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면

사람이 희망인 울주

전체메뉴보기

읍면 소개

전설과 사화

  • 본문 인쇄
  • sns 공유 리스트 열기

연희대사와 문수보살

옛날에는 문수산을 영축산이라 하였다. 영축산에 은거하여 매양 법화경을 읽는 고승 연희대사가 있었다. 이렇게하여 보원관행을 닦으니 마당의 연못에 연 두어 떨기가 있어 사철 시들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원성왕이 그 상서롭고도 기이한 일을 듣고 그를 불러다가 국사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곧 연희대사의 귀에도 전해졌다.

대사는 이말을 듣자 암자를 버리고 달아나 서쪽 재에 있는 바위 사이로 넘어갔다. 대사가 가다보니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묻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는가?”대사가 이에 답하여 “나라에서 함부로 벼슬로써 나를 매어두려 한다는 말이 들리므로 몸을 피하려는 것이오.”라고 하였다.이를 듣던 노인이 말하되 “여기에서 장사할 만한데 왜 수고롭게도 멀리까지 가려고 하는가. 대사야말로 이름 팔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대사는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 5리쯤 더 갔다. 그런데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노파가 묻기를 “대사는 어디로 가느냐 ?”하였다. 대사는 밭 갈던 노인을 만났을 때와 같이 대답하였다. 노파는 다시 “앞서 사람을 만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연희대사가 다시 말하되 “한 늙은이가 있어 나를 너무나도 업신여기는지라 불쾌하여 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노파는 “그분은 문수대성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사는 부끄럽고 놀라 급히 그 노인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이마를 조아리고 뉘우쳐 “변재처녀다”하며 말을 마치자 몸을 감추어 버렸다. 이러한 일을 당한 연희대사는 걸음을 돌려 절로 돌아왔다. 갑자기 사신이 임금의 소명을 들고 와서 부르는 것이었다. 대사는 진작 받아야 할 것인 줄 알고 부름을 받들어 궁성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국사가 된 것이다.

대사가 노인에게 감동한 곳을 ‘문수고개’라 하고 ‘변재천녀’를 만난 곳을 ‘아니고개’라 하였다는 것이다.

물막곡과 구늪소

“애취! 이놈의 고뿔아 문동수네 맏며느리 집으로 가거라.” 물막곡은 일명 물막곡(勿幕谷)이라 부르기도 하며, 둔기 마을에서 언양읍 장촌 마을로 가는 길목으로 임진란 당시 왜군과 싸우던 우리 장병들이 지금의 웅촌에서 후퇴하여 둔기마을을 거쳐 언양현으로 가는 도중 물방골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고 장병들이 너무 지쳐 더 걸을 수 없었으므로 이 고개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인솔하는 장군의 귀에 하늘에서 “물막,물막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장군은 이상히 여겨 “군막(軍幕)를 치지 말라”고 풀이 하여 지친 장병들을 이끌고 거기에서 약 4km 떨어진 언양현에 가서 여장을 풀었는데 그날 밤 왜군이 물방골을 침입하였으나 장군 때문에 많은 장병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 구늪소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소(沼)에는 바위굴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굴 안에는 큰 이무기가 있어서 이곳을 오가는 사람을 해침으로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큰 물이 질 때마다 길이 유실되어 산모퉁이를 지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이 이무기를 없애 달라는 민원을 당시 현령(縣令)인 모일성(牟一成 : 숙종 을미 6월∼병신 9월)에게 내었다.

현령은 총을 가진 군사들을 이끌고 이를 사살하러 갔는데 군사들이 감히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현령은 본래 지체(肢體)의 힘이 강하였음으로 굴 앞에까지 다가가서 총을 쏘아 이무기를 죽이고 드디어 그 폐단을 덜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끌어내어 보니 머리는 구늪숲에서 꼬리는 구늪소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이 전설은 이무기의 크기에 대해서만은 과장이 있는 듯하나 숙종 을미년(1715년)이란 시대의 명확성과 현감의 이름까지 밝혀져 있으니 실화였음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수원백씨 문증

조일 마을은 조일리의 중심된 마을로서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면 정족산(鼎足山)에서 북편으로 뻗어 내린 조그마한 능선의 마지막 고개인 목제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좌우로 타원형의 하천이 있으며 한쪽은 방기천이고 한쪽은 상금수(常錦水)라 이 땅의 생김이 배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으며 마을의 형성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불교(佛敎)를 조정이나 사회에서 천대했던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집성촌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수원 백씨(水原白氏)는 양반의 집안으로 재력 및 권세가 당당하여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으나 세도가 지나쳐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딸을 낳으면 ??에 수염이 돋아나는 우환이 있었으나 소문이 두려워 극비에 붙이고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평소 수원 백씨로부터 설움을 받은 한 도사가 과객으로 가장하여 마을의 촌장에게 마을의 풍수지리를 보니 재력과 권세는 부럽지 않으나 우환이 끝이 나지 않는다고 하니 촌장은 귀가 번쩍 띄어 과객에게 방비책을 물었다.

