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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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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유적
박제상 유적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길 7
  • 종목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울주군)
 

소개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던 사당터이다. 박제상은 신라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로 내물왕(奈勿王) 8년(363) 양주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박제상은 눌지왕(訥祗王) 즉위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왕제를 구출코자, 먼저 고구려에 가 있던 복호(卜好)를 구출해 귀국시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내었다.

그러나 자신은 잡혀 심한 고문 끝에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당해 숨졌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두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으니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숨은 곳이 은을암(隱乙岩)이라 한다. 그후 왕은 박제상의 딸을 둘째며느리로 삼고 박제상에게는 대아찬(大阿飡)을 추증(追贈)하였으며, 김씨부인(金氏婦人)은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봉하였다. 이곳에 사당을 짓고 기리는 제를 봉행토록한 곳이 치산서원이다.

치산서원지(박제상 유적)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이다. 박제상은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다.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그를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隱乙岩)에 숨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 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망부석(박제상 유적)

망부석은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돌로 변했다는 전설을 가진 바위를 말한다. 이러한 전설은 몇 군데에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제상(朴堤上)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다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이곳 망부석의 전설이다.

은을암(박제상 유적)

은을암은 새(乙)가 숨은(隱) 바위(岩)라는 뜻이다.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隧述嶺)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 이 바위에 숨었다고 한다. 이 새가 날아오른 자리를 비조라 하여 두동면 만화리에 비조라는 마을 이름이 되고, 또 새가 바위 틈에 숨었다하여 이 바위를 은을암이라 했으며, 여기에 암자를 지어 은을암이라 하였다. 은을암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인데 박제상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하려면 두동 치산서원에서 출발하여 치술령 망부석을 거친 뒤 은을암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은을암과 치술령의 망부석은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있다.

인근관광지

신불산, 작천정, 고헌산, 가지산, 재악산, 영취산, 치술령 반구대암각화, 박재상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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