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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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소개

전설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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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전설

처용의 출생지는 지금의 외항강 하구의 처용암이다. 이 바위섬에서 처용을 비롯한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이 출현하였다고 한다. 처용암은 지번이 처용리 1번지로 온산면 관할이었던 것이 1997년 10월 9일 부로 울산광역시 관할에 속하게 되고 울산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울산광역시 남구청 관할지인 황성동 668번지의 1호 소재로 되어 울산광역시에서 해마다 처용문화제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또 울산의 상징물로 처용탈과 문화를 상품화 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처용의 실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이가 별로 없는 실정이다.

설화 속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처용의 출생지는 온산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처용을 온산지역민들은 어떤 인물로 인식하여 왔는지 온산에서 전해오는 구전들을 모아 보았다.

1. 처용 마을의 전설

처용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이 끝나고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의 해변 가까운 수중에 넓쩍 바위라고 부르는 사방 3∼5m 정도 되는 멧방석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사람의 엉덩이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데, 신라가 망국의 길로 접어들 무렵에 처용이 매일 나타났다고 한다. 용왕의 아들로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여 놓게된 이후 다시는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된 처용이 이곳에 앉아 하염없이 먼바다를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바위 위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기울어 가는 국운을 혼자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며 또 용궁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어디론가 떠나가고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2. 당목 마을의 전설

당목 마을은 산암리의 자연부락으로 온산국가공단이 조성되자 제일 먼저 철거되어 1978년 이후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현재 S-oil 공장 연구소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이곳은 바닷가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산이 있어 춘도·온산의 초.·중학교 소풍지로도 유명하다.

육지에서 산을 넘어 동쪽으로 탁 트인 넓은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바닷가에는 굵은 자갈들이 깔려있는 가운데 넓은 바위가 바다 속으로 비스듬히 기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야유회 놀이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여 주는 곳이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몇 개 있는데 이 발자국은 처용 장군의 것이라고 한다.

왜 이 마을 사람들이 처용을 힘세고 날랜 장수로 보았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처용이 이곳 바닷가에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큰 바위들을 들고 와서 이처럼 넓은 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경치 좋은 이곳에 이와 같은 터를 만들어 두고 춤추며 놀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무거운 바위를 옮기는 동안에 그의 발자국이 여기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3. 달포와 솔개마을의 전설

산암리 달포마을에서 달포 뒷산 너머 솔개마을을 가다보면 바닷가 산기슭에 높이 40∼50m정도의 정상부근에 바다를 향하고 있는 병풍 같은 모양과 그 아래로 7∼8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었다.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신선바위라고 불렀는데, 아주 옛날에 이곳에서 신선들이 모여 놀다가 200m정도 거리의 수중바위섬인 거무도(신성한 섬이란 뜻)에 날아가서 놀기도 하였는데, 그 신선들 가운데에는 처용도 있었다고 한다.

4. 대덕산 마을의 전설

화산리 내동마을 뒷산인 이 곳에는 신라시대에 아주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산 아래로는 역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지금은 산을 절개하여 S-oil공장과 비축단지, 지원단지 등이 들어서 있어 볼품 없는 모습이지만 산의 정상에 넓은 초지(草地)가 펼쳐져 있어 소풍이나 화전놀이터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던 곳이다. 이곳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바닷가 돌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넓은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사람의 손가락까지 선명한 손자국이 있었다.

이곳 주변 마을 사람들은 처용이 신선들과 함께 거무도와 신선암 등지에서 놀다 달 밝은 밤이면 이곳 대덕산 정상으로 날아와 달빛에 출렁이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손자국은 처용이 바위 위로 날아와 내릴 때 손을 짚은 자국이라고 한다.

