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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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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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발상지로 유서가 깊은 땅

우리 서생은 고대 신석기 시대의 선사인(先史人)들이 살기 시작하여 즐문토기(櫛文土器 유적)를 남긴 문화의 발상지로 유서가 깊은 땅이다. 신라 초기에는 생서량군을 두었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42∼765) 동부 해안지방을 안정시키 기 위해 동안군(東安郡)으로 개명하였고 그 영역을 서생 온양 온산지역 동해남부 해안 일대로 하였다. 북으로는 율포, 남으로는 기장, 내륙으로 우풍현(虞風縣), 현재의 웅촌(熊村), 웅상(熊上) 지역까지 그 영현으로하여 고대부터 동해남부 를 침입하는 외침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삼한시대 ~
조선시대

  • 삼한시대

    진한의 땅

  • 삼국시대
    신라초기
    생서량군(生西良郡), 그후 동안군(東安郡)으로 개칭하였고 생서량에서 서생랑(西生良) → 서사포(西舍浦) → 숙마진(熟麻鎭)으로 변하였다.
  • 고려시대
     
    고려 태조 동안현을 흥려부에 합속하고 17대 인종(1123∼1146)대에 울주에 편입되었다
  •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현 화정리 서생포에 수군만호영(西生浦 水軍萬戶營)을 두었다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선조 25년(1598)∼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침입, 서생성을 축조하였다. 명나라 마귀제독(麻貴提督), 편갈송(片喝頌) 장군 원병과 국내 충신 의병의 반격을 받고 왜군이 퇴진하였다.

1900년대 ~ 현재

  • 임진왜란 후

    수군만호를 승격시켜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를 서생포에 머무르게 하다가 고종 32년(1895)에 이를 폐지하였다. 임란 후 서생지방은 구진(舊鎭) 진하(鎭下) 북동(北洞) 남동(南洞)은 수군동첨절제사 지역이었고 상독(上禿) 현화산 강월(江月) 연산(延山) 위동(渭洞) 양암(陽岩) 용동(用洞) 운곡(云谷) 군령(軍令) 신리(新里) 나사(羅士) 나해(羅海)는 온남면 관할이었다.

  • 고종 32년

    삼도통제영(삼도통제영) 및 각 도의 병수영을 폐지하게 됨에 따라 이에 앞서 고종 31년 동첨절제사 직할지에 서생면을 두어 구진(舊鎭) 진하(鎭下) 북동(北洞) 남동(南洞) 4개(6개동) 동을 관할하였다. *성내리(城內里) 외리(外里) 송정동(松亭洞) 대륙동(大陸洞) 그 뒤 상독 강월 연산 위동 양암 용동 운곡 군령 신리 나사 나해 평동 지역을 분리하여 외남면(外南面)을 두었다가 고종 광무 10년(1906) 9월 24일 칙령 49호의 시행으로 외남면을 양산군에 이속하였다가 1910년 외남면을 다시 울주군에 편입시켰다.

  • 현대
    1914년 4월 1일
    면행정구역 개편때 장안면(長安面) 일부(호열동)와 온양면 (溫陽面) 술마인 수마동(禾麻洞)과 같이 서생면에 편입하여 화정 서생 진하 대송 나사 명산 화산 위양 용리 신암의 10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1962년 11월 21일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1월 1일 법률 제1173호에 의하여 동래군이 양산군에 통합되어 양산군 관할이 되었다가 1983년 대통령령 제11027호(83년2월15일)로 서생면이 울주군에 복귀하였다.
    서생면은 고대 신라 초기부터 조선조 말기까지 우리나라 해안을 수비하는 요충지로 지명에 군사지명이 많다. 숙마진 수군만호영 수군동첨절제사 구진 서생진 진하 성내 성외 성동 군령 도독동 도독동굴 등의 지명은 나라를 지키기에 연유한 지명인 것으로 보아 고래로부터 외침을 많이 받고 막아낸 충절의 고장으로 자부심을 가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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