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면

사람이 희망인 울주

전체메뉴보기

읍면 소개

마을소개 및 유래

  • 본문 인쇄
  • sns 공유 리스트 열기

조일리

조선조(朝鮮朝) 제19대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彦陽顯) 조일리(早日里)로 존치해 왔는데 조일(早日) 이라는 지명은 지금까지 한번도 변경되지 않았고, 조선 정조(正祖) 13년(1789년)에는 삼동면(三同面) 조일리였으나 1832년에 보은리의 분동으로 인하여 내외양(內外陽), 송정(松亭)등은 보은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로 분리되었고, 1914년 4월 1일 언양군이 울산군에 합군될 때 이동구역 변경으로 울산군(蔚山郡) 삼동면(三同面) 조일리(早日里)로 바뀌었다. 1933년 1월 1일 삼동면과 중남면(中南面)을 통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 되어 울산군 삼남면(三南面) 조일리로 바뀌었다.

1948년행정구역 변경시 암리(岩里)와 지랑(旨朗)이 행정리동이 되었고 1962년 6월 1일 울주군(蔚州郡)이 울산시(蔚山市)와 울주군(蔚州郡)으로 분리되어 울주군 삼남면 조일리가 되었다.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同出張所)가 설치되어 출장소 관할로 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56년만에 삼동면의 옛 이름을 복칭하게 되었으며,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로 승격됨에 따라 울주구(蔚州區)가 울주군으로 되어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로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암리(岩里) 마을

백두대간 태백산맥이 뻗어내려 오다가, 포항 지방에서 방향을 바꾸어 남서로 이어져서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까지 연결되는 대간의 남단 줄기에 암리(岩里)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암리(岩里)는 마을 앞에 큰 바위(岩)가 양쪽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바위는 학석(鶴石)이라 불렀고 마을 위쪽의 큰 바위는 암극(岩隙)이라고 했는데 옛날에는 ‘덤티미 ’라 부르기도 했다. 즉 암극이나 덤티미는 모두 바위와 바위 사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마을은 뒷산의 형세가 학(鶴)이 나르는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이곳을 학동(鶴洞)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마을 입구에 학석암(鶴石岩)이란 큰 바위가 있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암리 마을의 형성은 인조(仁祖) 2년(1624년)에 창원 황씨(昌原黃氏) 입향조(入鄕祖)가 이주하여 살았고, 마을 건너편 감모랑(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하류)에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입향조(入鄕祖)가 거주하고 있었다. 두 집은 조석(朝夕)으로 연기 나는 것을 보고 서로 알게 되어 왕래하다가, 김해 김씨(金海金氏)선조가 이곳 암리로 옮겨와 터전을 잡아 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게 되었다. 처음 입거 한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계모재(啓模齋)에서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제(祭)를 올렸다고 하며 그 터가 조일리 암리 1158번지라고 전(傳)한다. 그후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번창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조리(籬) 생산지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문명의 발달로 거의 쓰임이 없어져 다만 장식으로 이용되는 복조리를 생산하고 있다. 암리(岩里)는 법정동인 조일리에 속하는 행정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일(早日)마을

조일(早日)마을은 암리, 지랑, 마을과 함께 조일리에 속하는 중심된 마을이며 원조일(元早日)이라고도 한다. 마을 뒷산을 봉학산(鳳鶴山)이라 하는데 이 산의 형국이 봉황새와 같고 봉황(鳳凰)새가 울어 새로운 아침 해가 돋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산세(山勢)에서 따온 이름이 조일(早日)이란 설(設)이 있어 한동안 조일(早日)을 조곡(早谷)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조일 마을은 앞내(川)인 방기천과 뒤의 상금수(常錦水)가 조상들(일명: 조일앞들)아래서 합류되며 목제(경제:頸提)는 배를 매어 두는 것과 같아 마을과 들녘의 생김이 배(船)의 형태이므로 옛부터 조일에는 우물을 파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형성 연도는 확실히 기록된 것은 없으나, 6∼7백년 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초기에는 언양현(彦陽縣), 향림동(香林洞),구기동(舊基洞), 지랑동(旨朗洞)과 함께 조일동(早日洞)이 존치하였으며, 그후 조선25대 철종12년(1861년)에 조일리(早日里)로 개편되어 조일 마을로 존치하게 되었다.

