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면

사람이 희망인 울주

전체메뉴보기

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 본문 인쇄
  • sns 공유 리스트 열기

신암리

우리 고장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암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옛날부터 기후가 따뜻하고 또 바다와 접하여 먹을 것이 많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유물은 서울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암리의 위치를 보면 북으로는 용리가 있고 동남으로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명산리가 있다. 마을은 해안으로 달리는 31호 국도를 기준으로 볼 때 대부분 해안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을 뒤로는 해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바다가 확 트여 있다.

면소재지가 있는 이 지역은 각종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들어서 있어 행정의 중심지인 동시에 학교가 많아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 신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관공서를 보면 서생우체국, 울산수협 서생지소, 서생농협, 서생파출소가 있고 또 서생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일제시대 어업을 크게 일으켰던 수곡상사가 광복이 될 때까지 있었기 때문에 상업 역시 활발했던 지역이다. 당시 수곡상사는 신암리에서 정치망 등 수산업을 크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수산물을 부산의 여러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신암리는 지금부터 약 천년전에 윤씨(尹氏)가 처음으로 마을을 찾아 들어왔고 그 후 안씨(安氏), 이씨(李氏)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후 세 성씨의 대표들이 마을이름을 짓기 위하여 의논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 모양을 따서 구름 '운(雲)'자와 바위 '암(岩)'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그 후 각 성씨들이 계속 모여들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커지자 한 개의 마을을 4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 생겨난 4개의 마을이 훔턱각단, 솔진개, 새마을, 비학머리 등이다.

훔턱각단은 지형이 움푹 꺼진 곳이라 하여, 솔진개(현 송리)는 소나무 숲이 많이 우거져 있고 앞으로는 갯마을이라 해서, 새마을은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그리고 비학은 인근의 강월 무학동에서 학이 떼를 지어 날아와 살았다 하여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v 현재 신암리에는 신암, 신리, 비학의 3개 행정마을이 있다. 그러나 이들 마을 중 신리의 일부와 비학 마을 전체가 원전 추가건설 고시지구에 들어가는 바람에 요즘 들어 각종 민원이 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신암리는 당초 울산군 당시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운곡리, 신생리, 효열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암리로 서생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62년 면 전체가 동래군에 편입되어 이 지역도 동래군에 편입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3년 다시 서생면 전체가 양산군에 편입되어 양산군에 속했다가 1983년 다시 울주군 소속이 되었다.

신암마을

신암리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나사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군령으로 불리었던 것을 보면 군사적으로 요충지대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지역은 한때 구름같이 희고 큰 바위가 많다고 해 운암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를 보여주듯 이 마을에는 과거 서생을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씩 둘러보았던 신선암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물인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도 이 마을이다.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은 면사무소의 남북 지역으로 남쪽에는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에서 발견되었고 북에서는 서생초등학교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1914년 행정 개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당시 외남면 면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 8대 현종(1009∼1031) 때는 마을 앞이 아름다운 포구였는데 이때 청주 한씨 조상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면서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을 당시 마을 이름을 연산동(아리민등 또는 하민등)이라고 하였다.

또 이 마을에서 용리로 가다 보면 동삿재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 부근에는 광복 이후까지 고인돌 30기가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과수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신암리는 광복 이후 마을의 규모가 비대해져 신암회관을 중심으로 서남쪽은 중리로, 그리고 동북쪽을 송리로 나누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요즘도 이들 두 지역은 지역정서가 달라 친목단체 등이 따로 운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과 어업을 같이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다. 마을 앞 해변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해수욕은 할 수 없지만 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는데 흑돔과 노래미 등이 주로 잡힌다.

이 때문에 내륙에 위치한 마을에 비해 어업이 활발한 이 마을은 일찍이 어촌계가 조직돼 있었다.

신리마을

신암과 비학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31호 국도가 마을 중앙을 지나가고 있는 이 마을은 원전 개발로 마을의 절반이 원전 지구로 고시가 되어 있는 형편이다.

1970년대 초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면서 고리에 살았던 철거민 27호가 이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이후 이 지역은 수산업이 발달하여 신리항이 2종항이 되어 태풍이 오는 날에는 이 일대에 있는 어선들이 모두 신리항으로 몰려들어 한때 이 지역에는 수협이 들어서기도 했다. 또 어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수 농사를 많이 해 이 지역은 우리 고장에서도 배의 집산지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가을이 되면 골매 마을을 중심으로 도로가에 배를 내어놓고 파는 농민들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있는 골매는 1970년대 토탄이 많이 생산되어 이 지역 주민들의 소득원이 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인근 지역보다 지형이 낮아 파도가 높을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파도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온 해조류가 오랫동안 썩으면 토탄이 되는데 토탄은 비료의 주원료가 되어 비싼 값으로 팔리었다. 한때 토탄을 파낸 자리가 웅덩이가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메워져 있다.

신리마을의 지명은 운암(雲岩)마을의 이름을 따서 새운암으로 불려오다가 행정지침에 따라 마을명칭을 리(里)로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로 바꾸게 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은 경주 김씨로 알려지고 있으나 시기는 추정할 수 없다.

일제시대에는 이 마을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당시 건립되었던 서생어업조합 사무실과 사택건물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수곡수산(守谷水産)이란 회사가 부산과 방어진간의 물류를 운반했는데 이 화물선이 신리항에서 출입항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제일무역회사가 출범, 어부들이 잡아온 붕장어(아나고)를 일본으로 수출하여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밀복잡이 주항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현재 원자력 추가 부지로 선정된 비학마을이 보상이 끝나면 마을 전체가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신리마을 일부 골매(骨埋)와 본 마을 일부가 추가고시지역으로 지정되었고 비학마을 골매마을 주민들이 다 이주하게 되면 신리마을은 울주군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게 된다.

