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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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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곡

향산리 능산 뒷산 산정에 못이 있는데 능산마을 사람들은 이를 세이지 또는 천지못이라고 하여 그 골짜기를 시옷골:세이곡 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에 왕실이 파행, 부도덕하여 충신이 간하여도 외면하니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양심있는 중신들이 그직을 사임하고 이곳 능산으로 입향하여 나라일을 근심하며 여생을 보내면서 과거 불길했던 일들을 지우기 위해 이 천지못 물에 귀를 씻고 여생을 보냈다 하여 세이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한편으로 조선후기(180여년전)에 이 마을에 사는 정윤택이라는 선비가 세이지 아래 계골에 옹달샘을 파서 그 옥수같은 옹달샘에 목욕하며 즐겼는데 어느날 어릴적 지면이 있는 규장각 제학 정원용 대감이 그의 집을 내방하였다. 이때 두분은 산정에 등반하였는데 옥수같은 못물을 본 대감이 반가워하며 세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대감께서는 귀에 염증이 있었으니 이 물로 귀를 씻은후 귀가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그후 대감이 정윤택에게 말하기를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고 이 못이 있는 산정은 세이곡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능산리 정인태 구술 >

 

못안못의 잉어

지내리에는 조선초기인 예종 원년(1469)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지리지]언양현조에 나오는 초산제란 아주 오래되고 큰 못이있다. 이못은 지내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추측해 볼 수 있듯이 마을보다 못이 먼저 생겨 났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해본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못은 그 옛날 농경사회에서 논 100마지기의 면적으로 축조한 것인데, 못둑에서 안쪽으로 바라보면 수초가 뒤덮인 못끝이 아득하다.

 

이 못의 잉어는 예로부터 유명했다. 사철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십여년만에 한번씩 가뭄이 들면 수굴을 빼고 주야로 며칠간 고기를 잡는데 특히 밤에 횃불을 들고 불야성을 이루며 잡는 < 못안못 잉어잡이 > 는 유명하며 그야말로 보기드문 장관이었다.

 

밤새 이전투구를 하다 새벽녘에 물가 개펄을 잠자코 바라보노라면 앙금이 사르르 가라앉은 물가에 쫓겨나와 한가로이 노니는 대어를 발견하게 된다. 어린애 키보다 더 큰 누런 황금빛 잉어다. 채이만한 잉어 또는 짚단같은 잉어 등으로 표현된다.

 

이쯤이면 허연 모시적삼 차림으로 못둑에서 유유자적하게 장기 바둑을 부던 부잣집 노인네들이 군침을 흘리면 흥정을 해온다. 또 오래된 궁장어(민물뱀장어)는 등어리가 누르며 아가미에 귀가(뿔이)돋혔다 하여 찌꿈(터줏대감)이라고 잡아먹는 것을 금기시 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찌꿈 잉어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워낙 큰못이라 수십년만에 드물게 마르는 가뭄뿐만 아니라 5리나 떨어진 정상의 천지못과 굴이 뚫려 그곳으로 내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달에 한 보름은 큰 못에, 나머지 보름쯤은 천지못에 가 숨어산다는 신비로운 설화가 있다 이 어중왕인 찌꿈 잉어를 잡으면 그 해 농사는 대풍을 이루고 만사가 형통한다는 운수대통의 행운도래 속설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워낙 신성시 되는 날개돋친 이 괴어를 잡으면 집안에 불의의 액운이 미친다는 액운비래설에 원인 모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고로들은 이광경을 지켜보고는 [야들아! 욕심이 많으면 실물을 감한데이, 그냥 보내줘라, 조금만 작았으면....]하며 못내 아쉬움을 남긴채 아깝지만 그냥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비록 어대는 치렀지만 천재일우로 간신히 건져낸 젊은이들의 항변속에 온 못이 떠들썩한 가운데 아쉬움의 곰방대만 연신 빨아대던 그 노인의 세월을 나이테와 여유자적한 살생의 예지는 지금도 이 지방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도동

  • 지명유래 : 이웃마을 사람들이 많이 통하는 마을이라 하여 도동이라 호칭함.
  • 지역여건 : 면의 동쪽 0.5 km 지점에 위치하고, 24호 국도를 끼고 있음.
  • 면 적 : 296 Ha (답 - 43.7, 전 - 9.5, 기타 - 242.8)
  • 가 구 : 105 세대 (경주 김씨가 많으며, 그외 각성이 분포)
  • 인 구 : 265 명 (남 - 144, 여 - 121)
  • 특 산 물 : 미 곡
  • 공공시설 : 마을회관, 울산 경의고등학교 ,상북중학교
  • 종교시설 : 금강사
 