조선 중엽(1630년경)에는 수원 백씨(水原百氏)의 집성촌으로 부귀와 권세를 누렸으나, 어느 과객의 처방에 따라 목재를 끊었다가 백씨 일가는 모두 망하고 동서로 헤어져 떠났다는 설이 있으며 그후 영일 정씨(迎逸鄭氏), 영산 신씨(靈山辛氏)등이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근에 향림동(香林洞)이라 하여 조선 초기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마을의 위치와 그 규모 등은 알 수 없으며 또한 사찰이 여러 곳에 건립되어 있었다고 전해오지만 지금은 향림사(香林寺)로 추정되는 절터만 확인될 뿐이다. 향림곡은 조일 마을에 속하는 정족산의 한 계곡이다

지랑(旨朗) 마을

지랑(旨朗)마을은 말랑(茉郞)이라고도 하는데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광윤(莘光胤)의 막내 아들이 세거함에 따라 끝말 자(末)를 써서 말랑(末郞)이라 하였으나 영산 신씨가 사는 지명에는 풀초자를 붙여야 흥한다고 하여 말랑(茉郞)이라 하였으며 왜정때에 현재 이름으로 고쳐져 오늘에 이른다.

지랑(旨朗)마을은 산(山)이 길게 등성이가 진 마루를 뜻하는 것으로 산마루 마을이라는 뜻이며 지랑과 보삼의 두개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마을의 형성년도는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영산 신씨(靈山辛氏)의 집성촌으로 지금부터 약 500여년 전인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때 의금부사를 마다하고 삼동으로 잠적한 신석환(辛碩丸)의 아들 신석환(辛碩丸)의 아들 신축(辛鷲)의 손자로서 손자 3형제 중 장손 신 전이 하잠에 차손인 신 훤(辛萱)은 방기에, 삼손인 신 진(辛 秦)은 지량에 각각 세거(世居)하였다.

신 진(辛 秦)의 아들 신희원(辛希遠)의 출생이 1626년 인조 4년 병인(丙寅)이므로 370여 년 동안 신씨의 집성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아지는 지랑 마을은 법정동인 조일리에 속하는 암리와 함께 행정 리동으로 분리된 것이다.

보삼(保三)마을

보삼(保三)마을은 상금수(常錦水) 계곡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정족산 중턱에 자리잡은 마을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김해 김씨 일가와 김녕 김씨 일가 그리고 달성 서씨 일가가 왜구의 침입을 피해 삼동면 조일리 지랑마을 내 자연마을인 보삼마을로 피난와서 살면서 비로소 보삼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마을의 형성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보삼 마을은 1개 반으로 지랑마을에 속하였으나 2004년 보삼마을이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1960년 이전에는 약25호 100여명 주민이 정착하여 살았으며 그 이후 대도시 이주 등으로 농촌을 떠나면서 주민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최근 하늘공원 조성을 계기로 다시 인구가 늘어 현재 69가구 약 100여명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1970년대 초 전 마을이 억새로 이은 초가집으로 조성되어 있어 초가(草家)가 잘 보존된 지역으로 처음 TV에 소개된 후 한국영화 촬영의 명소가 되어 뽕, 감자, 씨받이, 불, 변강쇠, 사방지, 빨간앵두 총 7편이 제작되기도 하였으나 물질문명의 변화와 주거환경 개선으로 주택을 지붕개량 또는 신축해 현재 억새 초가집 1채만 보존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보삼마을이 자리잡은 정족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2007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받은 무제치늪과 철쭉 군락지가 있으며, 보삼마을은 삼동면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가을이 일찍 찾아오는 곳이며 절경과 산세의 수려함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보은리

보은리는 조선조(朝鮮朝) 제19대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彦陽縣) 조일리(早日里)에서 보은동(寶隱洞)으로 존치(存置)해 오다가 1832년에는 조일리(早日里)에서 보은리(寶隱里)와 송정리(松亭里)로 분리되어 보은촌(寶隱村)과 송정촌(松亭村)으로 되었다. 고종(高宗) 원년(1864년)에 송정리는 보은리에 흡수되었고 1911년에는 다시 보은리와 송정리가 분리되었다. 1914년 4월 1일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에 합군될 때 이동구역 변경으로 조일리에 속했던 내외양과 송정리를 보은리에 합쳤으며 당시 삼동면사무소는 보은리에 두었다고 한다.

