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산읍

사람이 희망인 울주

전체메뉴보기

읍면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 본문 인쇄
  • sns 공유 리스트 열기

덕신리

덕신리(德新里)는 임진왜란(壬辰倭亂:선조 25∼31년) 때 신야전탄(新野箭灘)이란 이름으로 처음 기록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이 마을의 명칭은 아마도 신야동(新野洞) 혹은 신밤(新夜)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탄(箭灘)이란 화살처럼 빠른 냇물 즉 급류가 소용돌이치는 강을 말함이니, 신야리 앞의 급류천(急流川)을 신야전탄(新野箭灘)이라 하였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 장군의 전승지이기도하다. 후일 부산진포 첨사와 다대포 첨사를 제수 받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일등선무원종공신인 서인충 장군은 현 울산의 동부동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육촌 동생 서몽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십여 일만에 3천의 장정을 규합한 후에 박봉수 여경원 박경새를 복병장으로 삼아 전략적 요충지에 매복케 하고, 김계남·허사남·성대명 군관과 박린복·박휘·박여담 군수(軍需) 담당으로 하여금 이곳 신야전탄으로 왜적을 끌어들이게 하여 크게 무찌른 뒤 동래까지 적을 쫓아내는 헉혁한 전공을 세운 곳이다.

 

정조(正祖) 7년(1783)의 기록에는 신경리(新庚里)라 하였으며, 고종(高宗) 31년(1894)에는 덕동(德洞) 신경(新庚) 반장( 長)으로 갈라져 있다가, 1911년에는 반장동( 長洞)이 없어지고 덕동(德洞) 신경(新庚) 오산(吾山)의 3개 동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3개동을 합하여 덕동(德洞)의 '德'과 신경(新庚)의 '新'을 서로 따서 덕신리(德新里)라 하였다.

덕신리(德新里)는 본래 온양면(溫陽面)에 속해 있었으나, 1974년 온산공단이 지정됨에 따라 이듬해인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8호에 의하여 청량면의 용암 학남과 함께 온산에 편입 이속 되었으며, 이후 1977년 울주군 조례 제 316호에 의거 신경(新庚) 신온(新溫) 덕산(德山)의 세 행정 마을로 되었다가, 1990년 이후로 신경 1·2·3리, 영남 1·2·3·4리, 동백 1·2리, 신온 1·2·3·4·5리, 주공, 덕산, 용방소 1·2·3·4리, 온덕 1·2리, 덕신 1·2리, 명봉리의 25개 행정 리가 새로이 탄생하였고, 1996년 2월 1일 온산이 읍으로 승격하자 온산읍 소재지가 되었다.

 

신밤마을

온산읍은 지리적으로 바다를 접하며 북쪽은 울주군 청량면을 남쪽은 서생면, 서쪽은 온양읍을 접하고 있으며, 울산 중심권의 남쪽에 위치하여 부산과 동해를 접한 항만과 도로 등의 천혜의 지리적 입지여건을 갖추고 있으며,동부 해안쪽에 온산 국가 산업단지에 중화학공업 및 비철금속공장을 건립하여 국가 산업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울벌마을

울벌은 신밤의 동북쪽 즉 거남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좌측으로는 거남리로 향하는 소로가 있고, 우측으로는 내동과 사방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마을 앞길은 신밤 마을을 향하고 있다. 지형이 날갯짓하며 우는 벌(蜂)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이곳은 주변에서는 마을이 제일 먼저 생겼고, 양지바른 터에 골짝 농사가 잘 되는 곳이라서 부촌(富村)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뒤늦게 접한 사람들이 이 마을로 이주하였으나 안착할 곳이 없게 되자 저지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물난리로 가옥에 침수되고 농사가 수해를 입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생기자,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잘사는 기존 사람들을 시기하여 그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곳이라며 악평을 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살기 어려워 울면서 떠나가는 벌판이라 하였다."고 하여 울벌(鳴伐)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옛날에는 벌이 많이 사는 봉(蜂)터가 있어 울벌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울벌마을의 또 다른 유래를 생각해 보면, 남향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앞쪽에서 남풍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살기 좋은 지역에 흔히 붙는 이름으로 광명(光明)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덕동마을

신밤의 서쪽 편으로 덕신교(德新橋)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는 덕(德)을 갖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여 덕동(德洞)이라 하였다고 하나, 덕(德)을 크다는 뜻으로 본다면, 이 마을은 옛날에는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겠다.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하여 한 두 사람이 왔을 때, 논배미만 얼마간 있었고, 허허 벌판이어서 강 건너 산비탈을 보니 그 당시 큰 마을이 있으므로 덕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산마을

신밤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거남산(巨南山)의 서남 줄기의 한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산세가 자라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오산(鰲山)이라 하였는데, 뒷날 간편한 글자를 취하여 오산(吾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작은 골짜기를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북쪽은 안마실, 서쪽에 있는 것은 건너각단, 남쪽에 있는 것은 아랫마을, 가운데 있는 것은 안골짝이라 하고, 안마실은 서들[西野]거랑과 사이를 두고 온양읍 망양리에 접한다.