비학마을

울주군 최남단으로 부산의 기장군과 경계를 하고 있다. 또 마을 서쪽은 효암천이 기장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농어민 120세대에 주민 350여 명이 살고 있는데 마을 전체로 보면 어민이 많다.

이 마을은 3백여 년 전 노씨들이 집단으로 들어오면서 형성되었다.

옛날에는 효암과 비학이 경계를 이루는 효암천에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큰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각종 제방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다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마을은 소백산 줄기의 대운산 자락이 되어 소위 명당이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전국의 유명한 풍수학자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현재 원자력 연수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이 '한림 명산'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과거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마을 이름이 학이 난다는 비학이 된 것 역시 이곳 지형과 무관치 않다. 즉 이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동묘산이 마치 학의 입 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의 무리들이 동묘산 소나무 숲에 둥우리를 만들고 무학들 일대에 먹이를 찾아 오르내리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또 이곳에서 가까운 온곡 삼거리 마을을 학이 춤을 춘다는 뜻의 무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학 마을은 1960년대 초반 모범 방위촌으로 선정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의 속도가 빨라졌다. 당시 비학마을이 모범 방위촌이 된 것은 이 마을에 나타난 간첩을 주민들이 신고해 체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간첩이 나타난 것을 신고한 사람은 어촌계장이었던 이건용이었다. 이때부터 비학마을은 경남의 모범 방위촌이 되었고 이계순 당시 경남지사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 마을을 다녀가기도 했다. 이때 이 지사는 비학 마을의 숙원 사업인 방파제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때문에 비학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조업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민들의 소득이 크게 증가되었다. 이 방파제는 지금도 서생면에서는 가장 잘 만들어진 방파제로 손꼽히고 있다.

비학 마을은 또 다른 마을에 비해 어촌계 공동어장이 넓기 때문에 해녀들의 활동이 활발해 해녀들 역시 소득이 높았다. 당시 이 마을에는 20∼30여명의 해녀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큰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1992년에는 비학 마을이 울산의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어 또 한번 마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농어촌이 살기가 좋아지면서 농어촌에서도 각종 범죄가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비학 마을은 주민들이 일치 단결해 범죄 예방에 힘쓴 결과 범죄없는 마을이 되었다.

이 때문에 비학 마을은 울산시로부터 범죄 없는 마을로 표창을 받고 또 포상금을 받았다. 당시 비학 마을이 범죄가 없는 마을이라는 기념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졌는데 그 비석이 지금도 서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은 비학 마을 주민들은 최근 들어 뿌리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비학 마을은 지금부터 80여년전인 1922년부터 동적보를 기록해 오고 있다. 동적보에는 이장과 반장의 이름과 취임 연도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사업도 기록되어 있어 동적보가 완성이 되면 외부 사람들이 이 책만 보아도 비학 마을의 발전상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을 사람들이 고생해 이룩해 놓은 모범 마을이 요즘 들어 큰 시련을 맞고 있다. 그것은 한국 전력이 추진하고 있는 원전추가 건설 때문이다. 비학 마을에 원자력 교육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78년이다.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원전이 들어서는 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들어서면서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우선 대부분의 땅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발을 할 수 없어 재래식 농어촌 가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 논과 밭 등 각종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원자력 발전소가 이곳에 추가로 원전을 건설하겠다면서 주위 전답을 사들이고 있다. 현재 주민들의 표정을 보면 자신들의 과수원과 논밭이 원전 지정지역이 되어 제대로 보상을 받은 사람들은 만족을 하고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불만에 차 있다. 더욱 난감한 것은 현재 한전이 추진하고 있는 원전 건설 계획을 보면 지난 수백년동안 참혹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발해 놓은 비학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전력 생산도 좋고 개발도 좋지만 부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명산리

명산리는 서생의 제일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기장군과는 효암천의 지천인 명산천을 중앙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 동으로는 신암리가 있고 북으로는 위양리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화산리와 기장군을 접하고 있다.

 

용곡산의 물이 가장 많이 흘러드는 이 지역은 또 서생에서는 가장 넓은 들판을 갖고 있어 서생면의 곡창 역할을 하고 있다. 명산천 옆으로는 무학, 사내들이 펼쳐져 있는데 옛날에는 이 들에서 쌀이 많이 수확되었지만 요즘은 미나리를 주로 재배해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마을과 달리 이 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행정적으로 보면 현재 이 마을은 강월, 연산, 용연 등 3개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1914년 행정 개편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용연은 용리와 한 마을이었고 강월은 온곡과 한 마을이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 폐합에 따라 연산동, 강월동, 용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명산리(明山里)라 해서 서생면에 편입되었다.

 

강월마을

지역적으로 보면 강월은 명산리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정조때(1777∼1800)까지만 해도 강월리(江越里)라 불렸으나 고종 31년(1894) 이후 강월(江月)로 정해져 이어져 왔다. '강월(江越)'은 효암천 너머에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고 또 '강월(江月)'은 연산마을에서 보면 달이 뜨는 마을, 즉 달이 뜨면 강월 마을에 달빛이 먼저 비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마을 이름으로 후자를 사용하고 있다. 강월은 15가구 이상 살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이는 15일(보름)이 지나면 달이 기운다는 이치와 같이 15가구 이상이 되면 누군가가 이 마을을 떠난다는 말에서 연유가 된 듯 하나 지금까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이런 얘기는 아마도 다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던 것 같다.