마을소개

  • 1. 궁평: 마을의 생긴 모양이 활과 같이 생겼다는 데서 궁평이라 호칭함.
  • 2.비심 : 도동과 궁편 사이에 있었던 마을
  • 3.송락골「송락곡 」 : 신라 때 부근에 영구사라는 사찰이 있어 승려들이 송락을 쓰고 이 마을로 왕래하였다 하여 송락골이라 호칭함.
  • 4.만당걸 : 도동 남쪽에 있는 내로서 신라 때 하천하부에 인구가 많이 살고 있었다 하여 만당걸이라 호칭함.
  • 5.오룡골 「오룡곡 ,오령골」 : 도동 동쪽에 잇는 골짜기. 지형이 다섯 용의형국 이라 함.
  • 6.회미기 : 궁평 서북쪽에서 궁근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지형이 회목처럼 잘록하다함.
 

덕동마을

신밤의 서쪽 편으로 덕신교(德新橋)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는 덕(德)을 갖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여 덕동(德洞)이라 하였다고 하나, 덕(德)을 크다는 뜻으로 본다면, 이 마을은 옛날에는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겠다.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하여 한 두 사람이 왔을 때, 논배미만 얼마간 있었고, 허허 벌판이어서 강 건너 산비탈을 보니 그 당시 큰 마을이 있으므로 덕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산마을

신밤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거남산(巨南山)의 서남 줄기의 한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산세가 자라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오산(鰲山)이라 하였는데, 뒷날 간편한 글자를 취하여 오산(吾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작은 골짜기를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북쪽은 안마실, 서쪽에 있는 것은 건너각단, 남쪽에 있는 것은 아랫마을, 가운데 있는 것은 안골짝이라 하고, 안마실은 서들[西野]거랑과 사이를 두고 온양읍 망양리에 접한다.

 

살건내마을

덕동(德洞) 뒤편 산등성이 넘어 골짜기에 위치하고, 오산의 서쪽 신밤거랑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살건내의 '살(薩)'은 사(沙) 차(嵯) 서(西) 사(斯) 등으로도 표기되며 평야(平野)를 뜻하는 것이나 흔히 살수(薩水), 살매(薩買)와 같이 강물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두서면 활천(活川)의 고명(古名)이 전천(箭川)으로, 전(箭)은 (화)살[矢]이니, 물 흐름이 화살처럼 빠른 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살건내는 신야전탄(新野箭灘)의 급류 건너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고종 31년(1894)에 발간된 울산 구 읍지를 보면 이곳에는 연어방전( 魚防箭)이 있었다고 한다.

 

연어방전이란 연어가 많이 잡히는 곳을 선정하여 연어 잡이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던 것으로, 조선 중엽의 세제(稅制) 개편시 울산에는 태화동의 멍정과 신밤의 살건내 두 곳이 있었다. 멍정의 세금은 영납(營納)이라 하고, 살건내의 세금은 부납(府納)이라 하여 좌병영(左兵營)에 납입하였다고 한다.

반장골마을

고종 31년(1894)의 울산 구 읍지에 반장골이란 지명이 처음 나타나고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나, 1911년의 기록에는 반장골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이때는 이미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나 사람들이 살지 않은 골짜기로 변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그 위치도 분명하지 않다. 산성마을과 경계되는 지점의 산 능선에서 산성윗못[山城上谷池] 방향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에는 겨울철에 얼음이 가장 먼저 얼어서, 얼음계곡을 만들었다가 해빙기에는 가장 먼저 얼음이 녹는 작은 논배미들로 이루어진 곳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산성마을이 공단에 편입되어 반 이상이 철거되고 새로이 형성된 마을의 일부가 이 계곡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여기를 반장골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덕산마을

덕동(德洞) 오산(吾山) 살건내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고함산

고헌산의 북쪽에 있는 경주시 산내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상북쪽에 있는 고헌산을 속칭 < 고함산 > 이라고도 한다. 산내면 대현리 중마을에는 문복산이라하는 높다란 산이 있다 그런데 이 산에는 < 디린바우 > 라는 이름난 큰 바위가 마치 한 산봉우리처럼 높이 솟아 있어 이 바위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높고 큰 층암으로 이룩된 이 바위는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하여 < 디린바우 > 라 불러온다. 이 디린바우는 드려지듯 험한 곳이므로 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곳이다. 그러므로 이 곳에는 돌버섯이 돌 틈에 붙어 자라는 석이버섯이 많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이것을 따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 디린바우에는 예부터 지내와 거미들도 살고 있었다. 그 지네는 어찌나 큰지 채이짝만 하였고 거미 또한 서말지 소댕(솥뚜껑)만 하였다.

