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면

사람이 희망인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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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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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다리

서생면 화정리 앞을 흐르는 회야강의 하류를 일승강(日勝江)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때 이 강의 싸움에서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 이겼다 한다. 제1차 도산성(島山城) 싸움 때의 일이다. 조명의 연합군이 죽을 힘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이 워낙 험난한 데다 적들은 조총과 화살은 비오듯 퍼부어대고 추운 날씨에 동상자가 속출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지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러한 가운데 적군의 응원병은 수륙양면으로 밀어 닥쳐오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적에게 도로 포위되는 지경에 빠질 듯했다.

이때 조명연합군은 천추의 한을 품고 그만 경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로 물러선 조명연합군은 분을 참지 못하여 적을 칠 계책을 세워 보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서생포의 왜성은 거의 빈 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울산의 도산성으로 쓸만한 군사들은 다 구원병으로 출동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야말로 허를 찔러 서생포왜성을 쳐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줄 때라 판단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의 장수 오유충(吳惟忠)과 조승훈(祖承訓)은 결사대 20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물론 이때는 지리에 밝은 우리 울산의 군사 몇사람도 앞장을 서서 길을 인도하였을 것이다. 이들 결사대들은 야밤에 서생포로 잠입하여 회야강에 있는 조교(吊橋)에서 적을 만났다. 이때 명장 이춘방(李春芳)이 급히 다리를 끊어 왜병을 수장하는 동시에 건너온 군사 백여 급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경주 본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승전이 있은 뒤로부터 화정리 일대의 회야강을 일승강이라 불렀다. 또 여기에 놓여 있었던 다리를 통시다리라 하여 돌을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아 사람들이 건넜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 있는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자라기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다리 이름도 '꿀다리'로 불리고 있다. '꿀'은 굴의 방언이다.

앙금할망구 반지터

서생면의 서생포왜성이 자리잡은 산을 실성산이라 불러온다. 이 산의 산신을 '앙금할망구(老姑)'라 한다. 아득한 옛날 원시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산에서 살았다. 산에서 채집하고 산에서 수렵하여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산에서 살게 되고 산에서 살다보니 산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또 하늘과 땅 사이의 가장 가까운 곳은 산 정상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곳도 산정이며 그 첫발을 내리는 곳이 곧 산정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의 신령을 믿어 그 신령의 가호를 받으며 식량 등 생활의 풍요를 빌어 왔다.

실성산(甑城山)의 앙금할망구도 이런 산신인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여신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리산의 천왕봉 성모(聖母)를 비롯하여 선도산(仙桃山)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영일의 운제산 성모가 있는가 하면 울산지방의 치술령의 치술신모( 述神母), 두서면 아미산의 할망구(老姑) 등이 그것이다.

실성산의 앙금할망구도 이 산에 진좌(鎭坐)하여 아침에는 승강어적(勝江漁笛)을 들으며 선도귀범(仙島歸帆), 폭포비설(瀑布飛雪)을 바라보다가 대암초가(臺巖樵歌)에 넋을 잃게 되었다. 또 해질 무렵이면 붉게 물든 증성낙조(甑城落照)를 바라보며 성암모종(聖庵慕鍾)에 하루가 감을 아쉬워했다. 또 밤이 되면 층대명월(層臺明月) 아래 도독숙로(都督宿露)를 밟아보기도 했다. 때로는 신암의 신선바위에 몸을 날려 갈매기떼와 벗하고 서호(溫山面 江陽)의 임금산에 놀다 찌개바위(彈琴巖)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앙금할망구에게는 소중히 간직하던 반지가 하나 있었다. 이 반지는 고래떼들이 남극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선물로 드린 산호반지였다. 하루는 앙금할망구가 서생성의 대장단에 올라가서 동해의 파도와 어울려 지나가는 뱃길을 보살피다가 옆에 빼두었던 반지가 없어졌다. 쥐 한 마리가 오랜만에 돌 틈에서 나타났다가 이상한 것을 보고 물고 가버린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반지를 찾던 할망구는 크게 놀랐다. 이게 웬 일인가, 누구의 장난일까 하며 법석을 떨어댔으나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 화가 치밀어 오른 할망구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파헤치며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장단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으로 땅을 파헤친 다섯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온다.

