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읍

사람이 희망인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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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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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리욕바우(욕바위)

상평 마을 상단부인 큰 봇도랑 위 봉화산 돌출부의 끝머리에 높이 약 7∼8m 가량 되는 바위가 서너 개 모여 있었다. 마위들에 관개(灌漑)하는 큰봇도랑, 갓봇도랑의 역사나 보정비를 할 때 보간구(보 관리인)가 아침 일찍 이 바위에 올라 보정비에 따른 연장을 가지고 나오라는 소리를 육성으로 고함을 질러대며 외치는 곳이었다. 즉 "아침 일적 먹고 지게, 바지게, 꽹이, 꼬꽹이, 소시래이, 호미, 삽을 가지고 오이소" "그리고 헌 가마니이나 헌 성피때기 있으면 가지고 오이소" 라고 육성방송을 하였다.

마위들의 경작자는 주로 언양읍 사람이 많았으므로 서부리, 남부리, 평리를 향해 고함질러 댔다. 아침의 적막을 가르고 멀리까지 울려 전달되었다. 바람이 역방향으로 부는 날이면 못 들었을까 봐 물을 건너 언양읍 방천뚝을 따라 방천목, 서부리, 남부리, 소전걸을 따라 내려가며 외쳤다. 수리시설 정비에 따른 인부 동원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욕바위에 올라 이번에는 쌍소리 욕을 걸쳐서 고함지르므로 '욕바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교동구획정리사업으로 없어졌다. 그 유명했던 보강구는 정거정 마을에 살았던 염 작지(廉 作之)라는 노인이었다. 염 노인은 새경으로 가을 추수기에 한 마지기 당 나락단(벼단) 한 단식을 거두어 새경으로 하였다.

문동수네

“애취! 이놈의 고뿔아 문동수네 맏며느리 집으로 가거라.”

“애취! 이놈의 고뿔아 들내(加川)문동수네 맏며느리 집에 가거라”

 

전설로 구전되어 오는 말은 다분히 무속적이다. 지금까지도 이 지방에는 간혹 고뿔(감기)이 걸렸을 때 약 대신 물리치는 방법을 써 왔다. 이 방법은“애취! 이놈의 고뿔아 들내(加川) 문동수네 맏며느리 집에 가거라”하고 물리친다. 그 무당(무꾸리)의 방법은 부엌식칼을 시퍼렇게 갈아 날을 새우고, 한 바가지 물에 잡동사니 음식을 풀고, 환자의 머리를 이 물바가지 앞에 수그리게 하고, 부엌칼로 물바가지를 탁탁 몇 번 두드리며 환자의 꼭지 머리카락을 몇 번 뜯으면서, 사설을 섞어 가며“애취! 이 놈의 구신아 듣거라 보자---한바탕 호통을 치며 꾸짖듯이 달래듯이 푸닥거리를 한 뒤, 돌아서서 물바가지 물을 훽 뿌리고 부엌칼을 대문(삽짝) 쪽으로 내던지며, ---"고뿔아 들내 문동수 맏며느리 집으로 가거라”하며, 그 자리에 칼로서 열 십자를 쓱싹 끄어 놓고 그 위에 빈 바가지를 엎어 놓는다. 그러나 문씨 집터 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고장산 발치 대가천마을 보림이 근처인 듯 하다. 현 가천리 396번지 주변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기와장(재깨미)이 간혹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문동수네 집터가 아닐까 하는 추리만 무성하다.

 

신불산의 애환

신불산이라고 산 이름을 언제 부터 부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문헌상으로는 그 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리라 짐작이 갈 뿐이다.

남으로는 통도사 뒷산인 영축봉으로 부터 동남으로 내리 뻗는‘무늘등’을 경계로 하고, 북으로는 간월산을 경계로 한 '쇠판골' 능선을 가장자리로 하여 병풍처럼 가천마을을 감싸고 있다. 영축봉 바로 밑은 영묘한'금강골폭포'가 우수기에는 장관을 이룬다. 언양헌지 산천조에 보면 금강골 폭포를 옛 어느 시인이 금강산 폭포를 비유하여 노래한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이란 시영(詩詠)을 보게 되며, 봄이면 산나물을 뜯으려 원근 사람들이 산정에 위치한 '가천재(주개덤)'일대에는 '반달비', '곤달비'를 뜯고, 산안 '큰골' '작은골'에는 '참나물', '호망추', '배뱁추', '더덕' 등 각종 산나물을 뜯고, '고사리밭' 등에는 '고사리', '꼬치미'를 채취하기도 하였다. 여름이면 계곡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가운데 우거진 녹음 속에 마을 소를 방목하여 목장이 되기도 하고, 또한 '큰골' '작은골' 비탈은 녹비(綠肥) 예초(刈草)장이 되기도 하였다. 가을에는 '무늘등' 금강골 '큰가거내' '작은가거', '큰골' '작은골' 쏘다니며 머루 다래 '사리버섯' '송이버섯' 따다 언양장, 신평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겨울이면 땔감(柴木)의 채취, 나무함지(函), 남바가지, 각종 농기구 자재(資材)의 원산지 이기도 하였다. 우리들 삶에 큰 도움을 주는 보고(寶庫)이자. 젖줄이기도한 신불산이다.