과객은 우환을 쫓으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며 상금수(常錦水)로 들어가는 목제(인제:咽堤)의 산을 자르고 마을에 우물이 없으므로 우물을 파서 생활용수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마을촌장은 권세와 부귀를 더욱 누리고 우환을 쫓아낸다고 함에 반가와 마을에 우물을 파고 목제의 산을 헐었으며, 그때 산허리를 자를 때 두 마리의 흰새가 울며 남쪽으로 날아갔다고 하며, 그 일이 있은 후로 수원 백씨(水原白氏)는 운세가 기울어 망하게 되고 조일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영일 정씨(迎日鄭氏)와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들어와 거주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는 야화가 있다. 지금의 지형을 살펴보면 땅의 모양이 배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객의 처방을 풀이하면 목제에 매어 둔 배를 바다로 보내고 배 바닥에 우물을 파서 구멍이 나게 하여 배가 침몰하게 하도록 한 이야기이다.

조일 마을에 백(白)씨가 살았다는 근거를 찾아 수원 백씨(水原白氏) 대동보 서기1776년 병신(丙申 조선 21대 영조52년)보를 보니 그 당시 언양현의 남면(南面)에 보은동(寶恩洞) 조일동(早日洞) 향림동(香林洞) 송면동(松面洞)등이 존치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수원(水原) 백씨(白氏) 현사장파(縣師將派)의 12세 백학상(白鶴祥 묘 :울산부 동면 연암동) 통정대부의 후손인 14세에서 19세까지의 묘소가 조일 마을 근교인 구일동 향림동에 있으며,서기1966년도 수원(水原) 백씨(白氏) 현사장파(縣師將派)보 발행의 서문에 의하면 약200여년 전에 울산의 조일에서 권세를 당당하게 누리며 살다가 동서남북으로 분산되어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 1930년경 혈족에 관심이 많은 친족이 가첩을 정리하여 혈족을 찾기 시작하여 서기 1966년에 파보를 발행한다는 내용이 있어 거주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또한 서기 1870년에서 서기 1894년도 발행한 호적단자에 의하면 19세에서 21세까지는 언양현 중북면 직동리에 기거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지금부터 약3백 수십년 전인 서기1630년대부터 조일에 기거하다가 서기 1800년대 초반에 언양등지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우리 나라가 공업화로 변화하면서 서기 1960년 후반부터 1970년대 부산과 타 지역으로 이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암리 마을의 수구지

암리(岩里) 마을 입구 아래쪽에는 학석바위(鶴石岩)가 있고 그 학석바위 위에는 학의 벼슬처럼 생긴 작은 바위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내려오는 동안 풍우(風雨)에 없어졌고 그 앞에는 맑은 냇물이 흐른다.

이곳을 이름하여 수구지(守口地)또는 수호지(守護地)라 하며 수구지는 냇물을 가로질러 큰 보(洑)를 막았고 붓둑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경관(景觀)이 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버드나무는 잔뿌리가 많아 토양(土壤)의 유실(流失)을 막고 비바람을 막는 방풍림(防風林)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의 재산과 정기를 보전하는 수호목(守護木)으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거목(巨木)은 고사(故死)하고 이 자리에는 지금 느티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어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옛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한다.

어사솔배기

조일 마을과 암리 마을 사이에 있는 산모퉁이로 조선시대 어사가 이곳을 지나 가다가 아래에는 개울물이 흐르고 경치가 좋아 쉬어 갔다고 한다.

어사가 쉬고 가면서 짚고 가던 소나무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그 소나무가 살아서 자랐다고 전해오며,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어사솔배기’라 하고 어사가 쉬어간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소나무 다섯 그루를 그 자리에 더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길가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으니 그 구전을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

암리 마을의 바위

조상곡 인근에 말 모양의 바위가 있어 말 바위라 하는데 이 바위에 대해서는 옛날 조일 마을 수원 백씨와 지랑 마을 영산 신씨가 말머리 쪽의 마을에 좋은일이 생긴다하여 말 바위의 머리를 앞다투어 자기 마을 쪽으로 보게 하였다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지금은 그 바위를 찾아볼 수 없다.