 

옛날 어느때 한 용감한 머슴(청년)이 있었는데 이 디린바우의 석이가 몹시 먹고 싶었다. 그는 어느날 길고 튼튼한 줄을 매어 바위의 아래쪽으로 내려가 석이를 찾아 따기 시작하였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니 석이가 많아 버섯을 따는데만 그저 온 정신이 팔려 바깥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다. 디린바우의 남쪽에는 멀리 고현산이 자리잡아 그 위용을 자랑하듯 웅장하게 서 있다. 어떤사람이 고헌산에 올라 나무를 한짐 가득 지고 내려오다가 짐이 하도 무거워서 어깨를 파고드는 듯 하니 전망이 좋은 자리를 골라 짐을 받쳐놓고는 곰방대를 끄내어 담배 한 대를 부벼넣고 불을 당겨 한모금 빨아 내뿜고나니 금시 어깨가 가벼워지는 듯하였다. 이때였다. 북쪽을 바라보니 디린바우에 한 사람이 석이를 따고 있는데 서말지 소댕만한 큰 거미가 사람을 매어 달려있는 줄을 물어뜩고 있었다. 금시 소름이 오싹 끼치었다. 줄이 끊어지면 그 사람은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 영락없이 죽기 때문이었다. 나무꾼이 벌떡 일어서며 "보소보소, 버섯 따는 사람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버섯따는데만 열중하다 보니 고함소리가 안들리는 듯 하였다. 다시 목이 터질 듯 큰소리로 "보소보소, 버섯따는 사람아! 보소보소 버섯따는 사람아!" 하니 손나팔을 하여 고래고함을 지르기를 여러번 되풀이하니 겨우 그 사나이는 무슨말이 들리는 듯 이곳을 바로보며 손으로 응대하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손짓 몸짓을 하며 "거미가 줄을 끊는다! 거무봐라 거무를!" 하였다. 그제야 그는 말을 알아듣고 위를 쳐다보니 디린바우의 지킴(지꿈)인 왕거미가 나와 줄을 물어 뜯고 있지 않은가? 놀란 사나이는 급히 몸을 피하여 큰 위기에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부터 이곳 사람들은 고헌산을 < 고함산 > 이라 하였다.

 

나무꾼이 석이버섯을 따는 사나이를 위해 고함을 지른산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여근곡

산전리 도동마을 송내골에는 여근곡이 있다 일명 <옥문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골짜기는 마을인가에서 북쪽으로 약 2 km쯤 올라가면 막다른 종점에 닿는데 그곳이 곧 여근곡이다. 고헌산의 남쪽 지맥을 따라 동쪽의 언양읍 다개리와 서쪽의 상북면 궁근정리. 산전리의 경계 능선으로 남으로 뻗어 못안방향으로 내려오다 세칭 '내봉지'라 불리는 산봉우리 아래(서쪽)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마을주민들은 예로부터[△△골]이라 불러왔다. 이 골짜기와 그 막다른 곳의 형국이 흡사 여자의 국부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진 것인데, 이곳에는 음기가 왕성하다 한다. 마을 주민들의 자녀의 성구성비를 살펴보면 아들보다 딸이 단연 많은것도 이런 까닭이라고 한다. 이 여근곡 위의 산 정상부근에는 [아들바위]와 [딸바위]라 불리는 두 바위가 가까이서 마주보고 서 있고, 또 멀리 서남쪽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한 층암절벽으로 서 있는 간월산 천질바우를 남근으로 비유하여 왔다.