5. 그외의 구전들

위에서 기술한 내용 이외에도 거남, 용암 등 온산 북쪽마을 여러 곳에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다른 마을에서는 처용에 대하여 장군이라 하여 하늘을 날고 몸이 날래고 힘이 무척 세어서 수십평이 되는 바위를 들어 옮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달포의 경우에는 신선으로, 처용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선비로 표현하는 내용이 구전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어덤1

옛날 이곳 강가 마을에 이씨(李氏) 성을 가진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청상에 혼자가 된 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모시면서 그렇저렇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홀어머니 또한 착한 아들자식 하나가 남의 집 열 아들이 부럽지 않아서 대견하고 사랑스러워하며 자식을 남편처럼 의지하고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할 때도 같이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을 대하는 이상으로 목욕시키고 따뜻한 밥상을 만들어 겸상을 하며 장성한 아들이지만 한방에서 같이 베개를 맞대고 잠자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세월은 흘러 자식의 혼기가 늦어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매파를 놓아 아들의 장가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의식주 걱정 없을 정도의 집안에다 효성 지극하고 심성 착한 청년의 소문은 이웃 마을에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고 보니 여러 곳에서 혼사말이 오고가고 홀어머니는 고르고 골라서 예쁜 처자를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처음 며느리가 집에 들어 곱게 차려입고 아들과 함께 절을 올릴 때는 그렇게 흐뭇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지만 문제는 혼자서 지새야하는 밤이 점차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안일 모두를 며느리가 도맡아 하니 일이 없어서 잠이 잘 오지 않나 하고 날이 밝으면 들판에서 억척스레 일도 하여 보았지만 또 다시 밤이 되면 잠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여서 베개를 부둥켜안고 잠을 청하여 보기도 하고 죽은 영감이 사용하던 곰방대에 불을 당겨보기도 하였지만 이 세상 모두를 빼앗기고 혼자가 된 것 같은 허전함은 떨칠 수가 없어 일어났다 누웠다 하기를 거듭하다 날을 밝히기도 일수였다.

그런 날이 여러 번 거듭하자 끝내 홀어머니는 원망의 화살을 며느리에게 돌리게 되고 한번 미워하기 시작하자 며늘아기가 악마 같고 야차 같이 보기 싫게되고 불붙기 시작한 시기심은 그칠 줄을 모르고 타올랐다.

신혼의 아들 방에서 밤중에 사랑의 속삭임이 들리면 시어머니는 곰방대로 재떨이를 부셔져라 뚜드리며 자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곤 하여 신방의 사랑을 식혀 잠재우고는 하였다.

어머님의 시샘을 눈치챈 아들과 며느리가 더욱 정성을 다하여 위하고 모셨지만 어머니에게는 며느리의 고분고분하고 웃는 모습이 여우같았고 말소리조차 '매구(묘귀)'가 야심한 밤에 무덤 속 곽의 뚜껑 여는 소리처럼 싫어하며 이제는 표시 나게 며느리를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밤이 짧은 여름, 보리밥을 먹어야하는 철이고 당시에는 정미소가 없는 때이고 보니 거의 모두가 디딜 방앗간이나 집에서 절구통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어야 하는 것을 이용하여 구박은 시작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아들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쉴 시간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짧은 여름밤 내내 절구질을 하여 이튿날 먹을 보리쌀을 준비하게 하고 장정이 하기에도 힘이 드는 보리 껍질 벗기는 일을 몇 시간씩하고 탈진하여 방에 들어가 쉬려고 하면 '날이 다 밝았는데 보리쌀을 삶지 않느냐'고 호통을 쳐서 잠시도 방에 들어가서 허리조차 펼 수 있는 틈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다가 어머니 몰래 신랑이 거들어주어 조금 일찍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서 부부가 함께 있고자 하면 방이 덥다, 혹은 춥다고 하면서 시어머니는 베개를 들고 와서 같은 방에 들어 누워 잠을 자니 참으로 피를 말리는 시집살이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음 여린 아들은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고부간 갈등에 점차 의기소침해 지더니 삼 년이 채 못되어 덜컥 자리에 눕게 되고 이런 이유에서인지 운명이 다해서인지 그만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되고 말았다. 그러자 자식을 잃어버린 시어머니는 눈이 뒤집혀지고 미쳐 날뛰기 시작하며 청상에 홀로 된 며느리의 고통스런 가슴에 말뚝을 박기 시작하였다. "저 년이 저 드런(더러운) 년이 내 자식 잡아먹고 대(代)마저 끊어 놓았구나, 이년아! 이 서방 잡아먹은 년아 내 자식 살려내라."하며, 하루 중 잠시도 쉬지 않고 욕하며 두들겨 패며 학대를 하니 며느리는 넋이 빠진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