 

살건내마을

덕동(德洞) 뒤편 산등성이 넘어 골짜기에 위치하고, 오산의 서쪽 신밤거랑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살건내의 '살(薩)'은 사(沙) 차(嵯) 서(西) 사(斯) 등으로도 표기되며 평야(平野)를 뜻하는 것이나 흔히 살수(薩水), 살매(薩買)와 같이 강물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두서면 활천(活川)의 고명(古名)이 전천(箭川)으로, 전(箭)은 (화)살[矢]이니, 물 흐름이 화살처럼 빠른 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살건내는 신야전탄(新野箭灘)의 급류 건너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고종 31년(1894)에 발간된 울산 구 읍지를 보면 이곳에는 연어방전( 魚防箭)이 있었다고 한다.

 

연어방전이란 연어가 많이 잡히는 곳을 선정하여 연어 잡이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던 것으로, 조선 중엽의 세제(稅制) 개편시 울산에는 태화동의 멍정과 신밤의 살건내 두 곳이 있었다. 멍정의 세금은 영납(營納)이라 하고, 살건내의 세금은 부납(府納)이라 하여 좌병영(左兵營)에 납입하였다고 한다.

 

반장골마을

고종 31년(1894)의 울산 구 읍지에 반장골이란 지명이 처음 나타나고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나, 1911년의 기록에는 반장골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이때는 이미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나 사람들이 살지 않은 골짜기로 변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그 위치도 분명하지 않다. 산성마을과 경계되는 지점의 산 능선에서 산성윗못[山城上谷池] 방향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에는 겨울철에 얼음이 가장 먼저 얼어서, 얼음계곡을 만들었다가 해빙기에는 가장 먼저 얼음이 녹는 작은 논배미들로 이루어진 곳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산성마을이 공단에 편입되어 반 이상이 철거되고 새로이 형성된 마을의 일부가 이 계곡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여기를 반장골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덕산마을

덕동(德洞) 오산(吾山) 살건내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우봉리

우봉리는 고종(高宗) 31년(1894)에 소당포(牛唐浦) 혹은 소당개라는 이름으로 당포동(唐浦洞)에 속하여 있던 마을로서 1911년에 분리되어 우방(牛方)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금 같이 우봉리(牛峰里)라 하였다. 매몰 유적의 흔적을 찾아보면 신석기 말기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는 인간이 정착하였고, 신라시대에 헌강왕이 다녀갔다는 설이 있는 임금산이란 이름이 전하여 옴을 볼 때 우봉 마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랜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봉화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본동(本洞)보다는 당월의 낫끝 남쪽에 위치한 새바우(새 바위)라는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고, 면적이 좁은 새바우에서 이주한 사람과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로 우방이란 마을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1911년에 여기를 우방(牛方)이라 한 것은 발리방(鉢里坊)·상방(上坊-울산 蓮岩洞)의 '坊'과 같이 조선조의 행정구역단위 가운데 최하위 단위를 지칭한 방(坊)에서 편의상 토변(土邊)을 생략하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경우는 사방(四方-方島里)·산하방(山下方-山岩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우방의 '우(牛)'는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은 데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산이 솟은 모양을 형용하는 말로서 '수리[述]' '술(戌)' '솔[松]' 등의 말이 있으며, 牛도 '솟'이 '소'로 줄어진 차자(借字)라 할 것이다.