이름만 전하는 옛 절터에서는 기와장이 조각이 발견되고,‘쇠판골’에는 야철장이 있었다는 곳으로 시우쇠 덩어리가 발견되고 있으며,‘점터골’에서는 엽전을 주조한 곳이라고 전해오는 등 전설이 곳곳에 흩어진 채로 전해오는 신불산천이다. 그러나 워낙 험한 신불이기에 임란 때는 왜적놈의 간장을 서늘하게 한적이 있는 단조성지(丹鳥城址)가 산정에 있고 1950년대 공비( 共匪)들이 준동(蠢動)이 극심하였다. 특히 682 고지에는 그들의 철옹성같은 근거지가 있었다. 지금은 '둘산등' 바로 밑 산중턱까지 배밭이 되고, 중턱에는 뛰엄 뛰엄 농장이 들어서고 밤이면 전기불이 산 중턱까지 밝게 비춘다. 밤이면 싸늘한 산바람이 산 정상(頂上)에서 내려오는 고요한 산정(山情) 야경(夜景)을 맛(味)보는 신불산이다.

신불산 바람이야기

신불산은 울주군 삼남읍 가천리, 상북면 이천리, 등억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209m. 6 25동란시에는 공비들이 신불산을 거점으로 양산시 일부지역과 울주군 일부지방 및 서부 6개면을 활동지구로 하여 준동한 근거지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과 열사들이 구국결사대(會盟)를 조직하여 홀연히 떨쳐 일어나 단조성(丹鳥城)에 진을 치고 왜적과 싸워 선혈을 뿌린 고혼이 잠들고 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우리 나라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유일한 신불산 '단조늪'이 있다.

 

근래에 와서 취서산, 신불산, 간월산, 능동산, 가지산, 천왕산, 제약산, 이 일곱 괴산(塊山)을 언제부터인가 많은 산행 인구가 일어남에 따라 국적불명의 '영남알프스라'고 이름지어 회자되고 있다. 산은 인간의 영혼이 시작했던 출발점이자 회귀점이다. 자기 고장의 산을 살핀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산에서 터득한다는 말과도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신불산 산록에 생을 걸고 사는 우리들에게 '신불산 바람'은 신화 같은 존재다.

 

엄동설한에 시베리아 삭풍이 "우우우" 소리내며 신바람나게 달려오다가 신불산 산마루에 다달아 앞이 확 트인 벌판을 내려다보며 "여기가 어디고"라고 한 바람이 물으면 또 한 바람이 "들내·방터(加川·芳基)다"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두 바람이 어울려 '한바탕 놀고 가자'며, 우당탕 돌개바람 덜컹덜컹 들었다 놓았다, 밀었다 당겼다. 한 바탕 회오리바람으로 놀고 간다. 우당탕거리며 도깨비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 수만 마리의 기마가 내달리듯, 하늘이 찢어지는 비명과 더불어 펄럭거린다. '들래·방터가 넓다해도 소깝(소나무가지)한 단 둘 데 없다.' 는 말이 생겨났고, 지방 사람들은 "큰 머슴이 지나갔다"고 말하고 "큰 머슴 온다"고 말한다. 시끄럽고 분탕스러워 의지할 곳 없다는 '들내·방터바람'과 가지산 능선을 지나 석남사계곡에서 물보라 뒤집어쓰고 궁근정·길천·만댕이갱빈·부리소봇덤·화장산모퉁이 돌아오는 차고 맵고 시린 '남천내 강바람'이 사돈하자고 혼담이 오고 갔는데 차고 맵고 시린 '남천내 강바람'이 들었다 놓았다 우당탕 시끄러운 '들내·방터바람'을 < 깡아리 > 없다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때로는 이 바람이 일찍 한가을에 불어와 논에 벼를 베어 깔아 놓은 것을 회오리(호더락)바람이 둘둘 말아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섞어 놓아도 제 논바닥에 깔린 만큼, 색깔로 제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만큼 허욕 없이, 다툼 없이 걷어 가는 미덕을 알게 모르게 지녀 왔다.