장사백

조선시대 장사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임금이 전국의 유망한 사람들을 모아 중국에 사신으로 보내려고 사람을 물색하던 중 장사백이 뽑혀서 가게 됐다. 일행이 배를 타고 부산의 태종대 앞바다까지 갔으나 장사백이 오지 않아 임금이 어명을 어겼다 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바로 그때 배에서 '짱'소리가 나 둘러보니 장사백이 날아와서 돛대 위에 앉아 있었다.

장사백은 현재의 장생포에서 늦잠을 자게 되어 시간을 어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니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 보겠다"며 말하고 피리를 부는데 배는 중국 땅에 거의 도달했다. 이때 장사백은 불던 피리를 떨어뜨리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곳의 산이 갈라지더니 용마가 나타나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때야 사람들은 장사백이 장수인 줄 알았으나 이미 죽어버려 안타깝게 여겼다.

장사백이 죽자 지금의 영농조합퇴비사 일원을 당집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군수대좌형국

지리풍수설에서 서생면을 군수대좌(軍帥大坐)의 형국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신라 때는 화정리의 술마마을에 숙마진(熟麻鎭)을 두어 나라를 지켜왔다 하여 그곳에 거대한 산성지를 지금도 남겨놓고 있다. 고려 때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알 길이 없으나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 7년(1407) 7월의 왕조실록에는 화정리에 서생포수군만호영(西生浦水軍萬戶營)을 이미 두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25년에 실성산에 왜성을 쌓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이를 완성하여 지금도 그 성터는 대부분 남아 있다.

왜군이 물러나자 수군의 진(鎭)을 왜성 안으로 옮기면서 수군의 동지첨절제사(同知僉節制使)가 이를 지키도록 승전시켜 한말까지 그 진영은 유지되어 왔다.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서생은 줄곧 방위기지의 역할을 맡아온 셈이 된다. 조선조 초의 일로 어떤 도참가(圖讖家)가 하루는 지팡이를 짚으며 서생에 이르렀다. 며칠을 두고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살피더니 시루성산(실성산, 甑城山)에 올라섰다. 이윽고 사방의 형국을 두루 살피더니 이곳이야말로 "군수대좌형국이로구나" 하고 산을 내려가 어디론지 가버렸다. 서생이 도참가의 예언처럼 큰 장수가 앉을 자리였으므로 주위에는 이 형국과 대응되는 지명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암리의 군경포(軍警浦)를 비롯하여 나졸을 뜻하는 나사(羅士), 용리의 홍문가(紅門街), 명산리의 용연(龍淵), 뒷산의 기암(旗巖), 장안면 효암(孝岩)의 낙음(樂音), 서생리 뒷산에 우뚝선 탄금암(彈琴巖), 서생리 인성사(引聖寺), 앞산의 장군암(將軍巖) 등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서생은 임진왜란 등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사 요충지로 전선의 중심지역이 되어 도참가가 예언한 것처럼 군수대좌형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둑동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인근 주민 약 150명이 이 동굴에 숨어 있었는데 같이 숨어있던 어린 아이가 계속 울어대어 왜적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다. 이에 함께 숨어있던 사람들이 불안하여 아이와 어미를 굴 바깥으로 쫓아내 버렸다.

어미와 아이는 오갈 곳이 없어 굴 입구에서 슬피 울고 있다가 왜병이 이를 발견하게 되어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굴 입구에 나무 장작불을 지펴 연기로 굴 안에 있던 피난민들을 질식시켜 모두 몰살되었고 그 불로 인한 연기가 서생성 뒷산에까지 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도독동굴(都督洞窟)은 서생 도독동굴(도독구미)에서 불을 피우면 솔개 도독동굴까지 연기가 나 굴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독은 장군의 진지 또는 벼슬을 칭하는 관 명칭을 뜻하는 말이며 동굴 이름은 도독동이라는 마을 명칭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신선암바위

신선암은 바위의 무리로 이루어진 명승지답게 얽힌 전설도 바위마다 각각이다.

동해왕자가 거북을 타고 선녀가 놀고 있던 이곳까지 오게 돼 선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녀는 아이를 임신하여 왕자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열 달이 되어 선녀는 신선암 마루에서 옥동자를 낳았다. 그후 왕자는 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편이 되어 선녀와 다투는 도중 금거북이 나타나 왕자를 등에 업고 물 속으로 데려가 버렸다. 혼자가 된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기를 원했으나 선녀의 행동을 부정하게 여긴 옥황상제가 허락지 않아 선녀는 갈 곳이 없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부인당을 마련해 선녀가 살도록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선녀가 늙어 할머니가 다 되었을 즈음 옥황상제의 용서를 얻었다.