 

여자의 나신(여근)이 훤히 드러나면 음기가 더욱 왕성해져 마을의 부녀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있어 그 주위에는 늘 울창한 송림으로 가리워져 있다. 그런데 일제시대 어느해 진달래가 만발하던 화창한 봄날 마을 청년(머슴)들이 이 골짜기에 나무를 하러가서 여근으로 유감되는 이 바위구멍에 작대기로 휘젓고 오줌을 누는 등 짓궂은 장난을 하였는데, 얼마 후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나서 가출하고 근친끼리 상피가 벌어지는 등 추문이 일어나 관련자들을 색출 국문하여 동네매를 맞히는 등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골짜기의 한가운데는 솔숲이 울창하여, 나무꾼들이 이곳에 들어가면 촌로들은 마을의 선량한 풍속을 해친다 하여 경계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한다.

 

부자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병하였던 김여경이 아버지인 김응량을 도와 대구 팔공산의 진중으로 가는 도중 헤어져서 어느새 날이 저물어 운문산에 이르러 한 바위를 의지하여 하룻밤을 머무르게 되었다. 산위에서 날이 밝자 앞뒤를 살펴보니 부자가 서로 바위의 좌우에 뚫린 굴에서 자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 바위를 사람들은 부자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지산쌀바위

옛날에 이 바위아래에서 한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스님은 먹을 양식을 산 아래 마을에서 탁발하였는데 수도에 정진 하다보니 늘 마을에 내려가는 시간을 아까워 했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이 새벽 기도를 하러 갔다가 바위틈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한 끼니의 하얀 쌀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한편으로 이상하게 여기며 그 쌀로 밥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자신도 먹었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그 다음날도 계속하여 같은 자리에 같은 양많큼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스님은 자기의 지극정성을 가상히 여긴 부처님께서 탁발을 면하게 해 주신것이라 생각하며 더욱 더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어느해 마을에 큰 흉년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로 시주를 오지 않는 스님이 이상히 여겨 수도하는 스님을 찾았고 이때 스님께서 바위에서 쌀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사람들은 마침 흉년이 들어 매우 궁핍한지라 쌀을 얻고자 스님과 함께 바위틈을 쑤셨다. 하지만 바위틈에서는 더 이상 쌀은 나오지 않았고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면서 물줄기만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스님과 사람들은 크게 뉘우치고 부처님게 사죄하였지만 쌀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이후로는 바위틈에서 물만 흐러 나왔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 바위를 쌀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제 아무리 어려운 경우가 닥치더라도 분수를 지켜야 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이다.

 

<헌산지>에 실려있는 내용과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참고로 함.

 

배내심종태바위

상북면 배냇골에는 <심종태바위>라 하는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사자산 높은 봉우리가 동쪽으로 늘어진 곳에 이 바위가 있다. 바위의 아래에는 수십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동굴이 하나 크게 나 있어 이 굴에는 예로부터 도둑들의 소굴이기도 하였다. 옛날 이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심종태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부모의 제사 때에 제수로 쓰려고 비루먹은 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가 길렀다. 제수로 쓸려는 송아지고 보니 더욱 알뜰히 길렀다. 살이 찌고 토실토실하여 어느덧 중송아지로 컷다. 그런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마당에 있어야 할 송아지가 없어졌다. 놀란 그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제삿날은 다가오는데 무엇으로 제사를 지낼까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또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그 망극한 은혜를 잊은 탓으로 하늘이 내리신 벌인가보다 하고 망연자실하였다.

 

행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송아지가 이까리(고삐)를 풀어 달아났을까? 범이 물어갔을까? 그렇다면 뼈라도 어디 있을테지? 도둑이 몰고 갔을까?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리에 주마등 같이 스쳐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찾아다니다가 큰 바위굴 앞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굴에서 한 무리의 도둑을 만났다. 도둑들은 심종태에게 뭣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허둥지둥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는 겁에 질려 떨면서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둑들은 심종태의 효성에 감복하여 부대 속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내더니 30량을 돌려주고는 그만 사라져버렸다. 뒷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심종태바위]라 불렀다. 지극한 효성에는 밤이슬 맞고 다니는 도둑들도 감복하고만 이야기다.

거리하동의 동뫼

상북면 거리에는 몇 개의 아늑한 마을이 있다. 하동과 간창이 있고 또 대문각단, 지곡, 밤갓 등의 마을이 있어 다 윤택하다. 그런데 하동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들산이 하나 있는데, 이 산을 마을 가운데 있다 하여 사람들은 < 동뫼 > 라고 불러온다. 또 이 산을 밀양에서 온 산이라고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울산과 언양은 왜구들의 침범이 잦은 곳이었다. 왜구를 막자면 성이 필요했다. 이 왜구를 막으려고 어느 해 언양에서 성역이 일어났다. 성 쌓는 일에는 고을의 장정도 물론 동원이 되었지만 원근의 다른 고을 장정들도 징용이 되었다. 이 성역은 거창한 역사였으므로 그리 쉽사리 끝나질 않았다.