생각다 못해 며느리는 어느 날 매를 들고 따라오는 시어머니를 뒤로하고 한달음에 강가에 달려나와 뒤돌아보지 않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물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이년 내 자식 잡아먹고 어디로 도망간다 말이냐."하며 '이어서' 뛰어들어 같이 죽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이곳을 며느리에 '이어' 시어머니가 따라서 뛰어들어 죽었다고 하여 '이어덤'이라고 하고 이 강을 '이어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어덤2

이곳은 옛사람들의 능력으로는 그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명주실타래 두 개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할 정도 깊었다 하는데 명주실 한 타래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주 가늘게 뽑은 타래의 크기가 요즈음 송구(핸드볼) 경기에 사용되는 공의 크기 정도였으니 지레 짐작할 수는 있으리라 본다.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전되는 것에는 이렇게 깊은 강에는 항상 이무기(용이 못된 천년 묵은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도 이어(鯉魚:여기서는 이무기를 말하는 것 같음)가 살고 있었고, 이무기 중에는 가끔 성질이 난폭하여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어 이무기를 사냥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곳에 이무기 사냥꾼이 와서 이무기 사냥을 하고자 채비를 하는데 길을 가던 한 스님이 이를 보고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무기 사냥꾼은 내가 조상 몇 대째 이 일을 하여온 사람으로 천하에 내가 잡지 못하는 이무기는 없었다고 하며 "스님! 내가 이무기를 잡아올 테니 이무기의 천도나 빌어 주시오."하며 물에 들어갔다. 이때 구경하던 몇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전한 말로는 사냥꾼이 물밑으로 가지고 들어간 것은 소고기 한 덩이와 끝이 우산살처럼 접어진 창 같은 막대기를 들고 들어갔다고 한다.

소고기는 물 속 바위 동굴에 들어 있는 이무기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이고, 창 같은 막대기는 고래를 잡을 때 쓰는 작살 같은 유형의 무기로 이무기가 입을 벌리고 공격할 때 입 속에 집어넣어 우산처럼 펴지게 만든 것이었다.

한편 사냥꾼이 물 속으로 들어간 뒤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며 "모든 것은 시운이 있는 것이니 이무기의 운은 끝난 것이 아니거늘…"하면서 어디론가 떠나가고 한참 후 잠잠하던 물 위로 검푸른 똥 한 무더기가 둥실 떠오르더니 물 속은 조용하고 이무기 사냥꾼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이곳에는 힘 쌘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하여 이어덤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동백섬

아주 오랜 옛날 이 마을에는 어질고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이 청년은 마음이 착할 뿐만 아니라 힘 또한 장사여서 이곳 어장에서 일꾼으로 생활하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심성 또한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여러 명이 고깃배를 타고 앞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가 그물을 끌어 올려보니 인어 아가씨가 그물에 걸려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청년은 인어를 놓아주고자 하였더니 같이 일하던 어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하며 이렇게 큰 횡재를 하였는데 다시 놓아준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들 하였다. 끝내는 시비가 붙게 되고 난투극이 벌어져 힘센 청년의 주먹에 어부들 모두가 갑판에 나가떨어지자 청년은 재빨리 인어를 안아다 바다에 놓아주었다. 인어는 한참을 헤엄쳐 가다 뒤돌아보며 난투극으로 피투성이가 된 청년의 모습을 감사의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다 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빈배를 몰고 마을로 돌아오자 이 소문은 곧 전체 마을에 퍼지게 되었고, 어장 주인과 동네 사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어부들이 청년을 죽여버릴 작정을 하고 매질을 하였다. 힘센 어부들의 혹독한 매질에 청년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며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청년의 주위로 벼락이 치기 시작하였다. 미신을 많이 믿는 어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혼비백산하여 모두가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 한참 뒤 기절했던 청년이 정신이 들었을 때, 망망대해에 혼자 둥실 떠 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 누웠던 자리를 살펴보니 방석 같이 커다란 거북이의 등에 타고 있었다. 손가락하나 꼼짝할 수 없이 무기력해진 청년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두고 누워 있었다. 그런 그를 거북이는 용궁으로 인도하였다. 용궁에 들어가게 된 청년은 용왕의 옆에 앉아 있는 인어 아가씨를 보고 놀라고 반가워하게 되었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며칠 동안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으로 호식하고 영약과 극진한 인어공주의 간병으로 청년은 완쾌되고 인어공주와 혼례를 치른 청년은 꿈결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용왕이 이들 부부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속세의 인간으로 용궁에서는 오래 살수가 없는 몸이니 때가 되어 과인이 부를 때까지 뭍에 나가 살다 오라." 고 말하였다. 인어공주가 용왕에게, "저희들이 살아갈 땅이 없습니다."고 하니, 용왕은 "그런 걱정은 하지말고 나가도록 하라!" 하며, 거북에게 명하여 이들 부부를 해변으로 인도하도록 하였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 왔다.