우롱소와 이심이

향림곡 계곡 내에서 제일 큰 웅덩이로 바위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의 흐름과 물소리가 항상 우렁찼다고 하며 옛날에는 그 소(沼)의 깊이가 명주실 한 타래의 깊이였으며 또한 그 소에 이심이(이무기)가 살고 있다하여 사람들이 접근이 쉽지 않았으며, 그 이심이의 크기가 둥근 멍석 정도이고 보았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 우룽소도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옛 깊이를 간직하지 못하고 대부분 매워 졌으며 주위의 기암(奇岩) 절경(絶景)도 1980년대 중반에 경부 고속도로 콘크리트 포장용의 골재로 채쥐되어 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향림사

90여 년전 조일 마을에 살고 있던 어느 농부가 농지 개간을 하다가 노란 금부처 한 개를 주워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네 어귀 당수나무 아래에 모여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그 부처를 보였다.

때마침 당수나무 그늘에 쉬고 있던 과객이 그 말을 듣고 그 부처는 집에 가져가면 큰 우환(憂患)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농부는 여럿이 앉아노는 당수나무 밑에 부처를 놓아둔 체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갔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부처 생각이 나서 당수나무 밑을 찾아갔더니 마을 사람들과 과객이 온데 간데 없었다. 그후 그는 금부처를 주워 횡재를 했다가 바보처럼 잃어 버렸다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1973년 새마을 사업 당시 농로 확장 공사 중 향림사(香林寺)라 새겨진 벼루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족산 아래 향림곡 골짜기 중간의 우막곡 입구에 절터 굼터기라 불리어 오는 넓게 푹 파인골짜기가 향림사의 절터로 추정되며 지금도 주위에 기왓장과 사기그릇 조각 등을 발견할 수 있고 주위에 널려 있는 돌을 들어보면 그 밑에 흰 빈대가 살고 있는데 빈대는 피를 먹지 않아도 천년을 산다하는 말로 보아 아마 향림사는 빈대의 서식으로 망하지 않았나 하고 이곳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말랑마을의 형성의 전설

지랑(地朗)마을은 원래 지금 마을이 있는 곳의 서쪽의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며 소년 죽음이 하도 많아 걱정을 하던 중, 어느날 지나가는 도사에게 그 사연을 이야기하고 방비책(防備策)을 물어보니 도사가 말하기를 “담배댓에 담배 한 대를 넣고 불을 댕겨 담배를 피우며 마을 아래로 내려 가다가 담배불이 꺼지는 위치에 자리를 잡아 마을을 옮기면 모든 액운을 피할 수 있다.”하여 지금의 마을 위치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처음 마을이 있었다는 골짜기 주위에는 사기그릇 및 옹기조각이 지금도 많이 발견되어 옛이야기를 뒷받침하여 주고 있으며, 앞에는 용마등(龍馬嶝)이 솟아 있고 그 위에 투구등, 좌측에는 날카로운 칼등 (劍嶝) 등 마을의 형상이 ‘장군(將軍) 태산혈(胎産血)’이라 하여 옛부터 무관이 태어나는 곳이라 전해오며 영산 신씨(靈山辛氏)선조의 무과급제를 후세에 알림이라고 후손들은 말하고 있다.

정족산의 붓골재

정족산(鼎足山)에는 붓골재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울산군이 웅촌면(熊村面)과 언양현의 삼동면(三同面)사이에 물싸움이 잦은 곳이었다고 한다. 웅촌면 사람과 삼동면 사람사이에 서로 자기면 쪽으로 물을 흐르게 하려는 물싸움이 있다. 웅촌(熊村)에서는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붓골재는 삼동면의 관할 지역으로 되어 있다.

지금 이곳의 지형을 보면 붓골재는 웅촌면 쪽이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낮음을 알 수 있는데, 웅촌 사람들이 물싸움을 할 때 싸우다 불리하여 달아나면서 흙을 한 삼씩 떠 도망하는데 이쪽 고개가 다를 곳보다 낮아진 이유라고 한다.

언양 현감은 삼동 측은 이 붓골이 아니더라도 물이 많은 곳이니, 삼동 사람들에게 이해와 설득으로 그 물을 웅촌 쪽으로 흐르게 했다고 전하며, 지금도 그 곳에는 옛날 보를 막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새까맣고 부드러운 흙이 많은데 이 흙을 주로 모관에 많이 이용했다고 주변 농민들은 말하고 잇다. 인근 주민의 말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는 ‘땅불’이 난 곳이라 전해 오기도 하며 이 일대가 정족산의 ‘무제치(舞祭峙)늪’이기도 하다.

