주택개량사업이 잘 이루어져 마을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방기리는 높은 산밑이라 물이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었다. 2000년 7월부터 1일 취수량 100t 이상의 지하수를 울주군 상수도사업소의 지원으로 개발하여 10월 15일부터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 또한 2000년 들어 정부의 지원으로 마을 뒷길, 앞들 농로 포장을 하였다. 2001년 들어 하방 뒷들 농로 포장 및 농수로공사를 4월말까지 준공할 계획으로 있다.

 

96여세대 283여명이 적을 두고 있으며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다. 일반음식점, 주유소 등 서비스산업 종사자도 많으며 농업 종사자는 논농사 농가 14여세대 경작면적 29,000여평, 밭농사 농가 11여세대 22,000여평, 과수원(배) 6여세대 14,000여평을 경작하며, 축산농가 6여세대 73여두의 소를 사육하고 있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