이렇게 하여 생긴 섬이 지금의 동백섬이었다고 한다.

연자도

옛날 이곳 연자도에는 참깨를 만석이나 하는 만석꾼으로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섬 안에다 지어두고 부러운 것 없이 잘 살았으나, 육지에 한번씩 나들이를 하려면 뱃길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꾼들을 불러 원산리와 당월사이의 육지를 향해 섬의 동쪽에 있는 바위들을 옮겨 다리를 놓기 시작하였다. 이 다리가 반 이상 완성되어 갈 때 정체불명의 도적들이 나타나 만석꾼의 재물을 모두 약탈하여 여러 척의 배에다 나누어 싣고 사라져 버렸다. 이에 연자도의 부자는 섬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지금도 이 섬에는 기와 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여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다리를 놓았던 수중에는 섬에서 한참을 걸어가도 물이 허리 이상이 되지 않는 길이 있다. 또한 파도가 칠 때 보면 이 길을 향해 좌우에서 몰려드는 신기함을 볼 수가 있다.

조암도

옛날 달포라는 마을이 형성되어 인간들이 정착하기 전이었다고 한다. 이웃마을에 효성이 지극하고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았는데, 이 청년은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낚시로 고기를 잡아 부모를 정성스럽게 봉양하면서 살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날도 청년은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서면서 제발 많은 고기가 잡혀 부모님께 더 잘해 드리게 하여 달라고 기원하며 이곳에 이르러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러나 염원하는 마음과는 달리, 이날 따라 노래미 새끼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해는 저물어 가는데 빈손으로 돌아갔을 때 이튿날 부모님의 끼니는 어찌하나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 같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래도 더 늦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낚싯대를 걷으려 하니 낚시가 바위에 걸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낚싯줄을 끊지 않고 낚시를 끌어올리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애를 써도 낚시는 뽑히지 않고 시간은 자꾸만 지체되어 다급해진 청년은 낚싯줄을 잃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힘껏 낚싯대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낚시 끝에 무언가가 매달려 나오는 게 있어 바위 위에 올려놓고 보니 인어가 아닌가. 청년은 황당한 일을 갑자기 당하고 보니 당혹하여 할말을 잃고 황혼 빛에 번쩍거리는 인어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인어는 예쁜 젖가슴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절색의 미모를 다소곳이 숙이고 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 청년은 정신을 차리고 인어에게 말을 건넸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요. 그리고 아가씨는 사람이요, 고기요?" 인어가 말하였다.

"저는 본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용궁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닷가로 놀려 나왔다가 이곳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다 돌아갔기를 날마다 하였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당신에게 정이 들었답니다. 오늘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이 떠나려고 하자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낚시를 건드리다 당신이 힘껏 쳐 올리는 바람에 그만 낚시에 걸려 끌려나오게 되었답니다."