당수나무와 구렁이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금곡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정성껏 제물(祭物)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오던 세 아름이 넘는 당수나무가 있었는데 이는 하금곡(下金谷) 들판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28년 하금곡 마을에서 제법 세도를 올리고 살던 선윤규(宣潤奎)가 당수나무(느티나무)의 그늘 때문에 논농사가 잘 안된다는 이유로 어느 날 그 큰 당수나무를 베어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모친인 엄씨(嚴氏)는 어느 날 갑자기 중병을 얻어 눕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세(家勢)가 기울고 마을의 풍파가 끊이지 않자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큰 느티나무 두 그루와 서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어 놓고 정성 들여 제물을 차려 제(祭)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모친의 병환은 차츰 회복이 되어 갔으나 가정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1942년경에 등이 검은 색과 회색을 띄었고 길이는 2m가 넘는 굉장히 굵은 구렁이가 베었던 당수나무의 뿌리에서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 구렁이는 수로(水路)를 따라 선윤규(宣潤奎)가 사는 마을로 올라와서 특히 그의 집 구석 구석을 맴돌고 심지어 마루와 방에까지 들어가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사람을 헤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모친은 다시 병환에 시달리게 되었고 선윤규는 금곡 남역곡의 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익사하게 되었다. 마을의 우환이 그치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정성껏 제를 올리고 난 후부터 구렁이들은 모두 느티나무 뿌리 안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현재 하금곡에 살고 있는 선종목(宣鐘穆, 70세)이 그 때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현재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서로 엉켜,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며,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정성 들여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무사함을 기원하고 있다.

김동지 이야기

옛날 하잠 마을에 김동지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혈육이라고는 딸 하나밖에 없어 딸을 출가시키고 노년에 임종을 앞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박토 두어 마지기(400평정도)가 전부이니 이것을 동답으로하고 사후에 장례나 치러주고 년년세세 술이나 한잔 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운명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숫돌곡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후 동민들은 그의 유언대로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의 뜻을 영세불망키 위하여 동사옆 자연 반석에 김동지에 대한 사연을 새겨 두었는데 아쉽게도 댐공사로 수몰되어 이것 마져 볼 수 없고 이야기로만 남게 되었다.

중리 마을의 말 바위

중리 차양골 하천과 산현골 하천이 합수(合水)되는 마을 중앙 하천에 말을 닮은 바위가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 말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옛날 어느 패전(敗戰)한 장수가 말을 타고 지친 몸으로 이곳을 지나가다가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말에서 내려 고삐를 풀고 물을 먹이면서 장수가 하는 말이 “이놈의 말아!”하고 호통을 치면서 “나는 적진(敵陳)에서 힘과 용맹(勇猛), 통솔력(統率力)이 없어 패배를 당한 졸장부가 되었지만 힘이 넘치던 네놈은 어찌하여 뒤로 물러났느냐”고 꾸짖으면서 “앞으로는 그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뒤로 물러나는 비겁한 놈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이르자 그제서야 말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將帥)는 지친 몸을 흐느적거리며 “싸움에 패배한 내가 네놈을 꾸짖는다 는 것이 잘못이다”하면서 뒷마을 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주인을 기다리던 말은 뒤를 돌아보지도 물러나지도 말라는 주인의 말에 돌아보지도 못한 채 애타게 주인을 기다리다 바위로 변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패배한 장수(將帥)가 사라졌다는 서쪽마을은 삶의 어려움을 느끼게 하고 장수를 기다리던 말이 앞을 쳐다보는 동쪽 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이는 동쪽 마을과 서쪽 마을의 생활 양식과 정서에 차이점을 잘 알 수 있는 전설이기도 하다.

현재 말바위는 중리(中里), 산현(山峴)간 도로 확포장 당시 교량설치 관게로 마을 회관 앞에 보관되어 있는데 위치가 선정되면 옮겨질 계획이다.

줄서나무에 얽힌 이야기

중리 마을 북쪽에 줄서나무가 있다.
줄서나무는 고려말기 때 심어졌다고 전해 오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길 가던 과객이 말하기를 “북풍이 삼하게 불면 마을의 기온이 따뜻하지 못할 것이니 나무를 심으면 과일은 낙과를 예방할 것이고 곡식들은 쓰러짐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하여 마을 사람들은 답 92번지, 133-1번지와 현 답 93번지와 대지 97번지 사이에 넓은 공유지가 있어 줄을 지어 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나무가 성장하여 그늘이 좋아 여름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쉬어 가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자 주위에는 주막집이 생겼고 동남쪽으로는 청량면, 웅촌면 등과 북쪽으로는 언양읍, 삼남읍, 시평, 방면 길목이라 장사는 매우 잘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주막 주인은 박인원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말 줄서나무가 있어 이 나무그늘 아래에 사람이 모여 단체가 생기게 되니 일본 정치권에서 독립운동의 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해산 시키기 위해 줄서나무를 모두 제거했다고 하며 그후 중리 마을에는 농작물은 물론 과일까지도 흉작(凶作)이 거듭되어 점쟁이에게 점을 쳐보았더니 줄서나무를 베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말했다. 그후 1950년 초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는데 관리 소홀로 고사한 나무도 많았고 최근에는 주위의 농작물 피해로 나무를 일부 제거하기도 하여 지금은 참나무 몇 그루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청룡등의 수리고개

