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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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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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천리

곡천리(曲泉里)는 정조(正組) 때는 간곡리(肝谷里)라 하였다가 고종(高宗)31년(1894)에 간곡(肝谷)과 곡천(曲泉)으로 갈라졌으나 1911년에는 곡천(谷川)이라 하였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다시 곡천리(曲泉里)라 하였다.

곡천(曲泉)은 한동안 곡천(谷川)이라 하였던 이름이다. 곡천(曲泉)은 [곰내]로써 이는 곰내(熊川)가 변한 것이며, 곡(曲)은 곰(熊)의 차자(借字)이다. 곰내를 공개(孔界-西倉地方의 回夜江)라 한 것과 고마나루를 공주(公州-忠南)라 하였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웅촌지방은 일찍 고마족(濊貊族)이 흘러와서 우시산국(于尸山國)을 건설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에는 [검] [곰]의 말이 붙게 되는데, 예맥(濊貊)의 고음이 [과이모]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검단(檢丹)의 [검] 간곡(肝谷)의 [간]도 다 [곰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웅상(熊上)의 우불산(于弗山. 干火山)은 신라 삼사(三祀) 가운데 소사(小祀)로 받들어온 우불산(干火山) 그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에 이르러서도 영남 4대 명산의 하나로 견관치제(遣官致祭)하여 온 명산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곳은 [터(神鄕)]라 하여 [곰]이란 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며, 웅촌(熊村). 웅상(熊上)이란 말도 다 이런 데서 연유되어 나온 말이다.

곡천리 [곱내, 곡천, 곰내, 웅천]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서 회야강 상류에서 흐르는 굽은 내(川)가 있으므로 곱내, 곰내, 또는 한자로 곡천(曲泉) 웅천(熊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간곡(肝谷)을 병합하여 곡천리라 하였다.

검단리

정조년간(正祖年間)이래 줄곧 검단(檢丹)이라 하여온 마을이다. 검단(檢丹)의 유래를 말하매 검단사(檢丹寺)가 있었으므로 검단(檢丹)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검단사(檢丹寺)도 검단(檢丹)에 세운 절이었으므로 검단사 검단사(檢丹寺)라 이름지은 것이라 본다면 검단(檢丹)의 참뜻을 파악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생각하건대 궐곡(闕谷). 궐각단. 골각단이란 지명이 있어 이는 우시산국(于尸山國)의 궁궐(宮闕)이 있었던 곳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보다는 곰각단(熊角丹)내지 검각단(檢角丹)으로 보고자 한다.

곰(熊) 검(檢)은 다 [검]으로 고마족(濊貊族)의 주처 또는 [검터](神鄕)를 뜻하게 되는 것이다. 우신산국(于尸山國)의 국읍(國邑)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검]이란 말이 붙게 되는 것이다. 양주동(梁柱東)선생은 [검]은 [김, 검. 금. 곰]등으로 서로 음전(音轉)하는 신(神)또는 왕(王)의 옛말로 보았다. 이러한[검]은 [王. 朕., 解慕(해모), 蓋焉. 固麻. 金馬. 乾馬. 儉. 檢. 錦. 琴. 今. 黑. 金. 熊. 肝. 孔. 公]등으로 차자(借字)되어 왔다. 丹은 골(谷)의 고훈(古訓) [단]이며 이[단]은 [실]또는 [당(堂)]으로도 서로 변전한다.

한실(大谷) 彦陽邑 大谷
羽溪縣本高句麗羽谷縣 別號 玉堂(世宗實錄地理江陵府)
또 이[검]은 옛지명에 [頓. 旦. 呑 : 돈. 단. 탄]등으로 음차(音借)되는 예를 볼 수 있다.
谷縣-云首乙呑(三國史記地理四)
習比谷-作呑(三國史記地理四)
水城谷縣-云買旦忍(三國史記地理四)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보아 검단(檢丹)은 [검골]로써 터(神鄕)내지 왕골(王谷)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도읍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신골(神谷)보다는 왕골(王谷)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百濟)의 왕성을 곰재(固麻城) 곰나리(熊津)라 하였다가 뒤에 공주(公州)라 하는것도 다 곰(熊)이 왕(王)과 호전(互轉)되기 때문이다.

검단(檢丹)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써 검단사(檢丹寺)가 있었으므로 검단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암곡동(岩谷洞)과 운암동(云岩洞 : 雲岩洞)을 병합하여 검단리라 하였다. 이곳은 삼한시대 우화국(于火國)의 수읍(首邑)이었는데 3층 석탑등 많은 유적이 있다.