이 마을 주위의 지형을 보면 마을 뒷산은 소가 엎드려 명산도(서생면 진하 앞 바다 소재) 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개분지(개본재)' 끝이 머리가 되고 임금산에서 강회까지 얕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는 굴내산은 소의 목에 씌우는 굴레처럼 생겨 있다. 옛날에는 '사뫼'라고도 불렀다 하는데, 소뫼에서 비롯된 말이라 하겠다. 또한 이 마을 뒤편의 정상 미떵(묘지)에 있는 조선조 인조 때 사람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정필재(鄭弼梓)의 묘비(墓碑)에는 우포(于浦)라는 지명으로도 명시되어 있다. 우봉마을은 봉화산이 팔을 내밀어 반쯤 포옹하고 있는 듯한 형국의 어촌으로, 온산의 법정 마을 가운데에서 가장 면적이 좁은 101,573㎡이다. 처음부터 이 마을의 면적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마을 좌측편의 새바우 가까이 까지는 당월마을에서, 우측편은 강양마을에서 서로 바다를 넓게 차지하고자 하는 이권다툼에서 당시 면 소재지였던 강양마을의 세력에 밀려 주민들의 주거지가 있는 곳까지 강양리 구역이 되고 말았다. 백여 년 전 이를 되찾으려고 주민을 대표한 어른들이 말을 빌려 타고 한양까지 찾아다니며 본래의 구역인 개분지 끝까지 복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으나, 끝내는 돌이키지 못하고 온산에서 제일 작은 법정 리로 남게 되었다. 온산국가공단 입주 직전까지의 마을은 총 9개 반으로 편성되어 216세대 972명의 동민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28개의 많은 성씨들이 모여 살아도 분쟁 없이 평화로운 마을로 한때는 전국에서 가장 어획고가 높은 복어 산지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바다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복어잡이 배들로, 뭍에서는 복어를 매입하기 위한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룬 부촌(富村)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복어가 잡혔지만, 주가 되는 것은 밀복이었다.

1977년 7월 동해펄프(주) 제1공장 건립당시 5가구가 공장부지에 편입되고, 1988년 철거대상지역으로 각 세대별로 보상금을 수령하고 50세대가 철거하였고, 1997년 주식회사 우봉[신한기계] 공장 입주에 따라 68세대가 철거 이주하여, 2001년 현재는 원래의 216세대에서 88세대만 남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강양리

조선 초기에 하산(下山:지금의 峰火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산(下山)이라 하였다. 정조 때는 바다에서 볼 때 강(江)의 입구(入口)라서 강구(江口)라고 하였다. 고종 31년(1894)에는 강회동(江回洞)과 하회동(下回洞)으로 나뉘어지고, 1914년 4월에는 이를 합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양리(江陽里)라 하였다. 강양이라 함은 회야강(回夜江) 어귀에 있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강양에는 오래 전부터 나룻배가 있어서 우봉 당월 강양 등지의 사람들이 이 나룻배를 이용하여 서생장을 보러가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차편을 이용하여 구진다리를 왕래하기 때문에 나룻배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에는 제법 넓은 평야가 있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는 반농 반어의 생활을 하며, 대체적으로 풍요로운 마을이었다.

1928년에 당월로 이전되기 전까지 온산면 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기존의 기와집을 사용했던 사무실격으로 비록 제대로 된 청사는 아니었지만, 이곳 주민들은 한때 면소재지였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강양리(江陽里) 안에는 강회(江回)와 하회(下回)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하회에는 200∼300년을 전후하여 경주 최씨(慶州崔氏), 남양 홍씨(南陽洪氏), 평해 황씨(平海黃氏) 그리고 약간 뒤늦게 200년 전에 청주 한씨(淸州韓氏) 등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강회에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경주 이씨(慶州李氏), 평해 황씨(平海黃氏) 등이 살고 있다. 오랫동안 서생치소 관할지역으로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서생지역과 유대가 원활하고, 바닷가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마을이다. 이 지역에서 5명의 면장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이웃인 서생(西生)·서포[西浦·지금의 온양읍 동상리]와 함께 서호(西湖)라고도 불려왔다.

강회마을

강회는 강양리(江陽里)의 중심 되는 마을로서 세 마을 가운데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고종 31년(1894)의 기록에는 강구(江口)로 되어 있으나, 1911년에는 지금의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회(回)는 강물의 흐름이 도는 곳에 흔히 붙게 되는 것으로, 하천의 만곡부(灣曲部)에는 흔히 회(回), 구비(仇非), 섬[島] 등의 지명이 붙는 곳이 많다. 그러나 이곳을 흐르는 회야강은 일직선으로 흐르고, 또한 물 속의 소용돌이도 없는 것으로 보아 회야강(回夜江)의 회(回)를 따서 이름 붙인 경우라 하겠다. 또 마을 이름을 강구에서 강회라 한 것으로 볼 때 강어귀라는 뜻으로 회야강의 어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 되겠다.

강구마을

흔히 강구나룻가라고 부르며, 강회의 동남쪽 바다에 접한 마을이다. 강이나 바다의 나루터인 목[項]을 곶(串·忍次·古資)이라 하기도 하고 '구(口)'로도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강구(江口)는 나루터 마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사실상 이곳에는 오랫동안 나룻배가 있기도 하였다.