 

효암천 건너편에 있는 강월은 주로 산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논에는 미나리가 재배되고 있고 산에는 고리 원전의 전력을 수송하는 철탑이 많아 토지 이용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연산마을

연산은 12호 군도가 통과하는 바로 옆에 있는 마을로 서생역과 마주하고 있다. 당초 이 마을은 '연산(延山)'으로 불리었지만 해방을 전후해 '연산(連山)'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이 마을은 옛날에는 주위 산이 사방사업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만 오면 침수가 되는 침수 상습지역이었으나 최근 들어 사방사업 완료 이후부터는 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있다.

 

이 마을에는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술이(韓述伊)가 운영하는 유명한 대장간이 있었다. 현 온곡1구와 연산마을 중간의 하천 둑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 대장간은 농기구를 만들고 또 헌 농기구를 새것으로 교체를 해 주었는데 민등장이 열리는 날이면 서생 사람들은 물론이고 장안읍 사람들까지 이곳으로 몰려와 성시를 이루었다.

 

이 지역은 1914년 행정 개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당시 외남면 면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 8대 현종(1009∼1031) 때는 마을 앞이 아름다운 포구였는데 이때 청주 한씨 조상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면서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을 당시 마을 이름을 연산동(아리민등 또는 하민등)이라고 하였다.

 

용연마을

명산리 가장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북으로는 위양리와 용리를 경계로 하고 있고 남으로는 연산, 동으로는 신암 그리고 서로는 화산과 접하고 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논농사와 과수 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요즘 와서는 효암천 주위에서 양란을 재배해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지역 역시 사방사업이 완료되기 전까지만 해도 침수가 잦던 지역으로 옛날에는 비만 오면 논에 물이 가득차 농사를 망치곤 했다. 그러나 대신 비가 오면 논에 붕어가 들어와 농민들이 붕어를 잡곤 했다. 또 이 지역은 비가 많이 오면 용곡산에 있는 질 좋은 모래가 하천에 많이 쌓여 부산 조병창에서 차를 가져와 이 모래를 싣고 가곤 했다. 그러나 이런 질 좋은 모래는 용곡산에 대한 사방공사 이후부터는 비가 와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한때는 이 마을 인근에 있는 용곡산 자락에 질 좋은 수정이 많이 생산이 된다고 해 마을 사람들을 설레게 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부산의 광업자가 수정 광업권까지 취득해 이곳에서 수정을 개발했지만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조선시대 동래성에서 서생을 지나 울산성까지를 잇는 중요한 큰 길이 무학동을 거쳐 연산, 용연, 용리를 거쳐갔다고 한다. 용연에는 말을 매어두고 쉬어가는 곳도 있었으며 주막도 있어 파발마가 자주 지나갔다고 한다.

 

이 마을은 특히 용과 관련된 얘기가 많아 용리·용호골·용연·무룡곡·용당수·반룡·용소·기룡·대룡 등의 지명이 눈에 띈다. 전설에 따르면 태고 시절 용 아홉 마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는데 이 중 한 마리가 용연에 내렸다고 한다. 이 전설은 동네 위에 있는 용암과 또 동네 중앙에 용이 놀았다는 못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마을은 '용수물'이라고도 불리며 1650년경에 청주 한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화산리

화산리는 마근, 화산, 온곡1구, 온곡2구의 4개 행정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은 온양면 발리(鉢里), 동쪽은 위양리, 남쪽은 명산리와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 서쪽은 장안읍 오리(五里)와 경계를 이룬다. 효암천의 지천인 화산천을 중심으로 굽이굽이 농로가 이어지고 있고 동해남부선 철도가 마근터널에서 온곡터널까지 남북으로 통과한다.

지형적으로 서생면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볼 수 있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22번 군도가 지나고 있다. 특히 최근 만들어진 화산저수지는 동부 경남에서는 가장 저수량이 많은 저수지로 주위 경관이 뛰어나 앞으로 이 고장의 명소로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지역 역시 바다와 멀리 떨어진 지역이 되어 주민들은 주로 논농사와 배농사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온곡1구마을

화산리, 위양리, 명산리에 속하는 9개 동의 입구이자 중심지이다. 현재 화산삼거리로 불리는 곳을 중심으로 서생역, 부산-울산간 버스정류장, 울산-서생간 버스 정류장, 농협지소, 우체국, 명산 초등학교, 보건지소, 슈퍼마켓 등 편의시설이 밀집돼 있다. 이곳은 옛 지명이 무학동(舞鶴洞)으로 불렸는데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또 예전에는 '민등장'이라는 5일장이 이 마을에 섰는데 전국의 장꾼들이 드나들어 번화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보여주었으나 지금은 장이 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옛날 장이 섰던 지역을 중심으로 요즘도 슈퍼마켓 등 주민 생활에 편의를 주는 물건을 파는 상점이 많아 사람들이 이 지역에 많이 모이고 있다. 현재 이 지역의 인구는 111가구 349명이다.