1933년 1월 1일 삼동면과 중남면(中南面)이 통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 되어 울산군 삼남면(三南面) 보은리로, 1962년 6월 1일 울주군(蔚州郡)이 울산시(蔚山市)와 울주군으로 분리되어 울주군 삼남면 보은리,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同出張所)가 설치되어 삼동출장소 관할인 보은리, 1982년 내외양(內外陽) 이 행정리 동으로 분리되고,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56년만에 삼동면의 옛 이름을 복칭하게 되었으며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로 승격됨에 따라 울주구(蔚州區)가 울주군(蔚州郡)으로 되어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가 되었다.

내ㆍ외양(內ㆍ外陽) 마을

내 외양(內外陽)은 내양(內陽) 마을과 외양(外陽) 마을을 통틀어 내외양이라 부르는데 본래는 ‘양지편’ 또는 ‘내외리(內外里)’라 불러 왔다. 법정동인 보은리(寶隱)에 속하는 자연 마을로 존속되어 오다가 1982년 9월 송정과 함께 행정리로 분리되었다. 안 양지편인 내양(內陽) 마을 뒤쪽 산을 독뫼등이라고 하는데 이 독뫼등의 생김이 개(拘)가 누워 새끼에게 젖을 빨리는 형국이라 개의 젖꼭지 위에 산소를 모시면 부(富)를 얻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독뫼등을 따라 산 앞쪽으로 길게 마을이 이어져 있으며 산이 뒤를 가리고 있어 마을이 전체적으로 양지바르고 따뜻하다.

안 양지편의 맞은편 조일천(早日川) 건너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 ‘바깥 양지편’즉 외양(外陽) 마을인데 생김이 배(船) 형상이기 때문에 마을에 우물(物)파면 망하게 된다고 하여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의 위쪽과 아래쪽에 배의 돛대를 만들어 세워 배의 원만한 출항(出航)을 기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지편(內外陽)을 개척한 성씨(姓氏)는 경주최씨(慶州崔氏)로 우거진 다래나무 넝쿨을 베어 내고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고 그후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도시로 이주하고 몇 집만 거주하고 있다.

내외양(內外陽)은 조선 19대 숙종(肅宗) 37년 (1711년) 이전부터 조일리(早日里)에 소속되어 내려오다가 1858년에 조일리에서 보은리(寶隱里)가 분리될 때 보은리 양지촌(陽地村)이었고 1871년 당시 일시적으로 ‘대계(大溪)마을’로 칭(稱)한적이 있기도 하며 현재 보은리에 속하는 행정이동으로 내려온다.

보은 마을

옛날부터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보은(寶隱) 은 바위(岩石)에서 석유(石乳-젖)가 나와 이 젖을 받아 먹으면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먹으려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이 석유(石乳) 즉 돌에서 나오는 젖을 서로 먹으려고 싸움이 자주 일어나 옛날 어느 도인(道人)이 젖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 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보은 마을은 보배(寶貝)즉 석유가 숨어져 있다고 하여 보배 보(寶), 숨을 은(隱)이라는 글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은 마을 앞쪽에는 신라(新羅) 왕자(王子)의 태(胎)를 묻었다고 태봉(胎峰)이 있으며, 이 마을에는 단양 우씨(丹陽禹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약 700여 전에 입향조(入鄕祖)인 12대조 우인경(禹仁鏡)이 경주에서 이주하여 살았다고 전해져 온다.