강구는 다시 위 강구와 아래 강구로 나뉘는데, 지금 많은 횟집들이 들어서서 성시를 이루는 곳이 아래 강구이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는 인간정착의 흔적이 있지만 마을을 형성한 것은 약 450년 전 추월명이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고 그 자손들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회마을

회야강(回陽江)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강회(江回) 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개 마을이 위치하는 곳을 보면 산기슭의 오목하고 편편한 곳에 있다. 그러나 하회 마을은 뒷산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작은 능선의 끝 부분에서 능선 좌우와 위쪽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회야강의 범람으로 인한 가옥 침수를 우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을의 전면과 좌우로 모두가 평야 지대로 되어 온산의 곡창지대로 한 몫을 차지하는 곳이다. 논이 많은 곳에 필수적인 수리시설로써 '윗황새못'과 '아래황새못'이라는 큰 저수지가 마을의 서북쪽에 있어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혹간 사람들은 두 개의 저수지를 암수로 부르기도 하는데, 학이 목을 길게 빼고 물을 마시는 모양이라 하여 '황새못'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으로는 당사나무를 들 수 있다. 타 지역의 당사나무는 한 그루만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의 당사나무는 부모 당사나무 두 그루(500년 생 소나무)와 자식 당사나무 세 그루(약 150년 생 소나무)가 군집되어 있다. 낮이면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당사나무의 그늘에 앉아 새참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여름밤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며 정담을 나누기도 하는 명소이다.

1960∼1970년대를 기억하는 온산 사람이면 누구나 하회 마을 출신인 정동수를 알고 있다. 그는 선천성 맹인이었지만, 몹시 영리한데다 신(神)끼를 가지고 있어서 13세 때부터 남의 집에 가서 안택(安宅)굿을 해 주었다. 정동수의 개인굿은 탁월한 것이어서 병든 사람도 훌훌 털고 일어나게 하고, 우환이 그치지 않는 집안에도 정씨가 굿을 하고 나면 재수가 있다고 하여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56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만약 지금까지 생존해있다면, 아직도 80세 미만의 나이이므로 틀림없이 인간 문화재로 선정되었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아쉬워한다.

삼평리

삼평리는 조선조 초기 예종(睿宗)때의 기록에 돌밤[廻栗]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다. 영조 41년(1794) 기록에 외회야리(外回夜里)와 내회야리(內回夜里)로 되어 있으며, 정조 때(1777∼1800)의 기록에도 이 지명으로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1894년 고종 31년에 신회(新回) 내회(內回) 상회(上回) 종동(種洞)의 네 개 동으로 갈라졌다. 1911년에는 종동(種洞) 내회(內回) 상회(上回) 동으로, 신회(新回)가 없어지고 세 개의 마을로 줄어들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삼평리(三平里)라 하였다. 지금은 네 개의 행정마을로 상회(上回) 내회(內回) 종곡(種谷) 종동(種洞)이 있고 종동(種洞)마을에는 구터라는 마을이 합속되어 있다.

 

삼평이란 지명의 유래는 옛날에도 태평, 현재도 태평, 늙어서도 태평을 바라는 뜻에서 붙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지명 상에 나타나는 '平'이나 '坪'은 모두가 평평한 들판 즉 평야를 말하는 것으로, 넓은 들이 있는 상회·내회·종동마을의 '세 개의 들[三平]'마을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삼평리에는 마을 앞 넓은 평야지대를 가로지르며 회야강(回夜江)이 흐르는데, 이곳에서는 이 강을 옛날에는 돈강[錢江]이라 불렀고 지금은 이어강이라 부르고 있다.
남창으로 내왕하기 위해 놓여진 징검다리에서 2백m 정도 아래로 내려가면 강물이 급격히 꺾이면서 넓은 내를 이루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이어덤이라는 곳이다. 강둑이 되는 산기슭에 온양과 서생을 연결하는 군도(郡道)가 있고, 이어덤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주막이 있는데, 이 주막을 중심으로 온산·온양·서생면이 경계를 이룬다. 이 주막 마루에 앉아 식사를 하면 온양면에서 먹은 것이 되고,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면 온산면에서 잔 것이 되며, 뒷간에 가게 되면 서생면에서 볼일을 본 것이 된다고 하는 재미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이 곳에 4∼5개의 목로주점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가구만 남아 있다.

 

회야강이 이곳에서 '이어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곳에 있는 이어덤때문이다. '이어'라는 부사가 명사화 된 것인지, '이어(鯉魚)' 즉 잉어를 말함인지 모호하다. 부사로서의 '이어'에 대해서 슬픈 전설이 있고, 이무기에 대한 전설도 있는 이어수 아래로 내회마을 앞에서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는데, 이곳에서부터는 회야강을 돈강[錢江]이라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백 이십 년 전 상회마을 서당의 훈장이던 윤두석(尹斗錫)의 저서 {해은집(海隱集)}에 보면 내회 앞강의 이름을 돈강(錢江)으로 명시하였다. [전설조 참고]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회야강이 흐르는 삼평은 넓은 들을 가진 곡창지대로 유명하며 삼평마을 사람들의 주업이 논농사이고, 밭이 적은 것 또한 이 지역의 특징이라 하겠다.