온곡2구마을

온곡1구 동남쪽 철로 너머에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와, 서쪽으로 장안읍 개천마을과, 북쪽으로 화산리 온곡1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소쿠리 같이 남쪽을 향해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사철 따뜻한 것이 특징이다. 마을이름이 온곡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동해남부선 철교가 있는데 이 철교의 높이는 8.5m로 동해남부선에서는 가장 높은 철교이다. 약 300년 전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입향하였다는 유래가 있어 마을제당(골매기 신) 신도 장씨(張氏)로 모시고 있다. 이 마을은 강월(江月)과 한 마을이었으나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 당시 화산리 온곡마을로 분리되었다. 그래서 이 마을은 지금도 강월과 길흉사에 상부상조하는 등 인연이 깊은 편이다.

화산마을

이 마을에서 마근까지 화산천이 흐르는데 이 주위에는 상류부터 상보, 천마지기보, 큰보 등 15개의 보가 있어 논농사의 젖줄로 이용되어 왔다. 이 지역에서는 쌀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1997년 화산저수지가 준공이 되면서 이들 보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

이 마을에는 약 2천여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가장 먼저 살았던 성씨는 박(朴), 권(權)씨로 추정되나 그 후손은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다. 옛날에는 이 마을이 독등(禿登), 상독등(上禿登)으로 불렸다. 이후 고종 31년(1894)부터 민등(岷嶝), 상민등(上岷嶝)으로 바꿔 부르다가 1911년 화산동으로,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화산리 화산마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근마을

지형적으로 보면 마근은 서생면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화산리의 가장 북쪽에 있는 이 마을은 면소재지가 있는 신암에서는 온양 방면으로 10㎞의 거리에 있고 서쪽은 장안읍 오리, 신명을 경계로 하고 있다. 동해남부선의 제일 긴 터널인 마근터널(660m)이 지나는 이 마을은 20여 가구에 주민이 60여명밖에 되지 않아 서생면 22개 행정리동 중 두 번째로 작은 마을이다. 이 때문에 취학 아동 역시 적어 현재 유치원생 3명, 초등생 5명 그리고 중고생 8명이 있을 뿐이다.

이 마을 동쪽으로는 온양에 있는 울산온천으로 가는 22호 군도가 달리고 있어 교통은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 이곳은 지형적 특색으로 삼을 많이 재배하여 삼 '마(麻)' 달 '근(斤)'을 사용하다가 그것이 현재는 삼 '마(麻)' 뿌리 '근(根)'으로 굳어졌다. 한때는 마근당이라고도 하였는데 '막(絡)', '당(堂)', '골(谷)'의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정조 때(1777∼1800)에는 마근(麻斤)의 '근(斤)'자로 하였으나 고종 31년(1894) 부터 마근(麻根)으로 표기하고 있다. 마을 내 경지 활용도를 보면 밭이 4㏊, 논이 35㏊, 과수원이 39㏊, 임야가 40㏊, 대지 1㏊로 논농사와 배 과수원이 주된 산업이다. 이는 경작 및 종별 직업별 조사에서도 과수에 전업하는 인원이 4명, 과수와 수도작 겸업이 10명, 수도작만 하는 인원이 1명, 비농가가 5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의 생업을 짐작할 수 있다.

생산량을 보면 배가 전체 39㏊에 300여톤, 벼가 35㏊에 1천2백15가마에 달한다. 그 외 한우를 겸하는 농가도 있고 400여평에 걸쳐 버섯(느타리버섯)도 일부 농가가 재배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저수지 상류에 새로운 과수단지가 개발되어 배를 집단조성하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한때 백토광맥이 발견되어 이를 캐기 위해 부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했다. 백토는 주로 도기 재료로 사용이 된다. 군도에서 화산저수지로 들어가는 길에는 용주암이 자리잡고 있다. 화산저수지를 만들면서 이 마을의 9가구가 수몰이 되어 마을 인구가 줄어들었지만 앞으로 화산저수지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6·25 당시에는 인근 온양면 대운산에 공비들이 숨어살았던 관계로 마근마을 주민들은 가까운 화산마을로 피난을 해야 했다.

위양리

지형적으로 보면 용리와 함께 서생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북쪽에는 온양의 발리가, 동쪽에는 용리가, 서쪽에는 화산이 자리를 잡고 있고 남쪽에는 명산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역시 주민들이 논농사와 과수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과수원을 일구는 과정에서 밭에서 신구석기 시대의 돌칼과 토기 유물이 많이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양암 마을을 중심으로 발견이 되고 있는 이 유물들은 신암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에서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유물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에서 발견된 돌칼과 토기 등이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 유물들이 대부분 고려장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밝혀질 것 같다.

양암마을

양암은 위양리 제일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북쪽은 막곡과 위곡, 동쪽은 용리 신암과 경계를 하고 있다. 또 서쪽으로는 화산리, 남쪽은 용연리와 접하고 있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인 김동지라는 사람이 씨족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촌락을 형성하였다고 하는데 요즘도 인근 과수원에서 삼국시대 토기들이 발견이 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수령 5백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옛날 이수신이라는 지관이 심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근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우람한 당산목은 직경이 1.2m로 마을의 상징이기에 어느 마을보다 당산제에 정성과 애정을 다하고 있으며 마을 선대로부터 당산제수를 마련하기 위한 동답(900평)의 소득으로 제물을 마련한다.

그러나 위양리는 아직 어질 良자를 사용하지 않고 볕 陽자를 사용하고 있어 마을 이름에 혼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막곡마을

북으로는 위양, 남으로는 양암, 동으로는 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에는 화산리가 있다. 막곡은 마을 지형이 장막, 즉 앞이 막힌 골짜기 같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220여 년 전 마을이 형성될 무렵에는 이씨, 박씨, 최씨, 양씨 등 8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여러 성씨가 들어와 21가구가 살고 있다.