둘의 이야기가 한창일 때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새섬에도 밤이 찾아들었다. 그러자 이때 인어의 몸에 변화가 찾아들었다. 밤이 되자 커다란 잉어의 꼬리 같던 인어의 아래 몸통이 사라지고, 사람의 두 다리가 생겨나서 팔등신의 눈부신 미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깜짝 놀라 급히 자신의 옷을 벗어 아가씨의 알몸을 덮어 주니, 인어 아가씨는 고맙다고 생긋 웃으며 인어도 밤이면 사람처럼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집으로 같이 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같이 살면 좋지 않겠냐고 은근히 말하면서 밤바람이 몸에 차가울까봐 인어 아가씨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러나 인어 아가씨는, "아직 때가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하며 내일 이 시각 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이 밝기만 기다리다 새벽 일찍 새섬으로 나가 인어 아가씨를 기다리며 낚시를 바다에 담갔는데, 인어의 조화인지 커다란 고기들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낚시에 걸려오기 시작하니 금새 바구니에 가득하였다.

청년은 낚기를 거두고 언제 올지 모르는 인어 아가씨를 기다리다 슬그머니 바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주위가 썰렁하여 잠에서 깨어나니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주위가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인어의 흔적을 찾았으나,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바다 위로는 물결만 잔잔히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은 낙심하여 돌아서 가려는데 새섬의 풀밭에서 인어 아가씨가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너무도 반가워 달려가서 아가씨를 껴안고 풀밭을 뒹굴며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였다. 이후 청년과 인어 아가씨는 날마다 밤이면 새섬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니, 이들의 사랑은 새섬이 불타고 바다가 일렁일 정도로 깊고도 열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어 아가씨는 아주 슬픈 얼굴을 하고 총각에게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얼마간 헤어져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총각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어서 목석처럼 멍하게 있으니, 인어 아가씨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으니, 낭군께서는 너무 상심 마시고 일년만 기다려 주셔요." 하며 울먹이는 눈빛을 던지고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총각은 엉겁결에 인어 아가씨를 떠나 보내고 상심되는 마음이야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일년의 약속을 기다리며 매일 새섬 근처에서 낚시를 하며 살았는데, 인어 아가씨를 만난 이후로는 어찌나 고기가 잘 잡히는지 낚시만 물에 넣으면 바로바로 고기가 낚여 올라오니, 그 많은 고기를 내다 팔아 얼마간의 돈도 장만하고 섬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 바닷가에 집도 한 채 마련하여 인어 아가씨를 기다리며 또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일년이 되는 날 총각은 아침 일찍 바닷가에 나가 낚시질을 할 생각도 않고 인어 아가씨를 기다리는데,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과 같이 마음은 초조하고 시간의 더딤에 안절부절 하던 중 바닷물이 갈라지며 인어 아가씨가 한 아기를 안고 뭍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반가움에 얼싸 안으려 하다 낯선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멈칫하는 것을 보고 아가씨는 "낭군님 당신의 아들이옵니다"한다. 이때 청년의 기쁨은 어떠하였는지는 짐작에 맡기기로 하고, 그 후 청년은 아내가 된 인어 아가씨와 아기를 대리고 산기슭에 마련 해둔 새 집에다 부모님까지 모셔와서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제일 먼저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된 사람들이고, 그 후 차츰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이 마을을 달포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암도(鳥岩島)를 '새섬'이라고 하는 것은 새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억새가 많아서 '(억)새섬'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새[鳥]'는 샛바람[동풍(東風)] 할 때의 '새[東]'가 바뀐 것으로, '새섬'은 '마을의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풀이함이 타당하다 하겠다.