 

상회마을

조선조 초기 외회야리(外回夜里)였던 곳으로, 삼평리의 위쪽 회야강(回夜江) 가에 위치하고 있어 상회(上回)라고 불리게 된 마을이다. 회야강의 강변마을로는 회야강의 회(回)자를 따서 호칭하는 마을이 여러 곳으로, 상회 역시 회야강의 첫머리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상회마을 위쪽에는 '못안각단'이라는 마을이 따로 있다. 지금은 양수기를 사용하거나, 수로를 따라 회야강물을 끌어들여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규모가 큰 못이 있다. '못안각단'은 이 '못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회마을

삼평평야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내회마을은 평산 신씨의 집성촌이다. 처음에는 종동리 구터 마을에 정착하다 생활터전이 너무 협소하여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마을 이름은 주위에 둘러있는 회월·월봉·술마산 등 여러 산봉우리와 산 아래로 돋보이는 기암들이 마을 주위에 있어 칠암팔봉(七岩八峰)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내회야리(內回夜里)가 줄어서 내회(內回)로 되었다. 회야강(回夜江)의 굽어진 안쪽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내회(內回)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주위 모두가 평야로 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주위에는 숲이 있는 작은 언덕이 2∼3곳이 있을 뿐이다. 언덕에는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여름철 더위를 식혀 주는 곳으로 마을 서당이 있었던 곳의 뒷편 언덕이라 하여 '서당등'이라 하는 곳과 마을 동편으로 '말랑등대'가 있다.

조선조 때 이곳 평산 신씨의 세도는 대단하여 서생진과 울산병영의 관군들을 동원하여 마을 저수지를 축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종동마을

이 마을은 신라 때에는 생서량군(生西良郡)에 속하여 서생치소의 관할이었다. 고려 현종 91년(1018)에는 울주에 속했으며, 조선 말인 1803년경에는 온북면(溫北面) 종동이었다가, 1914년 4월에 온산면 삼평리 종동(種洞)이 되었다.

종동(種洞)은 종산(鐘山) 밑에 있다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종산(鐘山) 남쪽끝자락에 구터마을이 있다. 10가구 미만의 작은 마을이지만 비교적 바다와 강에 가까워 종동마을 본동(本洞)보다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구터라고 했을 것이다.

종동에는 일제 말기인 1945년 5월 25일에 개교한 삼평초등학교가 있다.

 

종골·종곡마을

종동의 종산(鐘山) 북동쪽 즉 대평골[大平谷] 골짜기 뒤편 반대 방향의 '벌피기' 골짜기가 길게 뻗은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로서 44세대가 살고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산업연구단지가 들어설 계획이었으나, 정부 예산관계로 유보된 상태이다. 주민들은 고등소채와 축산을 많이 하고 있으며, 배 과수원이 많은 곳이다. 마을 중앙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아무리 가뭄이 심하여도 물이 마르지 않아 주변 논밭의 경작을 가능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자(種子)를 보존할 수 있는 골짜기 즉 '종자 골'이 줄어들어 종곡(種谷)이 되었다 한다.

 

이 마을 입구에는 만수정(萬壽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1996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육각정(六角亭)으로 노인들의 휴식처이다.

학남리

학남리에는 거남(巨南)·회학(回鶴)·회남 (回南)의 자연마을이 있다.
학남리는 숙종(肅宗) 46년(1720)에 거남리(巨南里)라 불리었던 마을로서 청량면(靑良面)에 속해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숙종 때 나타난 마을이나, 실상은 훨씬 오래 전인 신라시대에 이미 이곳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화랑도의 훈련장소라고 전하는 활터가 거남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남(巨南 혹은 狗足)이라는 지명은 신라 때부터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화랑도의 훈련장소 주변에 사람들이 살았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한 것이며, 그 당시의 막강한[巨] 세력을 지닌 호족들이 개발산 남(南)쪽 아래에 살았기[居] 때문에 거남(居南→巨南)이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도의 훈련장소가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청량이라는 지명은 화랑을 가리키는 청년(靑年) 선량(善良)의 합성어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회학이라는 지명은 구전에 의하면, 처용설화와 관련된 헌강왕(憲康王)이 이곳에 와서 붙였다고 한다.