원래 막곡은 양암 마을과 한 마을처럼 생활했으나 행정상 독립된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동제는 막곡만 따로 하지 않고 양암 마을과 같이 지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이씨(李氏)의 고가가 있다. 이씨는 일제시대부터 만석꾼 집안이었는데 해방 후 농지개혁 때 살림이 줄어들어 지금은 당시의 집만 마을에 있다. 이 집에는 현재 이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위곡마을

위곡은 위양 마을의 가장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때문에 북쪽에는 온양면 발리 마을이 있고 동쪽으로는 용리, 남쪽으로는 막곡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과수원으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이 마을에 논이 많아 서생에서는 쌀이 많이 생산되는 마을 중의 하나였다.

이 마을이 위곡으로 불린 것은 마을 앞을 지나는 천(川)이 위천(渭川)이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마을 위치가 가장 위에 있기 때문에 순수한 우리말로 '위곡' 혹은 '위동'으로 불리었다는 얘기도 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이 마을을 후자의 경우를 생각해 상곡(上谷)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밀양 박씨(朴氏), 경주 김씨(金氏), 경주 최씨(崔氏)로 전하고 있다. 마을 지형은 배(船)를 닮았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로 인해 집 울타리 안에 우물을 파면 배에 물이 들어오는 형상이 되어 망한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마을내 가구수가 50가구가 넘으면 배에 과적을 하는 형상이 되어 마을 전체가 철거된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현재 이 마을을 지나는 8호 군도는 화산 삼거리에서 이 마을까지 1km 구간이 2차선으로 포장이 되어 있으나 이곳에서 덕하까지 연장 공사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형적으로 높은 이 마을에는 중앙전파관리소 울산분소가 있어 전파 관리를 하고 있다.

이 마을을 옛날에는 후동리(後洞里) 혹은 위동리(委洞里)로 부르기도 했다.

용리

용리는 신암·서생·화정·위양·명산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서생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용리의 지형은 동쪽에 있는 산 '딴등'이 용의 오른쪽 날개요, 서쪽의 '서당터' 뒷산 '텐산먼등'이 용의 왼쪽 날개며 동네 한가운데 있는 언덕 '속등'이 용의 몸통이 되고 북쪽의 태봉산이 용의 억센 머리가 돼 남쪽에 있는 언덕 '동삿재'를 불끈 걷어차고 힘차게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웅장한 지형이다.

옛날 조선조 초에 대 지관이 서생면을 가리켜 군수대좌혈(軍帥大坐穴)이라고 하면서 용리를 홍문가(紅門街)라 하였다 한다. 홍문은 정문(旌門)이라고도 하며 궁전, 관아, 충신, 효자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용리 땅이 길지(吉地)라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주장이다.

1913년까지는 울주군 외남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생면에 편입될 때 용연을 명산리에 나누어주면서 한 동리에 살았던 옛 정서를 생각해 용연에도 앞머리에 용(龍)자를 붙여 용연(龍淵)이라고 했다. 1962년 동래군에,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에야 옛 고향 울주군으로 제자리를 찾아오게 되었다.

용리마을

용리는 용리마을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1995년 창원대 박물관은 용리마을 동쪽 1㎞ 지점인 텃골(基谷)에서 삼국시대 유물을 발굴했는데 이렇게 볼 때 이 지역에는 이미 삼국시대 말기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리에 가장 먼저 살았다는 지(池)씨의 입향조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조 숙종 6년(1680) 경에 이곳에 취락다운 취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마을은 1894년경까지는 용동(用洞)이라 불리었고 지금의 용연과 한 동리였다. 그 후 마을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동네가 상서로운 동물인 용이 살다가 뒷산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을 믿게 돼 성지(聖地)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지면서 용동(用洞)을 용동(龍洞)으로 고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이름은 아마도 1910년 이전부터 사용된 듯하다. 해안 지역에서 떨어진 마을인 이곳 주민들은 단합과 화목이 돈독하고 상부 상조 정신이 투철하다.

생업은 농사가 대부분이나 과수원만 전업으로 하는 집이 17가구, 벼농사와 과수원을 겸하여 경작하는 집은 36가구, 비농가가 4집이다. 주요 작목별 연간 생산량을 보면 배 과수원이 40㏊에 390톤, 즉 15㎏들이 25,500 상자를, 수도작은 27㏊에 40㎏들이 1,500가마를 각각 생산하고 있다.

서생리

서생은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로 지금도 서생포왜성 등 당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아울러 이곳은 마을 뒤에 자리잡고 있는 실성산을 중심으로 인성사와 해운폭포 등 명승지가 많다.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웃 화정 마을에 있었던 수군만호가 수군동첨절제사로 승격되어 이곳에 머물러 조선조 후기에는 행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국도 31호선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위치로 보면 북쪽에 화정, 동쪽에 진하, 남쪽에 나사와 신암 그리고 서쪽에는 용리와 위곡이 있다.

