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촌면

사람이 희망인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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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소개

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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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못

웅촌면 통천리에 옛날 한 장자가 살고 있었다. 어떻게하여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아서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는 일이나 재산을 모으는 일이나 또 이루어 놓은 살림을 지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부자가 욕심이나서 더 재산을 늘어나게 하려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위에서 그런 욕망이 달성되어야 되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이다.

웅촌의 이 부자도 예외일 수는 없어 살림을 모을 때나 그것을 지킴에 있어 많은 말썽들도 나고 인색한 소문은 고을안에 퍼져 있었다. 하루를 두고도 많은 과객들이 드나들고 동냥바치들의 치닥거리도 짜증거리의 하나였다. 그래서 때로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살아볼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았다.

하루는 수도하는 한 중이 요령을 흔들면서 동령(動鈴)을 구하고자 뜰에 들어서고 있었다. 뜰에서는 이때 몇 사람의 머슴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주인도 마침 머슴들의 일을 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동냥을 하는 사람이 한차례 지나가는데 또 중이 찾아와서 염불을 하니 그만 짜증이 나서 주인은 본성이 들어나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저까짓 중에게 줄 동량이 어딨노. 소똥이나 한 바랑 여어조라」하였다.

머슴들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두 머뭇거리고 있으니 화가 치밀어 오른 주인은 머슴들을 호통하였으나 동냥은 주지못할망정 쪽박은 깰 수가 없어 모두 어찌할 줄 모르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있던 주인은 그만 화가 치밀어 큰 삽을 들고 외양간에 들어가더니 쇠똥을 한삽 담아들고 나와 중의 바랑에 부어버렸다. 쇠똥을 받은 중은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남겨놓고 길을 떠나 버렸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얼마가지 않아 여름철이 와서 자주 비가오는 장마가 접어들고 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들로 산으로 일터를 찾아 나가고 없었다. 이때 마을에는 큰 변고가 일어나 산천이 벽해가 되고 있었다. 갑자기 큰물이 닥쳐 장자집을 쓸어가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들과 산에서 내려와 보니 장자집은 큰 못으로 변해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랄 일이었을 뿐이다.

뒷사람들은 이 못을 장자못이라 하였으며 장제못, 장기못이라고도 하였다. 뒤에 이못가에 있는 마을을 못산이라 불렀는데 이 장자못은 웅촌면 통천리에 있다.
장자못의 설화와 같이 부자들의 잘못을 경계한 전설은 울산지방에 많이 전해온다

운흥사지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반계부락에서 천성산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 갈라치면 광활한 신라 고찰지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께서 승려 천명을 수용한 큰 절을 지었던 자리다. 원효대사는 당시 기장 장안사 척판암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점을 치니 지금 저멀리 중국 오대산 밑에 있는 큰 법당안에는 승려 천명이 모여앉아 법회를 열고 있는데 그 뒷산이 곧 무너져서 법당을 덮쳐서 승려 천명이 몰살하게 되어 있었다. 사정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정지문 판자를 떼다가 해동사미 원효척판구중이라고 써서 당나라 오대산 밑 법당상공을 향해 날렸다.

판자는 순식간에 날아가서 법당상공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놀았다. 이때 한 승려가 밖으로 나와 공중을 쳐다 보았더니 판자가 놀고 있기에 모든 승려를 향해서 판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놀고 있다고 외쳤다. 승려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공중의 판자를 펴다보는 순간 뒷산이 무너져서 법당이 매몰되고 말았다.

동시에 판자도 땅에 떨어졌는데 거기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승려들은 원효대사의 도술에 의하여 천명의 승려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자 모두 신라로 건너와 원효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대사는 이곳에 큰 가람을 창건하고 천명의 승려를 수용하고는 화엄경으로 교화시키니 천명의 승려는 모두가 성인(聖人)으로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후부터 이산을 천성산이라고 부른다. 운흥사도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이곳에는 토기편, 기와조각 주초석, 축대, 딱바위, 석수조, 부도, 호박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입구에는 울산부사 홍상빈이 쓴 운흥동천이라는 암면각자 대서특필로 남아있다.

깊은 다리와 서장군

서장군은 달성 서씨로 웅상읍 매곡에서 태어났다. 힘이 얼마나 장사였는지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웅상읍이 웅촌면으로서 울산부에 소속되어 있을 때이니 울산 출입을 자주 하였는데 어느 날 하루 밤티고개를 넘어 날이 어두운데 깊은 다리쯤에 오니 개울가에서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인가도 없는 깊은 다리 개울가에 빨래하는 여인이 하도 이상하여 가까이 가서 "이 야밤에 여자가 요망하게 빨래는 뭐어냐" 하며 한 섬만한 바위를 들어 여인에게 던지니 여인은 여우소리를 내며 즉사하였다.

갑자기 간 큰 서장군이지만 간이 서늘하고 무서움이 닥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축지법으로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아뢰니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매구(여우)란다 하시며 서장군을 큰 독안에 숨겨두고 바깥채에 있던 디딜방아를 방에 들고 와서 죽은 사람같이 염을 해놓고 가족들은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니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서장군 있는냐고 물으니 서장군이 어제 저녁에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들어오더니 한기를 느끼며 자리에 누웠는데 아무리 간호를 해도 새벽에 죽었다고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더니 이왕 돌아가셨으니 시체라도 한번 보자고 하기에 방문을 열어주니 염한 디딜방아를 손으로 쥐니 바싹바싹 부러지고 방아괴(디딜방아 머리, 쇠로 만들었다)를 쥐어 보더니 서장군이 여기에 힘이 있었구나 말하며 돌아갔다. 집에 찾아온 사람은 서장군이 죽인 매구(여우)의 남편이었으며 서장군 묘는 웅상읍 매곡리 산 78번지에 있고 가까운 일가가 성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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