 

그러니 항간에는 농사 때를 놓칠세라 조바심을 하더니 나중에는 원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아닐텐데?" 하는 소리가 밀양 고을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중한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밀양의 마고할미가 구원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두손에 회초리를 쥐고 휘두르며 밀양땅의 흙을 휘몰아 쳤다. 흙더미는 밀려 석남재를 넘어 거리의 하동 앞까지 왔다.

 

마고할미는 여기에서 한숨을 돌리며 땀을 닦고 쉬고 있었다. 이때였다. 성역을 끝내고 장정들이 돌아오고 있지 않는가. 헤어진 옷을 걸친 밀양장정들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마고 할미는 그만 흙더미를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흙더미가 작은 산이 되어 그 이름을 < 동뫼 > 라고 불리온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있었던 어느 뒷날의 일이었다. 길천리 이불에는 정심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이불에서 살았다. 이 정씨 집안에 상사가 일어나서 동뫼에 묘를 들이고자 했으나 마을사람들이 허락하질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이 동뫼야 말로 밀양에서 온 것이 분명하질 않는가 하며 밀양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밀양고을로 달려가 산세를 내고 매장허가증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밀양부사의 허가증이었다는 것이다.

 

길천리 소목골

상북면 길천리에는 후리란 마을이 있었다. 즉 뒷마을이란 뜻이다. 이 후리의 뒷산에는 < 소목골 > 이라 하는 한 골짜기가 있어 그 골짜기의 이름에 담긴 슬픈이야기가 전해온다. 신라때의 일이라 한다.

 

이곳 어느집에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데리고 있었다. 어느 하루의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그만 눈이 뒤집혀 며느리 방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며느리는 몸을 부리치며 "왜 이러시나요? 참으세요, 참으세요" 하며 울부짖었으나 손목을 잡은 시아버지는 이를 놓아주질 않았다.

 

시아버지는 벌써 굶주린 짐승처럼 이성을 잃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며느리는 엉겹결에 "뒷골에 가서 소 울음을 세 번하고 오신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예? 예?"하며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미친 시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 손목을 놓고 몸을 날려 뒷산으로 가서 소짓을 하였다. "우메"·"우메"·"우메" 이렇게 세 번을 울고난 뒤에 헐떡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문을 연 그는 깜짝 놀랐다. 며느리가 벌써 목을 메어 죽어 있었다. 더러운 상피를 거절하며 끝내 순결을 지킨 것이었다. 슬픈 죽음이었고 또 추잡한 짓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추잡한 시아버지가 소울음을 울었다는 골짜기를 일러[소움골]이라 하였다. 이 소움골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하고 변해서 지금은 소목골 이라 부르고 있다 ( 출전 [헌남지])

 

또 이 소목골의 설화는 좀 다르게 전해온다. 길천 후리에 신라 때 제정승이 살고 있었다. 제정승에게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딸이 있었다.

 

하루는 제정승이 그만 딸을 덮쳤다. 이 때 딸은 소장삼을 덮어 쓰고 뒷골에가서 소울음을 세 번하고 온뒤에는 뜻대로 하라고 하였다. 제정승이 소짓을 하고 돌아와 보니 딸은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고 한다. 제정승이 살던 집은 못이 되어 파두못이 그것이며 바들(후리의 앞들.)에는 제정승의 대문이 있었다는 대문달이와 그의 우물이었다는 제정새미가 지금도 있다.

 

천전석불

상북면 천전리에는 용화사란 절이 있다. 1843년에 세웠다는 이 절에는 석불이 있어 그 이름이 높다. 조선조 때는 현역군을 말하는 번상군에 대한 경비염출책으로 번상하지 않는 양인은 신역을 지는 대신 보라는 군포를 바치게 되어 있었다. 이제도의 운영은 뒤에 이르러 국방상의 필요에서 보다도 군포를 거두어 들임으로써 국가재정에 충당시키려는데 주된 목적을 두게 되었다.