이 지역은 크게 서생포왜성을 중심으로 성내와 성외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요즘은 성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성외에는 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온산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은 현재 울주군이 마을 전체를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울산의 주요 관광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생포왜성에는 요즘도 봄이 되면 벚꽃이 피어 울산은 물론이고 부산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아울러 최근 들어 우리나라를 찾는 일본인들 중에는 4백여 년 전 자신들의 조상이 건축한 성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마을은 또 오랫동안 서생장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서생장은 당초 성내 비석거리에서 열렸지만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성외로 옮겨져 지금은 성동초등학교 인근에서 5일과 10일 열리고 있다. 옛날에는 서생장이 열리면 서생사람들은 물론이고 울산, 온산 등지에서도 상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서생마을

서생마을은 단일 마을로 다른 지역에 비해 농토가 적고 또 바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편이다. 따라서 주민들 역시 대부분 농사를 짓고 또 배 등 과실수를 심어 가정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입향조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동래 정씨(鄭氏)의 14대째 후손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임란 전후 동래 정씨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정리

지형적으로 서생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북으로는 온양과 온산, 동으로는 회야강이 흐르면서 온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 남쪽으로는 서생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양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초에는 생서량이 이 마을에 있었다. 이 지역에는 수군만호지와 숙마성 등이 있어 옛날에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다른 마을에 비해 지역이 넓지만 대부분 산지가 되어 인구는 많지 않다. 옛날에는 화정에서 강양으로 가는 돌다리가 있어 주민들은 이 다리를 많이 이용했다. 이 다리는 강 안에 자연적으로 놓여진 돌 중간 중간에 마을 사람들이 돌을 놓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이 돌에는 석화가 많이 붙어 사람들은 이 다리를 굴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서생교가 생겨나고 또 돌들이 그동안 많이 유실이 되는 바람에 다리의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지금도 돌다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화정리는 화정마을과 술마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약 300년 전 김해 김씨(金氏)와 남양(南陽) 홍씨(洪氏)가 입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마을 제당 골매기를 한씨(韓氏) 할머니로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 두 입향조 성씨보다 한씨가 먼저 살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김씨와 홍씨가 처남 매부지간으로 지내오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화정마을

마을 앞으로 국도 31호선이 지나고 있다. 바다가 마을에서 가깝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농업 역시 벼농사보다는 과수와 원예 그리고 토마토와 채소를 많이 키워 울산사람들을 상대로 팔고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이 지역 사람들은 국도변에 간이 상점을 만들어 놓고 배와 감 등 과일과 무·호박 등을 파는데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농가소득이 높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있었던 수군만호지는 이 마을 바로 뒷산에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 유적지는 많이 훼손이 되어 지금은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옛날에는 이 마을이 구진(舊鎭)으로 불리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던 수군만호가 임진왜란 이후 서생성으로 옮겨진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화장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의 이름이 왜 화장재로 불렸는지 모르지만 마을 앞에 있는 들판 역시 화장들로 불리는 것을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술마마을

서생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온양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온양읍 행정구역인 온남면에 속해 있었다. 술마는 윗술마와 아랫술마로 나누어져 있는데 두 마을 모두 국도에서 안으로 쑥 들어간 자리에 있으며 가구수도 윗술마가 7가구, 아랫술마가 16가구가 되어 모두 23가구가 있을 뿐이다. 현재 온양과 서생의 경계지점에는 낭간집이 있다.

이 지역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집이 3채가 있어 이중 2채는 온양읍 소속이었고 한 채는 서생면 소속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중 두 채는 이사를 해 한 집만 남아 있는데 지금은 행정적으로 이 집이 온양읍에 속해 있다. 이 마을에는 연안 차씨(車氏)가 제일 먼저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한다. 그 후손인 차동일 6대조를 술마 입향조로 본다면 술마는 약 200년 전후에 마을이 이뤄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진하리

회야강의 가장 하류 지역으로 서쪽은 서생, 남쪽은 대송, 그리고 동쪽은 온산, 북쪽은 온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진하 해수욕장은 울산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여름이면 울산은 물론이고 부산에서 많은 해수욕객들이 모인다. 진하는 이웃에 있는 간절곶과 함께 전국 명승지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때문에 진하는 면적은 좁지만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고 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소가 많다. 아울러 여름철 해수욕객들을 상대로 하는 슈퍼마켓 등이 발달해 상가도 많은 편이다.

이 마을은 또 마을 곳곳에 해송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경치 또한 좋은 곳인데 특히 마을 앞바다에 있는 명선도와 이덕도가 아름답다. 이 마을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하는 것은 진하 8경 중 '선도귀범(仙島歸帆)'과 '대암초가(臺岩樵歌)' 등 2개가 이 마을에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도귀범은 명선도 부근으로 고기잡이 배가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대암초가는 대바위에서 나무하는 초동들이 불렀던 노래소리를 말한다. 이 마을은 특히 1970년대 진하 해수욕장이 개장되면서부터 급격히 발달되었는데 마을 중심부에 있는 성동초등학교는 역사가 오래되고 운동장에 노송이 많이 심어져 있어 교내 전경 역시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마을은 진하 해수욕장이 개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멸치 어장으로 유명했고 또 진하 해변을 중심으로 갯방풍과 해당화가 많이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이중 특히 갯방풍은 중풍의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꺾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씨종자조차 구하기 힘들다.