은현리

은현리(銀峴里)는 조선 정조(正祖)때에 덕현리(德峴里)와 새암리(歲巖里)로 갈라져 있었다가 고종 31년(1894)에는 덕현동(德峴洞) 덕곡동(德谷洞) 운앙동(云巖洞)으로 다시 세분되었으며 1911년에는 덕현(德峴) 은하(隱下) 덕곡(德谷) 용산(用山)이라 하였으나 191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은현리(銀峴里)라 하였다.

은현리(銀峴里)는 은하(銀下)의 은(銀)과 덕현(德峴)의 현(峴)을 서로 따서 된 이름이다.

은 현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현(德峴). 덕곡 용산(用山) 은하(銀下. 隱下)를 병합하여 은하와 덕현의 이름을 따서 은현리라 하였다.

고연리

고연리(古蓮里)는 조선 정조(正祖)때에 와지리(臥旨里), 갓동리(笠洞里), 지소리(紙所里)의 세마을로 갈라져 있었다. 고종(孤宗) 31년(1894)에는 와지동(臥旨洞), 연답동(蓮沓洞), 갓동(冠洞), 고야동(古也洞), 지소동(紙所洞)으로 세분되었다가 1911년에는 지소동(紙所洞)을 반계동(盤溪洞)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들 다섯 마을을 합하여 고연리(古蓮里)라 하였다. 고연(古蓮)이라 함은 고야동(古也洞)의 고(古)와 연답동(蓮沓洞)의 연(蓮)을 합하여 고연리(古蓮里)라 하였다.

고연리(古蓮里)에는 반계(盤溪), 괴천(槐川), 관동(冠洞), 와지(臥旨)의 4행정 마을이 있다.

고 연

본래 울산(울주)군 웅촌(웅하)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야(古也) 관(冠) 와지(臥旨) 연답(蓮沓) 반계동(盤溪洞)을 병합하여 고야와 연답의 이름을 다서 고연리라 하였다. 현재 반계, 괴천(槐川). 관동(冠洞 : 와지,연답 포함) 등 3개의 행정 리동과 5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울산 읍지에는 蓮畓洞의 蓮자가 [連]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대리

대대리는 영조 25년, 정조 때 대여리(垈如里)라 하였다가 고종 31년(1894)에 상대(上垈), 중대(中垈), 하대(下垈), 중평(中坪)의 네 개동으로 분립하여 있었으나 1911년에는 상대(上大), 중대(中大), 하대(下大) 3개동이 되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대대리(大垈里)라 하였다. 1939년도에 저리(楮里)가 하대에서 분동하니 4개동이 되고 대대리에는 상대, 중대, 하대, 저리의 행정마을이 있다.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서 신라시대부터 집터였다 하여[터어][터에]라고 불리어 왔다는데 조선 중엽에 민가가 늘어나자 [큰 터]라는 뜻으로 대대(大垈)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상대동(上垈洞) 중대동 하대동을 병합하여 대대리라 하였다.

본래 울산군(울주군) 웅촌면의 지역으로서 터어, 터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역 폐합에 따라 상대동 중대동 하대동 저리를 병합하여 대대리라 함.

초천리

영조 25년(1749) 학성지(鶴城誌)에 초정유석정기미여초고명(椒井有石井基味如椒故名)-초정에는 돌 샘에 물이 나는데 그 맛은 제피나무 마과 같다-라 적혀 있다. 본래 울산군 웅촌면 지역으로 약물 초정(椒井) 있었으므로 초천 또는 초정이라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기(內基)동과 병합하여 초천리라 했다. 초천리(椒泉里)는 정조(正祖)때 초정리(椒井里)라 하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초정동(椒井洞)과 내기동(內基洞)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초천리(椒泉里)라 하였다.

초천약수(椒泉藥水)는 동온(冬溫), 하냉(夏冷)으로 치풍통체(治風通滯)에 유명(有名)하여 한강선생은 정구(鄭逑)의 호이며 1545(중종38)년-1620(광해군12)년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한강 선생이 초청까지 와서 목욕을 하고 갔으며 선조시(宣祖詩) 노계 박인노선생(蘆溪 朴仁老先生)의 시조(詩調) 한 수(首)가 있다.