상작(上鵲) 마을의 앞산인 남암산(南岩山)에서 시작하여 하작(下鵲) 마을 돌림보 위까지 이르는 산등성이를 청룡등(靑龍嶝)이라 부르며 이 청룡등에 얽힌 애기 장수 이야기와 많은 구전(口傳)들이 전해오고 있다.

중리(中里) 마을에서 상작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길을 수리고개(修理領)라 부르는데 이 고개의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옛날 이 고개로 가마(가 =장가나 시집을 갈 때 신랑 신부가 타고 가는 탈 것)나 상여(喪與)가 지나가면 큰 우환(憂患)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가마나 상여는 지름길인 이 고개로 가지 못하고 항상 하작(下鵲)마을로 돌아다니는 불편을 겪어 야만 했다.

그러다가 약 40년 전 중리 마을에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이 작고하자 상작 마을 위쪽에 있는 남암산 중턱에 장지(葬地)를 마련하고 장례(葬禮)를 치르게 되었는데 큰 우환이 생긴다는 수리고개를 넘기로 작정하여 술을 잔뜩 마신 중리 마을 상도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술기운으로 상여를 메고 수리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혹시나 하고 걱정이 되었으나 아무런 탈이 없자 그 후부터는 가마나 상여할 것 없이 수리고개를 통하여 다녔고 산허리를 깍아 내려 길을 낮추었는데 산의 혈(血)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상작과 하작 마을에 인재(人材)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을이 번성(繁盛)하지 않는다고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사동

하잠 마을 뒤편에 있는 가람등 밑에 100여년이 지난 봉분(封墳)도 없는 묘(墓)한 기(基)가 있었다. 하잠 마을을 왔다가던 과객(過客)이 축성천 다리목에서 동사(冬死)하였는데 하잠의 동민들이 시신(是身)을 선피짝으로 싸서 죽었을 때의 엎드린 모습대로 두꺼비등에 매장(埋藏)하였다고 한다.

그후 고급 관료(官療) 두 사람이 찾아와 그들의 선친이라며 동민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앞등은 사등(巳嶝)이라 이장을 하게 되면 큰 화(禍)를 입을 것이라 말하여 그대로 두었는데 댐공사로 수물되었다.

애기장수와 용마

먼 옛날 작동 마을 청룡등(靑龍嶝) 기슭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부부는 사내아이를 출산 했는데 하루는 방아를 찧고 오니 아기가 보이지 않았고 아기를 찾던 부부는 아기가 천장에 붙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돋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옛말에 장수가 태어나면 용마(龍馬)가 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시대는 시국이 어수선하여 장수가 태어나 잘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나 잘못되면 역적으로 몰려 폐가 망신하는 어려운 시국으로 부부는 고민을 거듭하며 의논한 끝에 애기 장수를 죽여 없애기로 결정하였는데, 애기를 없애려면 오래된 처마 밑에 그울음이 묻은 재랍(대마의 속대)으로 애기의 겨드랑 밑을 찌르면 죽는다고하여, 부부는 재랍으로 애기의 겨드랑 날개 밑을 찔러 애기 장수는 죽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애기 장수가 죽자 갑자기 청룡등(靑龍嶝) 위쪽(남암산)에서 용마가 미친 듯이 뛰어 내려오면서 울었고, 그 용마는 청룡등이 끝나는 부근에서 하늘로 솟구쳐 떨어져 슬피 울면서 죽었고 죽으면서 우는 울음소리는 흡사 “애미 때문에, 애미 때문에”를 반복하였고, 그 울음소리는 ‘애밀레, 애밀레’로 들렸다고 한다. 그 용마가 죽은 자리가 하작 마을 아래에 있는 애밀산이며 산 아랫쪽에 있는 들판을 오늘까지 ‘애밀레’이라 부르고 있다. 애기 장수가 태어났던 장소는 상작마을 청룡등(靑龍嶝) 기슭, 오늘날 수리고개(상작 마을 앞 고개)좌측 밤나무가 많은 산기슭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포수에 관한 설화

옛날 문수산 중턱에는 이름난 박포수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는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하루는 대운산(현재 남창과 서창사이의 산)호랑이 굴(범굴)에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고 한다. 총알을 장전하여 범굴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뛰어나와 박포수 어깨를 물었다고 한다. 미쳐 총을 쏘기도 전에 발생한 돌발 사태로 박포수 어깨를 물렸고 격투 끝에 범을 잡았고 박포수는 마을에 내려와 살아 있는 수닭(장닭)을 두드려 어깨에 동여맨 후 돌아 왔다고 한다.