덤돌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산성마을에 접한 골짜기로 반장골 옆에 위치하여 있고 지번은 삼평리 임야 6번지 일대이다. 영월 엄씨 울산 입향조 엄립(嚴立)의 계자[季子:세째아들]인 사인(士仁)은 성곡 입향조(入鄕祖)로 사후에 덤둘에 산소를 쓰게 되었는데, 이때 하관을 하기 위하여 지관을 불렀다. 지관은 산세를 두루 살펴본 다음 한 지역을 막대로 표시를 하면서 꼭 이 자리에 구덩이를 파야 한다고 지시한 다음 상주, 백관들과 함께 평소 좋아하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편 구덩이를 파고 있던 일꾼들은 처음에는 지관의 지시대로 땅을 파다가 깊이 내려가니 삽 자루를 움직이는 것이 어려워서 지관의 말을 무시하고 구덩이를 넓히기 위해 옆면을 삽질하며 땅을 넓게 파기 시작하였다. 흙을 두어 번 삽질하여 벽면을 더 파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생기면서 커다란 두루미 한 마리가 날아 나오더니 부산 동래 방면으로 날아가고 곧 이어서 또 한 마리의 두루미가 날아 나오더니 웅촌면에 있는 회야강 상류인 지금의 석천리[石川里, 돌내]로 날아가서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때 술을 마시고 있던 지관이 황급히 뛰어와서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탄식하는 말이 "이곳은 자손 대대로 3대에 한번씩 3정승 6판서가 날 명당자리인데 일군들이 구덩이를 넓히는 바람에 그의 자손들은 3대에 한번씩 신체가 온전치 못하게 되었고 이곳의 정기의 절반은 동래 정씨가, 나머지 반은 돌내 이씨에게로 가게 되었다. 만약에 후일 이 산을 통해 강물이 흐르게 되면 그 때는 후손들이 발복(發福)하게 되리라."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덤둘'이라고 하였는데 '덤'은 숫자 2를 말하고 '둘'은 두루미를 말함이라고 하여 두루미 2마리가 날아오른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의 정기를 지닌 학이 날아간 곳의 동래 정씨와 돌내 이씨는 그 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후 이곳의 영월 엄씨 자손 중 종가에서는 3대에 걸쳐 꼭 한 명씩 손가락이 6개인 육손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아마도 6판서중 한 자리에 올라야 할 사람이 지관의 말처럼 신체 이상이 생긴 것이라고 말들을 하고 있다.

현재는 덤둘 옆으로 인위적이기는 하나 물이 항상 흐르는 관이 통과하고 있는데 덕신지역의 오폐수가 당월 하수종말처리장으로 향하는 관이다. 이로 인하여 3대에 한번 생긴다는 육손이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성곡 엄씨들은 말하고 있다.

절두골

마을 뒤편으로 옛날에는 아주 큰절이 있었다고 하고 지금도 초석과 기와 등이 이곳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언제 절이 생겼다가 어느 때 사라진 것인지 고증할 자료가 없어 구전(口傳)되는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이 절에는 기거하는 승려들이 수백 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한창 번창할 때 빈대가 끓어 승려들이 수도를 할 수 없고 잠도 자지 못할 지경이 되자 모두들 떠나갔다고 한다. 승려들이 선방에서 수행을 하기 위해 모여 앉으면 구석구석에 빈대가 밤낮 없이 피 냄새를 맡고 기어 나와 승려들의 살 속을 파고드니 견딜 수가 없어 승방의 사방구석에 산초(재피)며 오갈피 같은 약재를 뿌려 두기도 하고 물그릇들로 사방을 에워 쌓아 방안에 섬을 만들고 가운에로 몰려 앉아 공부를 하려고 하니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장에 새카맣게 올라가서 밑으로 떨어져 내려 승려들을 공략하니 수행을 많이 한 고승들도 견디지 못하고 끝내는 절을 떠나 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적들이 나타나 약탈을 일삼으니 결국 절은 망하고 폐허가 되었다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물샘

울벌마을 앞 당사나무 가까이에 있는 노천 샘이다.
이 지방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뱃머리[船頭] 즉 배의 앞쪽을 이물이라고 하는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마을 앞에 있는 샘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샘에 대해 전해오는 전설로 조선 선조 때에 이 마을에 아주 힘이 세고 몸놀림이 민첩한 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살건네 주위에서 의병들과 함께 많은 왜적을 무찌르기도 한 무예가 출중한 무명의 장수로 그냥 '김 장군'이라 불렸다.