조선조 중엽의 숙종 이후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때도 계속하여 거남(巨南)이란 단일 마을이었다가, 고종(高宗) 원년(1864)에 거남 회학 회남의 3개 마을로 갈라졌다. 이 상태로 고종 31년(1894)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1911년에 회학 거남 회남 진호(眞湖)로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 합하여 학남리(學南里)라 하였다. 학남(學南)이라는 지명은 회학의 '학'자를 따고, 거남과 회남의 '남'자를 따서 만들었다. 본시 청량면에 속했던 것을 1975년에 온산면에 편입시켰다.

거남마을

거남은 조선조 제8대 임금인 예종(睿宗) 때까지는 학남(學南)이라 했으나, 이후로는 현재의 청량면(靑良面) 상남리(上南里) 대천(大川) 못 아래까지를 거남리(巨南里)라고 하였다고 한다.

거남(巨南)이라 함은 큰[巨]산의 남쪽[南] 아래에 있는 마을 즉 거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우선 거남산은 큰 산[巨山]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남산의 명칭변천을 살펴보면, 구전되는 처용설화에는 개발산[狗足山] 혹은 봉우산(鳳羽山)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구족산(狗足山)으로 부르다가 조선조에는 대천산(大川山) 또는 봉산(封山)으로 불렀으며, 근대에 이르러야 '거남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의 경우 거남이라는 마을이름이 먼저 생긴 뒤에 산명(山名)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은 조선 초기 이전까지는 거여리(巨余里)라 불렸고, 그 뒤에 거남리로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을은, 둘레가 45리 정도 되는 거남산의 정상 주위로 분포되어 있다.

거남산은 황토로 무척 유명하다. 목도장에 오는 사람들의 신발을 보면 거남 사람임이 표가 난다고 할 정도로 짙은 황토가 많다. 지금처럼 도로가 사방으로 개통되고 교통 수단이 좋아지기 전에는 타 지역과 단절 된 산골이었고,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회학마을

거남의 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신라 헌강왕이 처용에서 놀다 저녁 무렵 이 마을을 지나는데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학들이 떼지어 빙빙 돌며 나는 것을 보고 회학(回鶴)이라 하였다고 한다. 1982년부터 시작된 회학공업단지 조성작업으로 일부 주민들은 이주되고, 산아래 위치한 5세대만 남아 공단에 편입되지 않은 농지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회남마을

거남산(巨南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현 산업도로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다. 학의 무리들이 회유(回遊)한 거남산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회남(回南)이라 하였다.
1982년 회남단지 입주로 모두 철거되고 없는 마을이다.

처용리

조선 정조 때 처용리라 하다가, 고종 원년(1864)에는 처용리와 신기리(新基里)로, 다시 고종 31년(1894)에는 처용동(處容洞)과 신지동(新只洞)으로 나뉘어졌던 마을이다. 본래는 청량면 지역이었으나, 1924년에 온산면으로 이속되었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에 처용·신기·학동(鶴洞)을 합하여 처용리(處容里)라 하였다.

처용(處容)이라 함은 처용설화에 등장하는 처용랑(處容郞)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동왕 5년(879)에 동부 주·군을 순행할 때, 개운포(開雲浦)의 처용암(處容巖)에서 처용(處容)이 출현하여 서울로 들어가서 왕정을 보좌하였다. 그 처용암이 처용리(處容里) 앞 바다에 있기 때문에 이 마을 이름을 처용리라 하였다.

처용리에 있는 처용암은 본래 온산면 처용리 1번지로 지금의 외황강(外隍江) 하구의 동해에 접하는 지점에 있어 온산에 속한 땅이었으나, 강변의 지세가 울산 세죽 쪽은 암벽이요, 처용 쪽은 지대가 낮은 평지이므로, 강물의 흐름이 자꾸 처용 쪽으로 기울어져 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처용암과의 거리가 울산 세죽보다 처용리 쪽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으므로 지금은 행정구역상 울산시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처용암이 울산에 속한다 하더라도 지금도 처용리를 위시한 학남리 등지에는 구전되는 처용관련 설화 등 직·간접적으로 처용과 관계된 지명이나 설화가 많은 반면 울산 쪽 세죽에서는 그 관련설화가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처용은 단순히 설화 속의 주인공일지라도 온산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처용마을

처용리(處容里)의 본 마을이다.
아직은 미철거지로 남아 있지만, 2010년대에는 철거되어 공해방지림 조성지역 내지는 공단지원 협력업체가 들어설 예정이다.