 

보의 대역세로서 포 2필씩을 바치는 양역(양인이 부담하던 국역)이 뒤에 와서는 관리와 결탁하여 군포를 바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결국 의지할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 부담을 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를 어른과 같이 취급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이른바 황구첨정, 죽은사람에게 세금을 매기는 백골징포, 납세의무자가 도망하거나 못내면 그 일족이나 마을에 부담시키는 족징, 동징까지도 유행하는 사회로 타락하고 있었다. 삼정문란의 극치였다.

 

이러할 때에 언양현감이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당시 상남면 천전에서는 장정수가 모자라서 하는 수 없이 마을에 있는 미륵부처로 그 수를 충당하여 주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마을에서는 원성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원통하여 크게 울부짖으며 "석불을 장정으로 충당하다니 해가 우리 영세민에게만 미치는구나?"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 마을 사람들의 말이 떨어지자 홀연히 석불의 어깨에 두필의 면포가 얹혀져 있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 석불의 영검에 감탄하여 그 자리에 용화사를 지어 석불을 덮어 모시게 되었다 한다.

 

열녀정씨와 호묘

조선조 태종 때에 신녕현감을 지냈던 유혜지에게는 정씨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나이 스물 여섯 살 때에 남편 유혜지가 그만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를 따라 같이 죽고 싶었으나 어린 아들 하나가 있어 그리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같이 죽지는 못할지언정 3년의 시묘살이는 하리라 생각하고 묘소에 움막을 얽어 산으로 들어갔다. 사내의 몸으로도 시묘살이란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진대 더구나 젊은 아이의 여인으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깊은 밤이면 무서운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마을의 건달배들이 움막을 기웃거리는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이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자위가 되었다. 오로지 그녀는 남편이 고이 영면하기만을 빌었다.

 

그런데 하룻밤은 기적이 일어났다. 한 마리의 큰 범이 나타났다 이를 본 정씨부인은 혼비백산하여 기절할 뻔하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범의 몸짓이 측은한 감이 있어 사람을 해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범은 옆에 누워 몸을 부비는 것이었다. 아마 정씨부인의 지성이 하늘에 닿아 하늘이 주신 가호였으리라. 이 날 뒤로는 밤마다 범이 나타나서 같이 시묘하는 정다운 한 식구가 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하룻밤은 범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시부인은 웬일일까 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부인의 꿈결에 범이 나타나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범이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깜짝 놀라 잠이 깬 부인은 그길로 범을 찾아 나섰다. 꿈에서 본 그 자리로 달려가 보니 함정에 빠진 범을 둘러싸고 마을의 장정들이 모여 잡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정씨 부인은 이 범은 자신과 같이 시묘하는 착한 범이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범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부인이 청하는대로 놓아주었다. 함정에서 빠져나온 범은 부인을 등에 업고, 묘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덧 3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슬펐던 고행도 끝을 맺어 3년상을 치른 정씨부인이 다시 묘소를 찾았다. 슬프고도 슬픈 만감이 오가는 것이었다. 부인의 얼굴을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제 당신의 뒤를 따르리다. 그래서 후생에서라도 이별없이 함께 살리다"고 하였다. 그런데 웬일일까 갑자기 묘가 갈라졌다. 부인은 말없이 남편 옆에 누어 눈을 감았다. 영원한 눈을 감은 것이다. 마침내 묘는 닫혀져 부부가 합장되었던 것이었다. 사흘 뒤의 일이다. 부부의 무덤 앞에는 그간 식음을 전폐했던 호랑이도 뒤따라 죽어 있었다. 이것을 본 가족들이 호랑이도 양지바른 자리를 골라 묻어주었다 한다.

 

정씨 부부의 묘는 향산리 능산 세이지 밑(서편)에 있다. 향산리 능산 마을의 능구더미에 있는 묘가 바로 그것이다. 범의 무덤도 능산에서 향산으로 드어가는 도로가 그녀가 정려각 옆에 있어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永世不忘]라 새겨진 무덤이다.