신농씨(神農氏) 모를 약(藥)을 이 초정(椒井)에 숨겼던가
추양(秋陽)이 쬐이는데 물 속에 잠겼으니
회점(會点)의 욕근기상(浴近氣象)을 이제 본 듯 하도다
홍진(紅塵)이 뜻이 없어 사문(斯文)을 님을 삼아
계왕(繼往) 개래(開來)하야 오도(吾道)를 맡키시니
천재후(千載後) 회암 선생(晦菴先生:주자)을 다시 본 듯 하여라.

초 천

정조년간과 고종(高宗) 31년(1894)이래 초정(椒井)이라 하다가 1914년에 지금의 이름인 초천(椒泉)이라 하였다. 초정(椒井) 내지 초천(椒泉)이라 함은 회야 강변에 약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천연으로 된 석함(石函) 속에서 거품 섞인 약수가 솟아 나와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철에는 시원하여 그 맛은 신산(辛酸) 맛이다.

약수로 목욕하면 풍(風)을 고치며 복용할 때는 체증(滯症)이 내려간다. 또 설탕을 타면 사이다와 같은 맛을 가져 여름철에는 청량음료로서 즐기며 명절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이 접종하였다.
해방 후에는 이 약수로 청량음료인 오복사이다를 만들어 한 때 시중에 판매한 일이 있었다. 초천(椒泉)이라 하는 초(椒)는 향기롭다 하는 뜻을 가진 것이다.

통천리

통천리(通川里)는 정조(正祖)때 통천리(桶泉里)의 한 마을이었으나 고종(高宗) 31년(1894)에 통천동(桶川洞)이라 하였다가 1911년에 이르러 통천(通川), 자천(紫川), 신리(新里), 자암(紫岩)의 4개동으로 갈라졌으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통천리(通川里)라 하였다.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서 통샘이 있으므로 통새미. 또는 통천(桶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암(紫岩)과 자천(紫川)을 병합하여 한자를 바꾸어 통천리(通川里)라 하였다.
1911년에 통천이 세 마을로 갈라져 통천(桶川), 자천(紫川), 자암(紫岩)이라 하였으나 그 위치는 자세하지 않으며 자암은 장재못이 있는 곳인 듯하다.

본래 울산군(울주군) 웅촌면의 지역으로서 통샘이 있으므로 통새미 또는 통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다라 자암리, 자천리를 병합하여 통천리라 함.
고종(高宗)때는 [통새미(桶泉)]라 하였다가 1911년에 지금의 이름인 통천(通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통천의 유래는 통새미라 한 우물에서 유래되었다.

석천리

석천리(石川里)는 정조(正祖) 때 돌 내리(乭川里)라 하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석천동(石川洞)과 석계동(石溪洞)으로 갈라져 있엇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석천리(石川里)라 하였다.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서 회야강이 마을을 감돌아 흐르므로 [돌내] 또는 [회천]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돌이 많으므로 돌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계동(石溪洞)을 병합하여 석천리라 하였다. 본래 울산(울주)군 웅촌면의 지역으로서 회야강이 마을을 감돌아 흐르고 또는 돌이 많으므로 돌내 또는 회천 석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계동을 병합하여 석천리라 함.

돌내(乭川-回川)는 강물의 유로가 돌며 굽이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돌(乭) 은 유로가 돈다는 뜻, 석(石)은 돌의 이두자, 내(川)는 사람이 사는 터전을 뜻함인데 이는 인류가 처음에 산에서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려 오다가 내(川)를 따라와서 농경을 시작하여 살았다. 이 내는 사람이 사는 터전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다시 내(壤)의 개념으로 변하였다.

그러므로 돌 내의 내는 회야 강이란 천(川)의 개념보다도 터전, 땅의 개념으로 파악함이 좋을 듯하다. 또 돌내(回川)의 돌(回)도 물의 흐름이 도는 것을 뜻하는 이두자(吏讀字)이다.

대복리

대복리(大福里)는 정조(正祖)때 오복(五福)과 대양(大揚), 고종(高宗) 31년(1894)에 오복동(五卜洞)과 대양동(大陽洞)으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여 대양동(大陽洞)의 대(大)와 오복동(五福洞)의 복(福)을 서로 따서 대복리(大福里)라 하였다. 대복리(大福里)에는 오복(五福)과 대복(大福)의 두 행정마을이 있다.

본래 울산(울주)군 웅하(웅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양동과 오복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복리라 하였다. 본래 울산(울주)군 웅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양동과 오복동을 합하여 대복리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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