신기마을

처용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고종 원년(1864)에 신기(新基), 고종 31년(1894)에는 신지(新只)라 하였다가, 1911년부터 신기(新基)로 고쳐 불렀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이곳에는 온산 전역을 통치하던 벼슬아치가 있어, 죄 지은 자를 신기(神旗)대에 목을 매달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온산공단에 편입되어 없어진 곳이다.

학동마을

학동은 1911년에는 학동(學洞), 1914년에는 학동(學東)이라 하였다가 이후 학동(鶴洞)이라 하여 음은 같으나 그 한자는 변화가 있었다. 옛날 이곳에 학이 많이 도래하였다 하여 학동(鶴洞)이라 하였다하며,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이라고도 불렀다.
온산 공단편입 때 철거되고 쌍용정유 회사의 북쪽 공장 부지에 들어간 곳이다.

화산리

화산리는 조선 초기에 남면(南面)에 속하였다가 남면이 온북(溫北) 온남(溫南) 온산으로 구분 될 때 온산면 화산으로 되었다. 고종 24년(1887)에 산성마을이 온북면에 편입되었고, 다시 고종 31년(1894)에 산성(山城) 석당(石堂) 석계(石溪) 기산(岐山)의 네 개 동으로 갈라졌다가, 1911년에는 산성(山城) 석당(石堂) 기산(其山) 내동(內洞)으로 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산성이 다시 환원되어 산성과 기산 내동의 2개 자연마을을 합한 석당(石塘)을 묶어 화산리(華山里)라고 하여 온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온산공단 조성 시에 석당 기산 마을은 전체가 공단에 편입되고, 내동은 뒷산 일부만 남아 있으며, 산성은 마을의 절반이상이 이주되고 일부분만 남아 있다. 지금은 산성리 한 개 마을로서 화산마을이란 행정구역으로 남아있다.

산성마을

산성마을은 본래 남면에서 분류된 온산면에 속하였는데, 고종 24년(1887)에 온북면(溫北面)에 편입되었고, 1911년에는 산성동(山城洞)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온북에서 다시 온산으로 환원되었다. 마을 앞과 주변 일대에 성터가 있다. 이 성터를 두고 일설에는 7∼8세기경 신라시대 축조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성터 주변에서 발굴된 문화재 중 신라시대의 화장묘와 석실묘(石室墓)에서 인화문(印花文) 토기 등이 출토된 것으로 추정한 것이고, 사실상 이곳에 처음으로 성이 세워진 것은 훨씬 이전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의 성은 토성으로 성안은 평지가 아닌 계곡의 좌우로 둘러 쌓인 산 능선을 따라 소규모로 축조되어 있고, 곡성(曲城)이나 주거 건물의 초석 같은 흔적들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임시로 사용하였을 성이라고 볼 수 있다. 필요에 따라 토성을 쌓았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떠났다가 필요시에 다시 보수 복원한 흔적이 3∼4회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 이전에 이미 성터 구실을 하고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성터 안의 마을을 '성안'이라 하고 그 꼭대기를 '성말랑'이라 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 처음에는 김씨와 이씨가 몇 가구 살고 있었는데 모두 떠나가고, 그 뒤를 이어 인동 장씨(仁同張氏)들이 살고 있다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난 뒤부터 영월 엄씨(寧越嚴氏) 집성촌이 되었고, 이주 전까지 약 60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주민들 거의가 농업에 종사하였고 엄건영(嚴鍵永)이란 천석꾼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위치는 동쪽으로 대정리와, 남으로는 원산리 성곡과 삼평리, 서쪽은 덕신, 북쪽은 석당리와 경계한 산골 마을이다.