보은(寶隱)의 「寶」는 광명(光明)을 의미하며 또한 「불」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목사(牧使) 우인경(禹仁鏡)을 추모하기 위해 영모당(永慕堂)을 지었는데 이는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동몽교관조봉대부 우사곤(童蒙敎官朝奉大夫 禹師鯤)의 효자각(孝子閣)이 마을 입구에 있다. 송정(松亭)마을은 원보은(元寶隱)의 자연 마을로 냇가에 무성한 소나무의 정자(亭子)가 있었다고 하여 이름하였다는 설과 학이 날아와 냇가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장관(壯觀)을 이루었는데 이를 이름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져오고 있으며, 조선 순조(純祖) 13년(1832년)에 조일리(早日里)에서 분리되어 송정촌(松亭村)으로 고종(高宗) 원년(1864년)에 송정리는 보은리에 흡수 되었고 1911년에는 다시 보은리와 송정리가 분리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에 합군될 때 이동구역 변경으로 송정리는 보은리에 합쳐져 보은리의 자연 마을로 내려온다.

송정 마을의 아래편에는 학미등(鶴尾嶝) 또는 황새등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고 맞은 편에는 반송목(盤松木)이 있었는데 어떤 지사(志士)가 이곳을 지나다가 봉좌송정(鳳坐松亭)이라 일컬었다고 하니 송정은 그 옛날 냇물과 소나무에 학(鶴)이 앉은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초계 변씨(草溪卞氏) 시조(始祖)인 문열공(文烈公)의 23세 손인 양용공(良瑢公)이 약 200년 전 이곳에 이주해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지금 그 후손들이 일송재(一松齋)를 지어 조상을 추모하고 있다.

금곡리

금곡(金谷) 마을은 일명 쇠골이고 그 어원은 새각단에서 유래한다. 새각단이란 쇠각단의 전음(顫音)이며 동구 밖 나그네가 처음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주막각단이다. 이와 같이 지명을 단 것은 철을 채광하여 장인들이 쇠붙이를 다루어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이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새각단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1세기 전후 철기시대로 진입했는데 마을이 생긴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8세기 경덕왕 때 군헌제를 도입, 전국적인 행정조직을 완비하면서 쇠를 다루는 마을이라 하여 고구려식 지명인 골(골谷)을 붙여 쇠골이라 지명이 정해졌다.

금곡리는 금곡마을의 단일 법정리로 이(里)의 구성은 하금곡, 중금곡, 상금곡의 세 마을로 되어 있다. 조선조(朝鮮朝) 제19대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彦陽縣) 왕방리(旺芳里)의 금곡촌(金谷村)이 신설되고 왕방은 하잠리(荷岑里)에 흡수되었고 조선 고종(高宗) 8년(1871년) 금곡은 다시 왕방리에 흡수되었으며 1911년 다시 부활되어 삼동면 금곡리였고 1914년 3월 1일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에 합군될 때 울산군 삼동면 금곡리로 존속되어 오다가 1933년 1월 1일 삼동면과 중남면(中南面)이 통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 되어 울산군 삼남면 금곡리 였다. 1962년 6월 1일 울주군(蔚州郡)이 울산시(蔚山市)와 울주군으로 분리되어 울주군 삼남면 금곡리였고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同出張所)가 설치되어 삼동출장소 관할로 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56년만에 삼동면의 옛 이름으로 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로 승격됨에 따라 울주구(蔚州區)가 울주군(蔚州郡)으로 되어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로 존속되고 있는데 금곡(金谷)이 옛날 신광리(新光里)에 소속되었다. 신광리는 조선 영조 전기(英祖前期) 호구 총수(戶口總數. 1725년)에서 신광이란 지명을 찾을 수 있었고 조선정조 3년(1789년) 호구 총수(戶口總數)에서 삼동면은 早日, 旺芳, 荷岑, 新光, 鵲洞, 九藪)등 6개 동이 존재해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금곡이 신광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또는 금곡의 아주 옛날의 지명이 신광이었는지 고증(考證)할만한 자료가 없다.