대신 요즘은 자생은 없지만 이 풀을 재배하는 집이 이곳에 2∼3가구가 있다. 진하라는 이름은 서생포 동첨절제사가 있는 진지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조정에서는 현 서생포 왜성에 우리군을 주둔시켰다. 임란 이전의 마을 역사는 자료가 없어 고증할 수 없고 주민의 선대를 추정하여 보면 김해 허씨(許氏)등이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어 200여년 전에 이 마을이 이미 현재의 마을 모습과 비슷하게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하는 현재는 모두 육지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부는 육지로, 일부는 강(하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서생리 도독(都督) 구미가 선착장이라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 1970년 후반 지금의 금호장 횟집 주변에서 주민들이 술잔, 옹기 등 토기를 발견한 적이 있어 이곳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예상외로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진하마을

진하리 역시 진하 마을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인근으로 국도 31호가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만 해도 바다였다고 하는데 그동안 해안의 융기 현상으로 지면이 높아졌고 이후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요즘도 이 마을의 흙을 파 보면 흙속에서 모래가 많이 나온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마을 뒤편에 있는 서생왜성까지 배가 접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중앙에는 만석정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이 건물은 지금부터 60여년전 당대의 부자였던 이종수가 세운 한옥으로 지금도 우리 건축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에서는 각종 문화행사가 많이 열리는데 최근에는 음식물 한일교류전도 이 집에서 열렸다

대송리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앞이 확 트여 서생면에서는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 앞에 있는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기도 했다.

이 마을은 동은 바다, 북은 진하 그리고 서남쪽으로 나사와 접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어 왔는데 지금은 다시 새로운 등대를 세우고 있다.

이 지역의 경우 주민들 대부분은 바다에 생업을 두고 있고 일부 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지역 대부분의 논은 천수답이기 때문에 수확량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더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이곳은 동북아에서 2000년 새해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 되어 전국적인 명승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 역시 많이 신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철도청에서 매주 관광 열차를 운행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지금부터 20여년 전만 해도 겨우 차 한 대가 다닐만한 도로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포장이 되지 않아 차가 다닐 때면 먼지를 많이 내었다. 그리고 이 길로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다녔을 뿐이다.

이 지역은 대송, 평동, 송정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마을에는 횟집 등이 많아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송정마을

서생면소재지가 있는 신암과 진하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마을로 해돋이로 유명한 간절곶과는 남쪽으로 접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들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서생, 용리, 나사, 대송 등 다른 마을로 나아가 농사를 짓는다.

이 마을이 송정으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마을 중앙으로 31호 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지금도 국도 위쪽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 말기에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소나무 송진을 일본에 공출하기 위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 마을은 또 주변에 어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간절곶을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계절풍을 만나면 간절곶을 넘기 힘들어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여 식수나 식량을 공급받는 피항지 구실을 해왔다. 이 마을 앞 바다는 또 수심이 깊어 방파제나 어항시설이 개발되면 어업전진 기지항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왔던 것은 약 25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부엉듬(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는 뜻)에 성씨 불명의 학석이네와 잠박굼(현 진하리 1번지)에 역시 성씨 불명의 한 집이 살면서 불씨가 떨어지면 서로 불씨를 얻어다 쓰곤 했다는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학석이네가 살았다는 곳에는 지금도 돌담이 남아 있으며 고동, 조개껍데기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14년 이전부터 송정이라는 행정명을 사용해 오고 있으나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는 '잿골'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이 마을이 옛날부터 이렇게 불린 것은 기와를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잿골에서 구워진 기와는 서생첨사 관청을 건립할 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기와 가마터는 현 대송리 산 9-7번지 김주배(金珠培) 집터로 추정되고 있다. 약 250년 전 연안(延安) 송씨(宋氏) 할아버지와 지씨(池氏) 할머니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지금도 연안 송씨 집성촌(14가구)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충주 임씨(5가구), 전주 김씨(4가구), 청주 한씨(5가구), 충주 지씨(3가구), 경주 이씨(3가구), 경주 최씨(5가구) 등의 성씨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엽에 서생면의 행정구역에 속하게 되었고 1910년 대륙(大陸)·송정(松亭)·평동(平洞) 3개 마을이 합하여 대송리로 개편되었다. 이후 1961년 대송(大松)에서 분동되어 송정리가 되면서 초대 이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대송마을

이 마을은 최근 들어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바위는 간절곶에서도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고 있다.

요즘 들어 이 마을에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아직 교통사정과 숙박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 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이는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大)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다 대륙동의 대(大)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松)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사람은 공씨(孔氏) 할아버지와 구씨(具氏) 성을 가진 할머니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어느해 장질부사가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지금의 대송리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이들 부부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던 곳은 간절곶 북쪽으로 현재 회를 파는 포장마차가 즐비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연대는 500년 전이라고 한다. 또 마을 전설에 따르면 입향조인 공씨 할아버지와 구씨 할머니는 죽어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골매기 할배 할매'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위해 제당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제당이 현재 간절곶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이들 입향조의 후손은 없는 상태이다. 대신 지금은 김해 김씨와 학성 이씨, 밀양 박씨 등이 사는데 정월 보름에는 반드시 골매기 할배와 할매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마을은 어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촌계가 구성되어 어민들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

평동마을

서생면 소재지에서 울산 방향 동쪽으로 3㎞ 지점에 있다. 마을이 해안가에 있기는 하나 뒷산이 동서로 가로막고 있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바다와 면하고 있는 마을이라 여름에는 피서객이 많이 찾아오고 사계절 내내 관광객이 드나든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어업을 하거나 생선회를 팔아 살아가고 있다. 현재 마을 앞으로는 간절곶과 나사리를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공사 중인데 완공될 경우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뒤로는 국도 31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또 주위에 해송이 많아 경치 또한 뛰어나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순조 때 충주(忠州) 지씨(池氏) 32세조 4형제가 안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 지명은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1910년경 대송리에 편입되어 울산군 서생면 대송리 평동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평동이란 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처음에는 충주(忠州) 지씨(池氏), 추계(秋溪) 추씨(秋氏), 밀양(密陽) 박씨(朴氏), 울산(蔚山) 박씨(朴氏), 달성(達城) 서씨(徐氏), 김해(金海) 김씨(金氏), 인동(仁同) 장씨(張氏), 월성(月城) 이씨(李氏) 등 16가구가 살다 2000년 현재 87가구로 늘어났다. 민간신앙으로 2백여 년의 나이를 가진 해송 당산나무에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모셔오고 있다.