 

소야풍년

상북면 소호리의 옛 이름을 소야라 하였다. 원래 두서면에 속했던 소야와 경주시 산내면의 동골을 합쳐서 흔히 < 소야동골 > 이라 하였으며 이거이 줄어 < 쇠동골 > 이라고도 불러왔다. 하도 교통이나 통신이 불편한 산간오지로 두메산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전에 들 마을에 살던 어떤 사람이 소야를 찾아 첫길을 나섰다. 고헌산 아래에 있는 삽재라는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지금은 포장이 잘된 도로지만 옛날은 가파르고 험한 산길이었다. 외롭고 또한 불안한 산길인데, 곧 외항재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길손은 마침내 광바위에 이르렀으나 근근이 바위틈을 넘어다니는 좁은 길이었다. 길손이 문득 앞을 보니 지게를 진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엉겁결에 길손의 입에서는 "당신 어딨소?"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이 때 그 사나이는 불쑥 바위위로 길을 비끼면서 "쇄동골 사오"하며 답하였는데 매우 신이 나서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길손은 다시 묻되 "어데를 가는길이오?"하며 이제는 매우 정중하게 물었다. 사나이는 답하되 "씨나락 구하러 가는 길이오"하는 것이었다.

 

길손은 지난 해의 농사가 고랭지에서는 풍작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말을 이어 "씨나락은 무슨 씨나락이오?"하니 그 사나이 말이 "나락 등이 터져 못쓰게 되었소"하며 길을 비켜 가버렸다. 이 대화에서 나타나는 것 가운데 나락이 등이 터져 못쓰게 되었다는 말에는 함축성이 있는 하나의 풍자가 섞여 있다.

 

소호나 동골처럼 높은 산에 둘러싸여 일조시간이 짧고 찬물이 새어드는 곳에는 가뭄이 와야 풍작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심한 가뭄 때는 벼알의 등숙(곡식의 알이 잘 여물어 익음)이 좋아서 볏껍질이 터지도록 벼농사가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7월 장마가 계속되거나 비가 많은 해는 그만 미발(피지 않음)에 그쳐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소호리의 농사 사정인 것이다.

 

신불산 단조성

상북면 등억리 서남쪽 해발 1,208m인 신불산 정상 아래 능선에는 단조성이 있다. 산세가 험악하고 기암절벽으로 치솟아 마치 허공 중에 뜬 성이라고 하였다. 단조란 붉을 단자와 새조자로 봉황을 말한다. 봉황의 머리위에는 붉은 점이 있다. 이 단조성은 봉황이 길게 뽑아 세운 목줄기 위에 머리가 있고 그 머리위에 한 붉은 점처럼 솟아 있는 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중국 장소도 이 성을 쳐다보고 마치 하늘에 붙은 성 같다면서 난공불락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이 성 안에는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성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함락을 당하였다. 그때 한 노파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왜병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때 왜병들이 노파에게 단조성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 아들을 살려 주겠다 하자 노파는 단조성으로 가는 비밀통로를 알려주고 말았다. 왜병들은 단조성 서쪽 산성으로부터 들어갈수 있는 비밀 후문을 기습하여 불의의 공격을 가하니 아군들은 난공불락으로 나는 새도 범접하지 못한다고 믿고 태연자약하게 동쪽 낭떠러지 아래로만 지켜 내려보다 보고 있다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불시에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곳에는 지금도 긴 성터가 남아 있다.

 

신불산의 산신령

신불산에는 산신령과 관련된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상북면 이천리(배내골)사람들은 신불산 주변의 산을 넘어 언양이나 삼남으로 오곤 했다. 하루는 배내골에 사는 한 촌부가 언양 장에서 소를 팔고 밤이 이슥할 무렵 이웃에 사는 친구와 함께 신불산 고개를 넘게 되었다. 촌부가 신불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걸음이 빠른 그 친구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수염이 하얗게 늘어뜨린 늙은이가 나타나 "지금부터 내가 길을 인도할테니 나를 따라 오시오 " 하는것이었다. 촌부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늙은이를 따라 산중턱쯤에 이르렀다. 늙은이는 다시 "여보 젊은이 길 위로 올라 서시오"하기에 촌부는 시키는대로 길 위로 올라 섰다. 그때 갑자기 황소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으르릉 거리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촌부는 식은땀을 닦으며 그제서야 길위로 올라서게 한 까닭을 늙은이에게 물었다. 이때 늙은이는 "산짐승이 밤중에 산을 내려 갈때는 항상 길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걸으니 사람은 길 위로 올라서야 눈에 띄지 않네"라고 말하며 계속 걸었다. 촌부도 늙은이를 따라 걷다보니 고갯마루에 서게 되었다. 한편 걸음이 빠른 이웃의 친구는 고개마루에 이르렀을 때 "이 사람이 올 때가 되었는데 "하면서 기다리다 못해 먼저 내려가고 말았다.