이 박포수는 아마 힘이 센 장수에 버금가는 당대의 명포수로 보이며 지금 문수산아래 보현동에 박포수 묘가 있다. ※ 전해오는 말로는 호랑이에게 물리면 수탉이 효험이 있다고 한다.

호사한 열부

옛날 호랑이가 많았던 시절 문수산 자락에 있는 상작 마을에는 호랑이가 종종 출물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밤에 상작 마을 외딴 집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문 바깥쪽에서 잠을 자고 아내는 방 안쪽에서 잠을 자는데 호랑이가 문 바깥쪽에 자던 남편을 물고 나갔다고 한다.

아내는 고함을 질러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징을 치며 따라가서 합류 하였는데 상작 마을 위 큰 까막소 바위 위에 남편을 물고 앉았는데 아내는 남편의 다리를 잡아당기고 호랑이는 남편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이대고 아낙이 기를 써 남편의 사신을 뺏어 되찾았다고 한다. 상작에는 그를 뒷받침하는 호사(虎死)한 묘가 지금도 있다.

까치외 까치생

옛날 지금의 상작 마을 상류 골짜기에서 은광을 파던중 크다란 은(銀)을 캐었으나 워낙 커다란 은(銀)덩어리가 나와서 여러 사람이 은을 굴려 구덩이 밖으로 나왔는데 그만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 버렸다고 한다. 인부들은 은덩이를 따라 산 아래로 허겁지겁 내려왔으나 은(銀)은 산 아래 바윗돌에 부딪히면서 두 족으로 갈라졌고, 그 은은 두 마리의 까치로 변하여 산 아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다. 인부들은 까치를 따라 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지금의 큰 까치샘이 있는 곳에 날아와 앉았고, 나머지 한 마리는 지금의 작은 까치샘에 앉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달려와 보니 까치는 간 곳 없고, 그 곳에 맑은 샘이 솟았다고 전하며 이곳을 큰 까치샘, 작은 까치샘으로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으며, 이 샘물은 마을의 식수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고, 물맛과 온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은을 캐던 광구는 지금의 은정골(銀井)로 불리고 있으며, 그 은광(銀鑛)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옛 어른들의 구전하는바에 따르면 은구덩이는 그 깊이가 실타래 1개를 풀어 넣을 정도로 깊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어느대사(흔히 원효대사라 함)가 이곳을 지나면서 말하기를 “이 우물에 까치가 날아와서 울고 날아가 버렸다. 그후 알아 보았 더니 그 대사가 입적 하였다고 전해왔다. 그뒤로 이 우물을 까치샘이라 하였다는 일설이 있다.

하작 마을의 범골

서남 웅덩이 위쪽 남쪽으로 뚫린 골짜기를 ‘범골’ 또는 ‘버무독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골짜기에는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이 범골에 대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봄날 아낙네들이 산나물을 캐러 이 골짜기에 올라 갔다가 바위 밑에서 고양이 새끼 같은 동물을 발견하고 너무 귀여워서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는데 갑자기“어흥~!”하는 호랑이의 큰 고함 소리에 살펴보니 호랑이가 바위 위에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라 바구니도 던져버린 채 신발이 벗겨진 줄 모르고 산 아래 마을로 허겁지겁 달려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을 지내도 일어나 보니 던져버리고 온 나물바구니와 신발을 모두 그 주인집 마루 아래에 고이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그 어미 호랑이가 자기 새끼를 헤치지 않고 귀여워 한 아낙네에게 고마운 마음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동물은 이렇게 자기에게 해롭게 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에게 덕을 베푼다는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대소의 길 싸움

왕정지에서 500여 미터쯤 대암 마을 쪽으로 가면 가파른 언덕길이 비좁은 바위틈으로 아슬아슬하게 나 있고 오른쪽으로 수십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밑을 휘감아 돌아가는 물결로 매우 깊은 소(沼)를 이루고 있는데 이 소를 대소라 하고 일명 “벼락소”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소는 매우 깊어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가도 닿지 않는다고 하며, 여기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아무튼 어렸을 때 몇 번이고 잠수를 해 봤으나 겁도 나고 바위 안쪽 밑으로는 깊이 파여 있어 아무도 무서워서 들어가 본적이 없다.