하잠리

조선조(朝鮮祖) 19대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彦陽縣) 송면리(松面里)로 존치하였다. 조선 정조(正祖) 13년(1789년) 송면리는 하잠리(荷岑里)에 흡수되어 없어지고 언양현(彦陽縣) 하잠리(荷岑里)는 그대로 내려오다가 1911년 사촌(沙村)이 하잠에서 분리되었다. 그런데 1914년 4월 1일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에 합군될 때 이동구역 변경으로 다시 왕방(旺芳)과 사촌(沙村)이 하잠리(荷岑里)에 합해졌다.

1933년 1월 1일 삼동면(三同面)과 중남면(中南面)이 통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 되어 울산군 삼남면 하잠리로 되었고, 1962년 6월 1일 울주군(蔚州郡)이 울산시(蔚山市)와 울주군으로 분리되어 울주군 삼남면 하잠리였으며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同出張所)가 설치되어 삼동출장소 관할로 되었다.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56년만에 삼동면의 옛 이름을 복칭하게 되었으며, 면사무소는 880번지에 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로 승격됨에 따라 울주군(蔚州郡)으로 되어 울산광역시울주군 삼동면 하잠리이다.

원하잠(元荷岑)마을은 1969년 대암댐의 축조(築造)이전에는 70여 호가 되었는데 수몰(水沒)이 되어 주민들은 대개가 외지로 이사가고 지금은 높은 곳에 위치한 20여 호만이 남아있다. 하잠리는 옛부터 도요지(都窯地)로 유명한 곳인데 특히 사촌마을 점곡(粘谷)에서는 서민생활에 이용하는 사기그릇을 해방 후까지도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기그릇 조각들이 안사촌 산기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지난 2000년 4월 울산대와 위덕대 공동조사단의 지표 조사결과 하잠리 산5-1번지 10,000여 평이 14세기경 조선 초기 도요지로『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된 언양 자기소(磁器所)로 밝혀진 바 있다.

하잠리 산5-1번지 사기 등은 1760년에 발간한 영산신씨(靈山辛氏) 족보(族譜)에 의하면 삼동면 송면동(松面洞) 하잠(荷岑) 사기등(沙器嶝)으로 표기되어 있다. 단종(端宗) 2년(1454년)『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자기소(磁器所), 도기소(都器所)가 현남(縣南) 대토리(大吐里)에 같이 있고 품(品)은 하(下)라고 되어 있으며 예종(睿宗) 원년(1469년)『경상도 속찬지리지(慶尙道 續撰地理志)』에도 자기소(磁器所)가 현남(縣南) 대토리(大吐里)라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대토리(大吐里)란 지명에 관해 살펴보면 면제도(面制度)가 없었던 고려조(高麗朝)에서 조선조(朝鮮朝) 초기까지 삼동지역(三同地域)을 언양현 대토리라 지칭해오다가 언양현 삼동면으로 변천(變遷)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실록(世宗實錄)의 대토리(大吐里)의 도기소(都器所)는 지금 하잠(河岑) 북편의 사기등(沙器嶝) 아래 도요유적지(陶窯遺跡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로 보아 하잠리(河岑里)의 사촌(沙村)과 하잠(河岑) 일대는 옛부터 도요지(陶窯地)로 이름난 곳이었음을 알수 있다.

왕방(旺芳)마을

왕방마을의 형성 유래를 고찰해 보면 약 300년 전에 동역등 산자락에 작은 마을이 있었고 지금의 섬(島)들이 왕방에 속해져 있었다. 왕방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왕성한 방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며, 원래 旺方으로 표기하여 왔으나 영산신씨(靈山辛氏)가 사는 지명에 초두가 붙는 곳이라야 흥하게 된다고 전해오고 있어 모방(方)위에 초두를 붙여 향기방(芳)으로 하여 왕방(旺芳)으로 표기해 오고 있다. 또한 동역등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아침에 해가 뜨는 일출시간은 늦으나 마을 앞쪽이 막히지 않아 하루 종일 햇볕을 받는 시간이 긴 곳이기도 하다. 사촌(沙村)마을

사촌(沙村)마을

사촌은 삼동면의 심장이라 부를 만큼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3년 삼남면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현 삼동면사무소의 위치를 중심으로 행정상의 중심을 이루었고 교통상으로도 사촌을 기점으로 군도 34호선(청량-삼동-신평), 군도10호선(사촌-반천), 군도 5호선(사촌-작하)이 통하고 있어 모든 지역으로 연결되는 중심 통로를 이루고 있다.