마을의 서남쪽에는 반장곡에서 동뫼를 거쳐 산성 아랫못[山城池下]을 지나 원산천(元山川, 하브라거랑)을 이루는 성곡거랑[城谷川]이 있고, 북쪽으로는 소골못[牛谷池]에서 발원하여 돌당 대정을 지나 이진 앞 바다로 흘러가는 대정천(大亭川:일명 '돌당거랑')이 있었다. 두 거랑[川]의 물은 농지관계시설용수로 이용하였고,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되었으며, 철부지 꼬마들의 물놀이 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로(寒露)나 상강(霜降)때가 되면 소쿠리를 들고 냇가의 풀숲을 발로 밟거나 위에서 다른 사람이 물살을 헤집으며 소쿠리 쪽으로 고기를 몰아 미꾸라지나 피라미 같은 민물고기를 잡기도 하였으며, 밤이면 참게(민물게)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횃불을 밝혀 불야성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잡히는 참게는 한 마리만으로 된장찌개를 끓여도 7∼8인분이 충분했으며 그 맛 또한 기막히게 좋았다. 약재로도 그 효험이 탁월하여 관절이 상하거나 뼈가 부러진 곳에 치자나 대황과 함께 찧어 상처 부위에 발라두면 통증도 사라지고 빨리 접골되는 명약으로 시골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서쪽에는 온산에서 제일 높은 고개인 산성제(山城堤)가 있다. 이 고개는 이진·대안·성곡마을 사람들이 남창 장에 다니거나, 대운산에 땔감나무를 구하러 넘어다니던 사연이 많은 곳이다. 이 고개의 마루턱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모아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를 만큼 거대한 돌무더기가 있다. 이 돌무더기로 인하여 이 고개를 '산성당고개' 혹은 그냥 '땅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서낭당의 당고개로 보기 어려운 것이 이곳에는 사당이나 제당의 흔적도 없으며, 당사나무도 없다. 고개가 시작되는 마을 어귀에 300∼400년 된 당사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성황당(城隍堂)의 당(堂)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곳의 돌무더기는 심석(心石)의 무더기가 아닌 투석(投石)이나 인석(引石)의 용도로 모아진 돌무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당고개의 돌무더기는 성터에 있는 것이므로 투석무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고갯길을 넓힐 때 이 돌무더기는 거의 없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편을 이용하여 포장된 다른 길을 이용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내왕했던 이 고갯길이 지금은 잡초가 우거진 체로 방치되어 있다.
산성마을은 허리가 동강 난채 아래쪽은 공단에 편입되어 LG 화학공장과 대림금속 등의 여러 회사가 입주하였고, 위쪽으로 37여 가구가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돌당마을

고종(高宗) 31년(1894)에는 석당(石堂), 1911년에 석당(石唐), 1914년 이후에는 석당(石塘)이라고 하였다.
당(堂)은 '당목(唐木)과 같이 성황당(城隍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돌을 쌓아 둔 서낭당이 있어서 석당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설에는 200여 년 전에 이곳 박씨들의 선조인 가선대부 박태중(嘉善大夫 朴泰重)으로부터 전해온 이야기가 있다. 돌당 뒷산(지금의 전망대)에서 가끔 말이 우는소리가 들려와서 한 사람이 산에 올라가 보니 말을 탄 거대한 장사 한 사람이 큰 바위[장수바위] 가운데 연못물을 모두 마시고 떠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박태중은 고을 원님에게 상신하여 돌 석(石)자와 못 당(塘)자를 쓰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곳의 방석처럼 넓게 생긴 바위에서는 해마다 삼짇날에 마을 사람들이 화전놀이를 하였으므로 이 바위를 화전바위라고도 하고, 지금도 연못터가 바위 위에 남아 있다. 이외에도 지금의 전망대에 남아 있는 큰 바위를 보고 돌당[石塘]이라 이름하였다는 설도 있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족보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1592년경) 밀양 박씨 돌당 입향조(入鄕祖)인 통덕랑 박수병(朴秀秉)이 충북 영동에서 피난(避難)하여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헌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주민이다. 그 뒤로 경주 최씨, 전주 이씨, 광주 노씨 순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 박씨 문중의 박기흠(朴基欽)은 온산의 초대 풍헌(風憲) 벼슬을 지냈고, 윤승봉(尹承鳳)은 화산리 초대 이장을 지냈다.

내동마을

이 마을 또한 석당(石塘)과 함께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분군으로 미루어 신라시대 초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이 정착한 곳이다.
고종24년(1887) 온북에 속했던 곳으로, 당시에는 석계(石溪)라 불렀고 1911년에 내동(內洞)이라 하였다. 석계(石溪)라는 이름은 돌당 쪽에서 볼 때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내[川]를 건너서 있는 마을이란 뜻이고, 내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돌당에서 안쪽 깊숙이 위치하고 있는 안[內]동네라는 뜻으로 불리게 된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온산면에 속하여 내동 기산 석당의 3개 마을을 합하여 1개 행정리로 하여 산성마을과 함께 화산리라고 하였다.
이 마을 역시 온산국가공단 지역에 편입되어 공단업무의 원활화를 기하기 위한 지원공단인 내동준공업단지에 들게 되어 대덕산 일부만 남겨 두고 모두가 철거되었는데, 현재 산 중턱에 위치한 박왈동의 주택만 남아있다.

기산마을

고종 31년(1894)에는 기산(岐山)이라 하였다가, 1911년 이후에는 기산(基山)이라 했다.
사통팔달의 길이 나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기산(岐山)이라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일제시대에 이 마을에 높은 깃발을 세워두고 측량의 기점으로 잡았다고 하여 기산(基山)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임씨(任氏)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았다고 하고, 얼마 전까지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으로 석당과 내동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었는데 역시 공단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