어느 날, 김 장군이 마을앞 들에서 논을 매고 있는데, 아래에서 왜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말 위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마을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를 본 김 장군이 논갈이하던 쟁기를 뽑아들고 달려가서 단번에 쟁기의 날로 왜장의 목을 날려 버렸다. 왜장의 목이 너무도 쉽게 장군의 쟁기에 떨어지자 졸개 왜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것을 뒤좇아가서 여러 명의 목을 베었다. 김 장군은 왜장과 졸병들의 목을 들고 울산 병영성에 가서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성주(城主)에게 상신하여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수문장은 김 장군에게 돌아가서 기다리게 하고, 왜병들의 목을 들고 상관에게 가서 자기의 전공이양 보고하고 상을 받고 특진을 하였다. 그래서 김 장군은 사기(史記)의 그 어느 곳에서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김 장군이 왜장의 목을 베어 핏자국이 있던 곳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이 샘물이 되었는데, 이 샘물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얼음처럼 차가워서 땀흘리며 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쉴 참에는 찾아와 목을 추겼으며, 땀띠를 없애기도 하던 곳으로 수 백년 동안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 장군의 묘소가 울벌 동산 어딘가에 있다고 하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이 마을 사람들은 김 장군의 제사를 모셔왔다. 김 장군의 구국충정과 애향심을 흠모하고 공경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용방소

용방(龍房)소에는 지금까지도 촌로들에 의해 구전되고 있는 전설이 있다.
옛날도 아주 먼 옛날, 이곳 신밤의 어떤 농가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앞산 곰뫼와 곰내가 크게 울었는데, 태어난 아기에게는 이빨이 모두 나 있었고,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있었으며, 태어 나자마나 방안을 기어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은 곧 온 마을에 퍼지고 이웃 마을들도 모두 알게 되자, 이를 시기하고 두려워한 고을 관청에서 이 아이는 장성하면 역적이 되어 나라를 뒤집을 위인이 되고, 부모 형제와 마을에도 크게 해를 끼칠 것이니 죽여야 된다고 명령하였다. 밤이 되자 아기의 부모는 크게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기의 목을 조르려 하였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는 일이어서 부부는 서로 눈치를 보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방 윗목에 있던 커다란 다듬이 돌을 들어다 아기를 짓눌러 놓고 이불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차마 그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 누워 버렸다.

이튿날 다듬이 돌에 깔려 죽었을 아이의 시체를 치울 생각으로 부부가 이불을 들치니 아기는 몸 위에 올려진 돌을 치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곧 돌을 들어낼 것처럼 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 무거운 돌이 들썩들썩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으면 관(官)에서 확인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포졸들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아기는 물론 온 집안이 무사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리고 보니, 다급해진 부모는 우선 눈가림이라도 할 요량으로 아기를 부엌에 넣고 문을 닫아놓았다. 조금 있으니 관에서 확인하는 사람 여러 명이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이때 부엌문이 삐꺽거리면서 문틈 사이로 아기의 머리가 나오고 아기는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자 이를 본 포졸들이 달려가서 문을 힘껏 닫으니 아기는 목이 문틈에 끼어 버둥거리다 끝내는 죽고 말았다. 아기가 죽자마자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며 천둥 번개가 치더니 백설(白雪) 같은 용마(龍馬) 한 마리가 슬피 울면서 날아 내려와 아기의 시체를 물고 가서 곰내의 깊은 물 속에 빠져 죽으니 이곳이 곧 용방소이고 그 후 아기의 시체를 물고 간 용마는 이곳에서 용이 되어 가끔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용방소의 깊이는 명주실 몇 꾸러미로는 그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이고, 용방소 뒷산의 암벽 속으로 깊은 동굴이 있어 이 수중 동굴은 서생 앞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다고들 하고 또 이곳 깊은 곳에 사는 잉어들은 어른 덩치처럼 큰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용방소 주변의 넓은 사장(沙場)과 초지(草地) 그리고 기암(奇岩)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산기슭 등은 유원지로 개발 가능성이 무한한 곳으로 주민들의 숙원사업중 하나인 곳이기도 하다.