사촌은 마을 앞 하천에 자갈과 모래가 많고 사금(沙金)을 캤다고 하여 사촌(沙村)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하잠(荷岑)마을

하잠 마을은 축성천의 물이 마을을 한바퀴 휘감아 굽이쳐 흐르고 있는데 앞쪽 솔면 안골에서 바라보면 마치 마을이 물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 마을과 물과 산이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잠(荷岑)은 연꽃 하(荷), 봉오리 잠(岑)자를 써서 荷岑이라 이름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생긴 모양이 연(蓮)잎과 같다하여 연잎설(設)에 근거하엿고 또한 연잎에는 무거운 돌을 얹지 못하고 구멍을 뚫지 못한다고 전해오고 있어 옛부터 마을에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으며 묘(墓)에는 상석(床石)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출강리

조선조(朝鮮朝)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彦陽縣) 송면리 (松面里)의 신광촌(新光村)으로 존치하였으며 1725년 영조(英祖) 후기에 하잠리(荷岑里)와 신광리로 구분하여 신광리 신광촌(新光村)이 되었다.

정조(正祖) 1년(1777)에 다시 하잠리와 신광리를 합하여 송면리 신광촌으로 되었으며 정조(正祖) 10년(1789년)에 송면리가 폐지되어 하잠리와 신광리로 구분되어 신광리 신광촌이 되었고 10년 뒤인 정조22년(1798년) 송면리와 신광리가 폐지되고 하잠리에 흡수되어 하잠리 신광촌으로 계속 내려오다가 1914년 언양군(彦陽郡) 이 울산군(蔚山郡)에 합군되어 울산군 삼동면 하잠리에서 구신광리 구역을 출강리(出崗里)로 존속되어 오는데 1933년 1월 1일 삼동면과 중남면(中南面)이 통합하여 삼남면(三南面)에 속하게 되었고 1962년 6월 1일 울산군이 울산시(蔚山市)와 울주군(蔚州郡)으로 분리되어 울주군으로,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同出張所)가 설치되어 삼동출장소 관할이었다가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56년 만에 삼동면의 이름을 다시 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1995년 울산시와 울주군이 도시, 농촌 복합형태의 시로 통합하고 울주군지역은 울주구로 신설되어 울산시 울주구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울주구가 울주군(蔚州郡)으로 되어 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출강리(出崗里)이다.

작동리

작동(鵲洞)은 조선조(朝癬朝)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 작동리(鵲洞里)로 변함없이 계속되어 오는데 1914년 4월 1일에 청량면(靑良面)의 서부 일부 관음동(觀音洞), 웅촌면(熊村面)의 댕양리(大陽里),작치(鵲峙), 관산(冠山)을 편입하고 원작(元鵲)을 합쳐 둔기리(芚基里)를 설치할 때 현 둔기리(芚基里)인 원둔기(元屯基), 상작(上鵲), 하작(下鵲)이 분리되었으며 당시의 작동리(鵲洞里)라 하면 상하작(上下鵲), 중리(中里), 둔기(芚基), 산현(山峴)에 이르는 광할한 지역이었는데 중리(中里)는 여러 개의 자연마을 중 가장 중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작동리(鵲洞里)는 중리(中里) 산현(山峴), 차양곡(遮陽谷), 음달(陰地)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줄어들게 되었고 1914년 3월 1일 언양군이 울산군에 합군이 되어 울산군(蔚山郡)에 속하게 되었고, 1962년 6월 1일 울산군이 울산시와 울주군(蔚州郡)으로 분리되어 울주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同出張所)가 설치되어 삼동출장소 관할이었으며,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1995년 1월 울산시와 울주군이 도시 농촌 복합형태의 시로 통합하고 울주군지역은 울주구로 신설되어 울산시 울주구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종전의 울주구가 울주군으로 되어 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작동리이다.