이 깍아지른 듯한 바위 틈에 몇 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애틋한 사연 들이 전하여 내려온다. 엣날에는 시집갈 때 가마를 타고 갔는데 서로가 길을 비켜주면 해롭다고 하여 길 양보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 이곳 대소의 좁은 길에서 가마 두 채가 마주치게 되었는데 가마를 맨 사람들은 양보는커녕 사력을 다하여 마구잡이로 밀어 붙쳤고 그 결과 모두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며 낭떠러지의 아슬아슬한 바위 위에는 물에 빠져 죽은 새 신부의 무덤이 있었으나 댐에 수몰이 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고 전해오고 있다.

문수산과 박포수

골둔터에서 동쪽으로 골안 골짝을 지나 관음곡(觀音谷) 고개를 넘으면 문수산이 있다. 이 문수산은 정상을 경계로 서쪽은 삼동면 둔기리에 속하고 동쪽은 청량면 율리와 북동쪽은 범서면 천상리에 속한다. 이 이야기는 관음골에서 배나무골 오른쪽 등성이를 오르다 문수암 절이 가까워 오는 곳에 지금도 제법 큰 묘가 2∼3기가 있는데, 그 옆에는 오래된 백일홍 고목이 몇 그루가 묘를 지키듯 서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초막(草幕)을 짓고 살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이곳이 박포수가 선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던 곳이라 한다.

이 때만 하더라도 큰 산에는 맹수들이 많았던 때라 박포수도 엽총(아마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소총이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큰 짐승이 나타날 때마다 세워둔 총이 찌렁찌렁 울렸다고 한다.

그러던 하루는 밤이 깊었는데 총이 찌렁찌렁 울리는 것이 아마도 큰 짐승이 나타난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하여 박포수는 총을 들고 어스름 달빛이 비치는 비탈길을 조심조심 호랑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재나무골 마지막 바위가 지붕처럼 옆으로 누워져 있고 그 윗쪽으로 옛날 문수암의 절터였다는 석에 약간 평평한 언덕이 있는데 그속에서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기 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황소만한 호랑이를 어렴풋이 보고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사람이 물려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박포수는 되도록 소리가 나지 않게 몸을 낮추고 비호같이 달려갔다.

박포수는 사정거리 내로 무사히 접근해서 자세히 보니 잡혀온 것은 아리따운 처녀였다. 박포수는 침착하고 민첩하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퇴로(退路)를 확보하고 실탄 일발을 장전(裝塡)하였다. 순간 호랑이는 낌새를 챘는지 멈칫서서 이쪽을 보면서 ‘으흥 …’하고 큰소리로 포효(咆哮)하면서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탕 …’하며 총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산골짜기를 길게 메아리쳐 되돌아오기도 전에 호랑이는 손살같이 박포수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침착하게 몸을 피하면서 다시 한발을 장전하여 ‘탕 …’하고 쏘았다. 호랑이는 바로 앞에까지 와서는 크게 한번 ‘으흥…’하는 마지막 소리를 지르며 집채가 쓰러지듯 ‘쿵’하고 나자뻐지는 것이었다.

박포수는 색시를 들쳐업고 초막으로 돌아왔다. 우선 아랫목에 눕히고 더운 믈을 한 모금 먹인 후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깨어난 새색시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새색시의 집은 범서면 천상골이고 마침 그날이 결혼하는 안날이라 장독대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데 갑자기 훅하고 바람이 일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마치 황소 같은 호랑이의 등이라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고 한다.

그후의 일은 전혀 기억을 못하고 박포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감격하여 새색시는 하엽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새색시를 가마로 모시고 가서 혼례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고마음의 표시로 박포수를 침부모처럼 모시고 부부는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당고개의 처녀귀신

언양장에 가려면 하작에서 당고개를 해서 둔터로 가는 길과 애밀들 산기슭을 돌아가는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이 어느 길이던 간에 아주 기분 나쁘게 으슥한 길이었다.

그 이유로는 처녀 귀신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그 한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어릴 때 이곳에는 처녀 귀신이 있었는데 그 귀신에게 당한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었다. 우리 고장에는 2일, 7일에 서는 언양장을 보러 다녀 장날이면 집에 기르던 소나 개, 닭 등 짐승을 내다 팔기도 했고, 가을이면 남정네들은 오랜만에 언양에서 약주를 한 잔씩하고 오기가 일 수였는데 이럴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처녀 귀신이 나타나서 혼자 오는 남정네를 붙잡고 늘어져 애를 먹였다고 한다.