아름다운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부인당 할머니를 모시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이곳을 '대비단'이라 부른다. 또 선녀가 옥동자를 분만할 때 사용한 가위를 놓은 자국이 남아있는 바위인 '가위터'와 그곳에 태를 끊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리고 분만 장소는 지하동굴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분만한 옥동자와 태를 수중에 당을 쌓고 묻었다는 '당물'이라는 곳도 전하고 있다.

벼락바위 떠덕바위

옛날 위양리에는 주위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물이 맑고 아름다운 위수(渭水)못이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이 못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내내 저수지 주위가 절경이어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어느 봄날 하늘의 옥황상제를 모시던 역신(力神)이 죄를 지어 인간세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때 마른하늘에 번개와 천둥이 치더니 이곳 위수 근처로 그 역신이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린 벌은 주위의 산야에 널려 있는 바위를 한 곳에 주워 모으라는 것이었고 역신은 그 명을 받들기 위해 바위를 모으는데 정신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로 접어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바위 중 제일 큰 바위에 오르니 가히 경치가 황홀하고 놀랄 지경에 그만 역신은 벌을 잊어버리고 큰 바위 위에서 주색과 가무를 즐기는데 푹 빠지고 말았다. 이를 본 옥황상제는 용서를 하지 못하고 천둥과 번개를 내려 그 역신을 죽게 했고 바위는 두 조각이 나버렸다.

이때 조각난 바위를 '벼락바위'(위양리 산 128번지)라 하고 바위를 주워 모은 산은 '떠덕바위'(위양리 산 126번지)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역신의 벌로 인해 이곳 주변은 바위를 볼 수 없는 돌산이 되었다고 한다.

날지못한 어린장수

위양리 산 468번지에 해당하는 산에는 애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산에서 용연 쪽 계곡에 젊은 부부가 조그만 초가를 짓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부부 사이에 옥동자가 탄생했다. 이 아이는 낳자마자 등 양쪽에 날개가 달려 있고 또 주위를 날아다녀 마을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아이로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 풍수지리에 밝은 왜군의 첩자가 이 산에 올라가 산세를 살펴보더니 아래 마을에 장군이 탄생할 지세라며 산꼭대기에 쇠말뚝을 박아 혈(穴)을 자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붉은 피가 솟아나 냇물처럼 흘렀다고 한다.
지금도 산정에는 땅을 파헤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사건 이후 날개 달린 이 어린아이는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이덕도

서생면 진하리의 해중에 이덕도라는 해중암이 있다. 일명 덕도라고도 하는 것으로 명선도(名仙島)의 바로 남쪽에 있다. 신라 천년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였던 경순왕 김부가 돌아갔다. 항복이라고 하는 오명 끝에도 고려로부터 두터운 예우를 받아 일신의 불편은 없었지만 어찌 나라의 임금이었던 그에게 아무런 느낌 없이 눈을 감았으랴.

경순왕은 마침내 죽어 여의주를 얻어 용으로 화하여 몸을 굽이치며 하늘로 올라갔다. 인간 세상을 크게 저주나 하듯 몸을 틀어 꼬리를 후려쳤다. 이러할 때 동해에 있던 많은 섬들이 무너지고 바위는 깨어져서 그 모습은 깊은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이러한 변란은 울산 쪽으로도 미쳐 많은 섬들이 침몰하고 서생에 있던 명선도도 반쪽이 나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또 이덕도도 그 저주하는 용의 힘에 의한 희생물이 되어 섬은 그만 모습이 변하여 작은 바위만 두 개 파도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울산지방의 바다에는 용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온다. 신라의 문무왕비가 죽어 용이 되어 해중으로 잠겼다 하여 그 바위를 댕바위(大王巖)라 부르는데 이 바위는 울기등대에 있고 처용이 출현하였다는 처용암(處容巖)이 세죽마을에 있으며 일명 대룡암(大龍巖)이라 한다. 또 방어진의 등대산 북쪽 벼랑에는 청룡이 장난하였다는 용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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