산현(山峴)마을

산현(山峴)마을은 작동리에 속하는 자연마을로 오랜 세월 변함없이 유지되어 오는데 본면의 동남편에 위치하고 있고 웅촌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정족산 줄기로 마을 동쪽에 덕하, 목도장으로 연결되는 염추정재와 서쪽에 출강으로 넘나드는 장구재와 아래 출강으로 연결되는 흰당미기(당고개)가 있으며 남으로 웅촌면 뒷골로 연결되는 지경고개 등 사방으로 마을과 마을로 연결되는 고개가 있어 뫼산(山), 고개 현(峴)자를 써서 산현이라 한다. 산현마을을 “산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티”는 고원(高原)의 뜻을 가진 우리말이다.

중리(中里)마을

중리는 작동리의 여러 자연마을 중에서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며 중리의 본동은 작동천을 중심으로 하여 남서쪽과 동북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본동에서 2Km 동쪽 골짜기의 자연 마을은 깊은 산속이라 볕을 가리는 천막을 쳐놓은 것과 비슷하다고하여 붙은 이름이라 전해져오며 다른 일설로는 산나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채양골(菜陽谷)이라 부르기도 했다.

둔기리

둔기리(屯基里)의 확실한 근거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문헌(文獻)을 조사해 보았으나 1900년 이전 둔기리의 이동명(里洞名)은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몇몇 책자에서 조선 정조때(1777~1800년)와 고종 31년(1804년)에 현재의 둔기리가 언양현(彦陽縣) 삼동면 구수리에 소속되었다고 열거(列擧)하고 있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경상도 언양현 천남 삼면 호적대장(慶尙道 彦陽縣 川南三面 戶籍大帳) 상 하권을 토대로 분석해 본 결과 현 둔기리 626번지 (둔기)에서 거주한 신동규(辛東圭)의 4대조인 신 필(辛 苾)과 5대조인 신백화(辛百華)가 무오식 호적대장 조선 철종(哲宗) 9년(1858년)을 통하여 작동리(鵲洞里) 6통에 거주하였음을 찾았다.

또 현 둔기리 822번지(하작)에 거주한 신동국(辛東國)의 5대조인 신백추(辛百樞)가 무오식 호적대장 조선 철종 9년(1858년)당시 작동리 5통에 등재되어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현 둔기리 290번지(상작)에 거주한 노익규(盧益圭)의 4대조인 노화인(盧化仁)과 5대조인 노상집(盧商集)이 당시 무오식 호적대장 철종(哲宗) 9년(1858년)에 당시 작동리 2통( 226번지)에 거주하였음을 발견하였다. 노상집(盧商集)의 형님인 노상기(盧商起)는 호적단자에 웅촌면 대양리로 울산부 호구총수에 작성된 일련의 사실들로 미루어 보면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원 작동이 상작과 하작이라는 말이 납득이 되었고 또한 웅촌면 대양리 일부가 삼동면으로 행정구역이 편입된 사실이 입증되었다. 관산(冠山)과 작치(鵲峙)가 상작 윗마을임을 알 수 있었고 현재의 둔기리(상작 하작 둔기리)가 구수리(九數里)지역이라고 함은 잘못으로 바로 잡아둔다.

상작(上鵲), 하작(下鵲), 둔터(芚基) 마을은 1914년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에 합군이 될 때 “ ① 울산군 청량면(靑良面)의 서부지역 일부와 ② 울산군 웅촌면(熊村面) 대양리(大陽里)의 일부 ③ 鵲峙 ④ 冠山를 편입하고 둔기(⑤ 觀音洞일부 편입함), ⑥ 원작(元鵲을 합쳐 둔기리(屯基里)가 설치 되었다.