 

그래서 들내·방터 삼남 사람들은 신불산 바람이 불어오면 아이들은 이불 밑으로 파고 들고, 아낙들은 장독대 뚜껑 걱정이고, 남정네들은 지붕 홀랑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 잠기곤 한다. 때문에 삼남읍 사람들은 미리 준비하고 단속하고 부지런하여 믿을 수 있고 치산(治産)을 잘한다고 전해 온다. 우리고장은 몬순기후의 영향으로 태풍을 면할 수 없는 곳이다. 특히 근래에 와서 배농사가 두드러지게 농가소득증대 종목으로 되었다. 해마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크므로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배 재배 방법의 하나로 콘크리트 기둥과 철사로 실끈을 만들어 배나무를 붙들려 매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 방법 역시 바람을 단속하고 다스릴 줄 아는 지혜의 소산 아닌가. 신불산 산록에는 '메추리 두 마리가

 

와서 한 마리는 울고 간다'는 말과 같이 넓게 펼쳐진 황무가 많았다. 이를 개간하여 과수, 축산, 벼농사 등 복합영농을 하고 있다. 개척정신이 강하여 흡사 제주도의 감귤농장 돌담처럼 담을 쳤는데 마치 성곽 같기도 하다. 별보고 나가고 별보고 들어오는 사람들. 2·7 언양 오일 시장날 쌀(싸전)을 비롯하여 우시장·채소 전·배, 감, 밤 등의 과일류 등 농축산물을 장에 내다 팔았다. 삼남사람 빼면 2·7 언양 오일 시장이 안 열린다는 말도 전해왔으나 지금은 유통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두 개의 축산계와 배 작목반, 시설채소 작목반이 조직되어 있으며 우리 나라 굴지의 공장 삼성SDI, 오뚜기식품을 비롯하여 1998년에는 51개, 기업체에서 2001년에는 61개 기업체가 들어서 있어 농공병진의 모범면으로 변모하였다. 농외소득 등으로 부유한 면(面)으로 활기찬 내일을 열어가고 있다.

가화만사성

옛날 옛적 산마을 어느 집에 노인 내외, 젊은 내외 네 식구(眷口)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각각 산으로, 들로, 마을로 볼일 보려 나갔다네. 며늘아기 어쩌다 실수하여 빨랫감을 태웠단다. 그 중의 한 벌 옷은 부자(父子)가 같이 입는 나들이의 큰 옷이라, 큰일났네 큰일났네 죄책감에 사로잡혀 한나절을 근심으로 보냈단다. 어느 듯 때가되어 나간 식구(眷食)들 돌아 왔다네. 시아버지 하시는 말씀, "아가아가 며늘아가 너의 안색 보아하니 수심이 짙었구나." 하니 며늘아기 "나들이옷을 태웠다." 고 고백하니 시아버지, 이 말을 듣고 "걱정 말라 걱정 말라 너의 과실 아니로다." "그 솥은 내가 샀고, 그 솥을 사올 적에 땔나무를 아끼려고 밑 엷은 것을 골랐기에 이런 변고 생겼구나." "밑 두꺼운 솥 샀더라면 이런 탈은 없었겠지 내 잘못이 아닌가".

아들서방, 이 말씀 듣고 나서며 하는 말이 "아버지도 저 아낙도 잘못한 일 전혀 없소", "며칠 전에 장작 팰 때 잘 타라고 잘게 팬게 불길이 거세어져 빨랫감을 태웠구먼요". "오로지 이번 일은 내 소치로 소이다". 끝으로 시어머니, 다 듣고 하는 말씀, "망영이지 망영이지 이 놈의 할망구가 마실은 무슨 마실", "잠자코 집에 있어 솥 가나 돌보고 빨래나 도왔더라면 이런 일 있었으랴".

한결 같이 권속(眷屬)이 아래를 사랑하여 제 각각 그 자성(自省)하니 한집안이 화목하여 모든 일이 절로 되니, 가화만사성 아닌가. 이 고담은 요순(堯舜)의 화(和)의 본(本)이요, 제가(齊家)의 원리임을 설하고 있다. 한 가정 뿐 아니라, 모든 직소(職所)에서 화목하는 길을 깨우치고 있다. 구술자:가천리 신 금조(1922년생).

서울나그네

  • 출처:헌산지『 山誌』, 1786년, 작가미상(著者未詳).
  • 소설의 작자:진사 서석인(進士 徐錫隣). 아호:수오(睡 ). 울주군 상북 사람으로 1710년∼1765년에 생몰 하였다. 1747년(영조 2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3년 동안 태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어초(魚樵)에 묻혀 살며 경전을 탐독하며, 시에 능하였으며,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 내용:1700년대의 중반 언양고을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획 개편 및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각종 부역으로 인하여 도탄에 빠져있는 민생을 어루만지는 인문주의를 바탕으로한 250년 전의 향토역사소설이다. 향토문학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소설로 수오선생문집에도 없는 작품이다.
  • 등장인물:서울나그네, 걸인, 천전 돌부처, 나그네, 언양 사람, 한사람.
  • 문집:수오선생문집(이천서씨명암공파종친회, 하우기획 간(2001. 10. 5.)이 있다.
  • 발굴자 및 번역:신동익(시조시인)
  • 제(題):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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