 

촌부가 고개를 내려가려고 할때 늙은이는 또 다시 "젊은이 길 아래로 내려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또 곡절을 물으니 "사람이 밤길을 걸을 때는 항상 길 위쪽을 살피며 내려가야 하는 법이오"하는 것이었다. 촌부는 이 때도 필시 늙은이가 자기를 도와 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길을 걸었다. 어느덧 마을이 가까워 지는 곳에 이르렀을 때 늙은이 말이 "고개를 오를 때 지나간 그 호랑이가 먼저 내려간 젊은이의 친구를 잡아 먹었을 것이요"하고 말했다 이에 깜짝 놀란 촌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돌아서니 늙은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촌부는 그때서야 산신령이 자기를 구해준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어제 저녁 같이 오던 이웃 친구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다는 것이었다.

 

과부성

상북면 등억리 마을 동쪽에 묘하고 아담한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는데 1998년 10월 19일 지방기념물 제 19호로 지정된 [언양천리성]이 있는 산성이다. 이를 세칭 < 과부성 > 이라 불러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조총, 화약 등 선진무기를 사용하는 왜병들과 칼, 창, 활, 농기구 등 낙후된 원시 전쟁무기를 든 임진왜란때 의병들의 격전지였던 과부성 아군들과의 치열한 접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이때 조국과 겨레, 향토를 사수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수많은 의병들의 활약상은 처절하였다.

 

이곳 등억리와 인근 마을 의병들은 이 과부성으로 올라가서 왜적과 대치하고 장렬하게 싸웠다. 총을 든 왜적들이 과부성을 온통 애워쌌다. 성중의 의병들은 포위한 왜병을 향해 활을 쏘고 횃불과 돌을 던졌으나 그 거리가 미치질 못하고 왜병들은 조총으로 쏘아 부치니 어쩔도리가 없었다. 성중의 의병들은 하나 둘 차례로 쓰러져 갔다. 이러다가 종말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말았다.

 

왜병들은 과부성의 의병들을 몰살한 후 다른곳으로 이동하였다. 왜병이 이동한 후에 피신했던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서 과부성으로 가보니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정경으로 의병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중이라 누구누구의 시체라는 것을 가릴 겨를도 없이 한구 한구씩을 운구했다가 그 넘어 산에 장사를 지냈다. 이렇게 묻은 묘의 수가 무려 수백구나 되었다. 이와같이 몰살을 당한 과부성 싸움이 끝나고 나니 이 마을에는 몰과부가 생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 과부성 > 이라 부르게 되었다. 훗날 이 의병들의 무덤은 몰지각한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 졌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하다.

 

살구정 돗대

살구정은 덕현리에 속한 행정리의 하나로 행정이라 불리우고 있다. 살구정은 옛날 한량들이 살터(살티)에서 시살등을 향하여 활을 쏘며 훈련을 하고 쉬어가는 곳에 살구나무 많아 정자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살구정이라 부른 것이라 한다. 행정마을 사람들은 살구정 마을앞 동남쪽 들판 지명을 꼬두박샘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마을에서는 이 꼬두박샘 위쪽 마을 회관 남쪽 50m 지점에 전주와 같은 긴 장대를 세워두고 돗대라고 부르며 매년 보름전날 저녁에 당제와 함께 돗대에도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오랜 옛날 이곳에 꼬두박샘이라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마을에 화적떼가 침입하여 마을을 불지르고 재물을 약탈해 가고 심지어 돌림병이 돌아 많은 병자가 발생하는 등의 재난이 계속되던 중 어떤 도인이 마을에 도착하며 지형을 살펴보고 살구정 마을은 큰 배(선박)의 중심부로 소호고개는 배의 선수이고 배내고개는 배의 후미로 배 중심부에 꼬두박샘을 뚫었기 때문에 재난이 계속되므로 샘을 메우고 그 자리에 돗대를 세워서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올리고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면 재난이 없어진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샘을 메우고 돗대를 세운후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한다. 그때 이후로 살구정 마을은 바가지로 퍼서 먹는 샘으로 식수를 하였으며 70년대 간이 상수도가 개설되기 전에도 집안에 두레박으로 퍼서 먹는 우물이 거의 없었다.

 

혹 한 두집 우물이 있는 집도 배 밑창을 뚫었기 때문에 재난이 계속되고 집안이 망하여 그 다음 사람은 우물을 메우고 다시 우물을 파는 집이 없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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