의논암, 마주돌

우봉 마을은 전체 모양이 소쿠리처럼 생겨 바닷가를 향하고 있는 마을 앞에는 방파제로 되어 파도를 막아주고 어로작업에서 귀향한 배들이 옹기종기 정박해 있다.
소쿠리의 오른쪽 손잡이 부분이 되는 위치〈강양7번지〉에 편편한 바위가 바닥 속으로 기우려져 있는 곳에서 육지 가까이로 주위에서는 볼 수 없는 화성암과 비슷한 별난석질(石質)의 바위가 두꺼비 모양을 하고 좌우에서 마주보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두껍바위라고 부르는 마주 돌에 대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제주도에 한 쌍의 두꺼비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좁은 섬 생활에 실증을 느낀 두꺼비 부부는 사람들이 말하는 육지에 가보기로 하였다. 수컷이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가를 묻자 암컷이 말하기를 "중국내륙에서 멸구도 바람을 타고 오는데 우린들 왜 못 가겠냐"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심하게 육지 쪽으로 부는 날에 두꺼비 부부는 몸을 솟구쳐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 이곳 양지바르고 아늑한 우봉 포구에 내려앉게 되었다. 막상 육지가 그리워 머나먼 바다를 건너왔으나 산설고 물설은 타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막막하여 두꺼비 부부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의논을 하다 그대로 돌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주돌'이 스스로 흔들릴 때는 이 마을 처녀 총각 중 누군가가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 바위의 아래에는 두꺼비의 알이 6개가 있어 지금도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이 바위를 타지역으로 옮기려 하니 너무도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이송도중에 손상이 우려되므로 본래의 자리에 그냥 두기로 하였다.

흥성구만

옛날 온산면 학남리 회학(回鶴)마을에 김씨(金氏)가 한 분 살고 있었다. 나이 많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되면 걱정이 되는 것은 좋은 명당자리를 구해서 돌아가시는 부모의 유택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김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서 상주의 몸이 되었는데 웬일인지 집 앞을 과객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때 과객 성지(性智)는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서 상가에 발길을 그만 들여놓고 말았다. 마침 상주들은 모여 앉아 유택을 마련하는데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었으나 좀처럼 좋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모두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된 성지(性智)는 입을 열어 "상제 님들 좀 보시오 혹시 이 과객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소마는?"하였다.

 

이 말을 들은 상제들은 과객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이었다. 그 중의 한 상제가 과객 앞으로 다가서며 애원하듯 [제발 그리 좋은 데는 아닐지라도 편안하게 모실만한 자리라도 하나 골라 주신다면 그 은혜를 어찌 잊어버리겠습니까?]하였다. 이렇게 하여 상제들은 과객을 자가 소유 산으로 안내하게 되니 이곳은 대현면(大峴面)의 구미동(九尾洞:지금의 울산 화성동 공단과 매암동])이었다. 산세를 이리저리 다 돌아보던 과객은 상제에 묻되 [상제께서는 소원함이 무엇이오? 자손이 번성함을 원하오 그렇지 않으면 재산의 흥성 하는 것을 바라는가요?]라 하였다.

 

이러한 물음에 상제들은 사실 자손들은 다 넉넉한 편이었으므로 입을 모아[염치없는 말이 되겠습니다마는 재산이라도 좀 늘어나게 하여 주신다면 좋겠소마는?]하였다. 그런데 이 산세는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북쪽으로부터 내려와서 바다 건너 개구리를 잡으려는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 매호동(梅湖洞:지금의 매암동)쪽에는 개구리섬(納島 - 지금은 동양 나이론 공업단지로 설립)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한곳에 묘터를 골라주면서 성지(性智)는 [이곳에 묘를 들이게 된다면 3일만에 천석(千石)은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명심하시오]하고 발길을 돌려 어디론지 가버렸다. 김씨는 만족스럽게 자기 아버지의 묘를 과객이 골라준 자리에 들이게 되었으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문제는 3년도 아닌 3일만에 천석(千石)부자가 된다니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도깨비의 장난에 홀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은 의아심을 품는 동안 삼우제 날이 되어 산소에 가서 모역을 돌아보며 살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쪽을 보니 장승개(長生浦:지금의 長生浦) 앞 바다에 일단의 큰 고기떼가 곤두박질을 하며 빙빙 돌더니 그 무리들이 묘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고기떼들이 뭍으로 치밀려 왔다. 이렇게 이상한 일에 놀란 상제들은 고기를 보니 청어(靑魚)떼였다. 이 청어를 다 잡은 김씨는 그것을 백석(白石)을 할 정도의 논을 손에 넣게 되었다고 한다.

 

뒷사람들은 이곳을 흥성 구만(興盛九萬)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정유공장 부지가 되니 과연 9만석을 할 자리였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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