처녀 귀신이 나타나는 장소는 여러 곳인데 주로 둔터 마을 앞에서 장지뻐든을 지나서 돌다리를 건너는 곳에서부터 당고개 사이와 애밀들 사이였고 남정네들의 두루막자락이나 바지 자락을 잡고 놓지 않아 애를 먹고 혼비 백산(魂飛魄散) 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전해들을 수 있었고 어떤 이는 파란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둘러입은 처녀를 보았다는 애기도 흔하게 전해온다.

술취한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가다가 정신을 못차리고 죽은 사람도 많이 있는데 이 곳은 옛날 가매장을 한 채봉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한 번은 길가던 과객이 붙들려 추운 겨울에 처녀 귀신과 싸우다 동사한 적도 있다. 아무튼 여기에는 처녀귀신이 있다고 하여 밤이 되면 혼자서는 가기가 무서운 길이다.

산성댁의 화적떼 칼자국

구한말 순조(純祖)조에 가서는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어 관리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때의 일이다. 동학란은 거의 평정되었으나 그 무리들이 산속 깊이 숨어들어 의적(義賊)으로 변했다. 1900년 전후에 자신들은 활빈당(活貧黨)이라 하여 관가나 매관 매직으로 치부한 탐관오리들의 재산이나 큰절의 곡간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부정하게 치부를 하였거나 백성들을 못살게 괴롭힌 무리들을 응징하여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기도 했으나 말년에 가서는 도적떼가 되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밤낮없이 마을에 내려와서 곡식이나 돈을 털어 가는 화적떼로 변하였다.

특히 언양을 중심으로 양산과 경주에 걸쳐서 심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통도사의 곡간을 털어 언양장날 장터에서 못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음식을 해서 잔치를 벌이는 등의 활빈 활동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경주 최부잣집(계림에 있는 9대 진사 9대 만석꾼의 집)만은 털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최부잣집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등 많은 인심을 베풀었기 때문이라 한다.

솥발산(鼎足山)에도 그 일당 중 한 무리가 있어 둔기 마을을 괴롭혀 왔는데 하루는 뻔덕 둔터의 신씨(辛氏) 둔기 입향 후 2대째 종손인 산성댁(辛東鍊)의 고조부 되는 신 진(辛 盡) 어른의 집에 화적떼가 나타나서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칼로 기둥을 내리치면서 위협을 하고 재물을 빼앗아 가는 것이 부족했는지 그들은 신 진 어른을 데리고 가면서 돈을 가지고 오면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다. 온 집안은 물론 온 동네가 야단이었으며 누가 돈을 가지고 어떻게 가야 중간에서 뺏기지 않고 괴수에게 전달하느냐가 큰 문제였다.

이 집에는 건장하고 꾀 많은 하인 한 사람이 있어 그가 가기로 하였다. 그 하인은 지게의 양쪽 목발에다 구멍을 파고 엽전을 넣어 구멍을 막은 다음 지게를 지고 약속한 솥발산으로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중간에서 여러 명에게 수색을 당했으나 다행히도 괴수에게까지 돈들 전달 할 수 있었고 무사히 신 진 어른을 구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칼자국이 산성댁 큰채 뒷마루 기둥에 오랜 훗날까지 남아 있었다.

문수암의 칫간

지금은 롯데의 시주(施主)로 절을 다시 지어 없어졌지만 십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 앞에 칫간(변소의사투리)이 있었는데 땅이 좁아서 그랬는지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이곳 칫간은 절앞 절벽에 나무를 걸쳐서 만들었는대 용변을 보면 그대로 그멍을 통해 수십 길 바위 밑 계곡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하루는 통도사와 석남사의 상좌(上佐)중과 문수암 상좌 스님이 우연히 모여서 자기 절 자랑을 하게 되었는데, 통도사의 중은 자기 절의 국솥이 어찌나 큰지 국을 끓일 때는 배를 타고 들어가 저어야 할 정도로 크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석남사의 중이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말이 우리 절에는 아침마다 문을 여는데 문돌짜구(둘쩌귀의 사투리인데 문짝에 경첩처럼 다는 쇠붙이)가 닳아 떨어지는 쇠가루가 한섬이나 된다는 허풍을 떨었다고 한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문수암 중이 자랑할 것을 찾다가 생각이 나서 우리 절에는 굉장히 깊은 칫간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 용변을 보면 그 떨어지는 소리를 내일 아침이라야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다. 아무튼 옛날에는 허풍을 떨었던 풍자적인 이야기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처럼 그럴 법한 우스운 거짓말에 우리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