위에서 청량면 서부지역의 편입은 남암산 줄기 ‘복금자골’ 부근으로 추정되고 웅촌면 대양리의 당시 경제는 현 둔기리 190번지 상작회관 아래쪽 골목길을 경계(境界)로 위쪽은 울산부 웅촌면 대양리였고 길 아래쪽은 언양현(彦陽縣) 삼동면(三洞面) 작동리(鵲洞里)였으며 상작 마을에 거주한 노위철(盧胃澈. 84세)과 상작 이장인 노인규(盧仁圭. 60세)의 말에 의하면 길을 사이에 두고 울산부과 언양현이 존재하고 있어 ‘언양밥 먹고 울산 구실 한다’라는 속언(俗言)까지 있었다고 한다.

상작은 조선조(朝鮮朝) 숙종(肅宗) 37년(1711년) 이전부터 언양현(彦陽縣) 작동촌(鵲洞村)인 것이다.

먼 옛날에는 까치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가치마을’, ‘작지(鵲地)’ 또는 ‘작치(鵲峙)’로 불러왔는데 중리(中里)를 작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여겨지며 상작, 하작, 중리, 둔터를 총칭해서 작동이라 부른 이름으로 정리 해 둔다. 둔기(屯基)라는 지명은 원래 모일둔(屯 )터기(基)로 표기(表記)해 왔는데 영산신씨(靈山辛氏)가 사는 곳에는 초두가 붙으면 흥(興)하게 된다고 유래되어 오는 말이 있어 초두를 붙여 풀둔자(芚)와 터기자(基)를 써서 둔기리(芚基里)로 표기한 것은 1930년 이후 부터이다. 1914년 둔기리가 신설되어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芚基里)로 상 하작(上下鵲)의 행정리가 이에 속해져 있었다. 또 1933년 1월 1일 삼동면과 중남면(中南面)이 통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 되어 울산군 삼남면 둔기리(芚基里)가 되었으며 1962년 6월 1일 울주군이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분리되어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였고 1963년 3월 1일 삼동출장소(三洞出張所)가 설치되어 삼동출장소 관할이었다. 1989년 4월 1일 삼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 삼동면 둔기리였고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로 승격됨에 따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로 존속되어 왔다.

상작(上鵲)마을

상작마을은 먼 옛날부터 작동으로 외지에 알려진 곳으로 조선조 숙종 37년(1711년)이전부터 언양현 작동리에 소속되어 내려오고 있으나 일부의 행정구역이 폐치, 분합된 것을 알 수 있다. 상작은 하작과 함께 오랫동안 '상·하작'이란 단일마을로 내려오다가 1984년 분동이 되어 상작과 하작으로 분리되었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과 호적단자 등을 종합해 볼 때 현재 상작 위쪽의 마을은 울산부 소속인 웅촌면 대양리 일부의 작치(鵲峙)였고 당수나무 아랫쪽은 언양현 삼동면 작동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작은 옛날에 원작동으로 하작, 중리마을과 지금의 둔기 일부를 총칭해서 부르던 이름으로 정리해 둔다.

하작(下鵲)마을

하작은 법정리인 둔기리에 속한 자연마을이며, 도로를 낀 아래쪽에 있는 '본 마을'과 하작천 물레방아가 있었던 다리를 건너 위쪽 산기슭에 있는 '대밭마을(대밭각단)'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밭마을은 대다수의 집들이 산기슭 대밭을 끼고 정남으로 향하고 있는데 대밭이 많다고 하여 대밭마을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문수산과 남암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냇물은 옛부터 이고장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하작 마을이 끝나는 하작천쪽 언덕배기에는 줄 밤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은 여름날 목동들의 쉼터는 물론 마을에 있는 소는 모두 이 밤나무 그늘 아래 매어두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둔기(屯基)마을

둔기는 울산의 명산 문수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둔기라는 지명은 둔(屯)터(基)로서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임진왜란때 언양현의 의병들이 둔병(屯兵) 한 곳이었으므로 둔기(屯基)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삼동면 둔기리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으로는 현재 상하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둔터는 유명무실하게 흔적만 남아 있고 대암댐에 대부분 수몰이 되었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