또 이 마을은 1972년 마을 호안공사를 성공리에 마쳐 서생면에서 최초로 새마을 우수마을로 선정(1973)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여러 차례 견학할 정도였다. 1940년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터가 있었다고 하나 그동안 신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예배장소가 경작지로 바뀌었고 예전의 종교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나사리

이 마을은 동쪽으로는 대송리 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남과 서로는 신암리, 북으로는 진하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모양은 동에서부터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마을 앞 모래사장은 약 800m이며 폭은 10∼20m로 여름이면 부산, 울산 등지에서 피서객이 몰려와 연중 관광객이 5천∼7천명에 이른다.

서생면민들이 대부분 배 과수원을 갖고 논농사를 하고 있는데 반해 나사리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일부는 논농사를 짓고 있지만 수입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나사리에서는 서생면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배 밭을 구경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신 다른 지역에 비해 어업이 발달한 나사리는 특히 멸치잡이가 유명하다. 나사리에서 이처럼 멸치잡이가 많이 되는 것은 이 지역 항만이 다른 지역에 비해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사리는 멸치를 잡는 방법으로 지인망이 유명하다. 지인망은 일명 후리라고 하는데 이 방법은 한쪽 그물 끝을 육지에 두고 다른 한쪽 끝은 어선에서 펼치면서 여러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겨 멸치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원시적인 방법이 되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방법으로 멸치를 많이 잡아 주민 소득이 높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어획고가 고갈이 되면서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나사리는 또 미역을 많이 생산하고 있어 마을 곳곳에서 요즘도 미역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마을 뒤쪽의 봉대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또 동으로는 대구장끝이, 남으로는 신선암이 활처럼 마을 앞바다를 감싸안아 경치가 빼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 이 마을에는 마을 제당 밑에 석축 방파제가 있다. 이 방파제는 100m의 길이로 일제 때 처음 축조되었다. 이후 이 방파제는 각종 태풍으로 파손이 되었으나 1차 증축을 했고 1993년 마을 사람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다시 증축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방파제는 당시 많은 예산을 들여 증축을 하면서도 환경영향평가를 하지 않아 현재 마을 사람들이 여러가지 불편을 겪고 있다. 우선 불안 해변가 모래가 큰 동네(정미소 밑)로 밀려가고 있다. 이 마을은 증축 공사전 백사장 폭이 20∼30m에서 지금은 3∼10m로 좁아져 작은 태풍에도 호안이나 주택의 침수와 붕괴가 우려되고 있다.

반면 정미소 앞에는 없던 모래가 자꾸 쌓여 모래운동장을 방불케 하고 있으며 공사 전 선착장으로 이용하던 곳이 수심이 얕아 지금은 소형선박도 접안을 할 수 없는 형편이고 수심이 깊은 곳은 조류가 심하여 각종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방파제는 태풍이나 해일 등의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선박 등의 교통편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나사마을의 방파제는 위 두가지 기능을 모두 못하고 있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이 마을에는 또 신고리 원전 건설로 이주를 해야 하는 비학 마을 사람들이 이주해올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신고리 원전 건설을 하면서 비학마을 사람들을 개발제한구역인 나사리 215번지 주변으로 이주키로 하고 이 일대 2만8천6백㎡에 이주민 주택 단지를 조성키로 계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문화재 시굴 조사가 곧 있을 예정이고 이 조사가 끝나면 이주 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나사(羅士)라는 명칭은 나사(羅沙)에서 바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어릴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이 낚시터였는데 그동안 모래가 계속 쌓여 뭍(육지)으로 변하였다고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처음에는 '모래가 뻗어나간다'하여 '나사(羅沙)'라고 사용하다가 그후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원해 '나사(羅士)'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마을 명칭의 변화는 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불안'이라는 자연마을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불'이란 모래나 자갈 등으로 이루어진 터를 말하는데 이 마을이 불안이 된 것은 모래나 자갈이 안쪽에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나사마을

긴 해변을 끼고 있는 나사리는 마을이 나사마을 한 곳 뿐이다. 이 때문에 여름에는 지역 사람들보다는 부산과 울산 등에서 온 외지인들이 더 많다. 마을은 크게 31호 국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으로는 산지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해안을 끼고 있는데 마을은 대부분 해안 가까이 자리잡고 있다.

해안 중에도 대송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떡방구 부근과 해변의 서쪽에 있는 대구장끝은 물이 맑고 또 경치가 아름다워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이 많다. 이 마을에는 일제시대 봉대산을 중심으로 금맥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일본 사람들이 한때는 금을 채굴했던 곳이기도 하다. 봉대산 서쪽에는 지금도 구덩이가 많아 당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봉대산 금맥이 마을이 있는 해안까지 뻗었다고 해 한때는 마을 사람들도 금을 찾아 나섰으나 성공을 하지 못했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약 360년 전 인조(1624∼1649) 후기에 달성(達城) 서씨(徐氏)가 먼저 들어왔다 하며 그후 광주(廣州) 이씨(李氏), 경주(慶州) 최씨(崔氏) 등이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이전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박씨(朴氏)가 살았다 하나 후손이나 자료가 없어 고증을 할 수 없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